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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의 美_여행. 비움과 채움
ysoo 추천 0 조회 60 16.06.27 10: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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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이생진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여행, 비움과 채움


우리 선조는 무더운 여름이면 산수 탐방을 피서의 으뜸으로 삼아, 늘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몸과 마음을 비우고 채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쁜 일상에 잠시 숨을 고르고, 어디론가 떠나기 좋은 7월입니다.
GOLD&WISE는 무더위를 피해 여행을 떠나는 계절을 맞이하여 산과 바다를 찾아 삶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KB고객 여러분, 쉼과 즐거움이 있는 여행으로 활기 넘치는 여름을 보내십시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승헌 촬영 장소 제주 김녕해수욕장



포토그래퍼 최충식 촬영장소 강원 인제 내린천


강세황 ‘죽서루’(35×51.4cm,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에 깊이 묻혀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다.

절벽을 끼고 도는 오십천과 그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이 평화로워 보인다. 자연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옛 선조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여행,

산천에 대한 깊은 애정


우리는 여행길에 트렁크를 가득 채운다. 인간과 자연 사이를 무거운 트렁크가 가로막는다.

떠나면서 얽매이고, 비우자면서 덧씌운다. 반대로 선조의 여행은 수양이자 고행이다.

그들은 편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빈 몸으로 자연 속에 동화되길 원했다. 그 뿌리에는 우리 산천을 향한 깊은 애정과 외경이 있었다. 휴가철을 앞두고 우리가 배우면 좋을 마음가짐이다.


여행은 기술로 완성되지 않는다. 문명의 발달로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자연과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설렘의 시각이 심신을 넓히는 진짜 여행을 완성한다. 각종 정보와 교통편이 완비되어 있는 지금보다 과거의 여행이 더 빛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히려 생애 단 한 번 허락된 여행일지 몰라 열심히 보고 아끼던 그때의 여행 기록이 더 깊이 있다. 우리 선조에게 여행이란 단순한 유람이 아닌, 정신을 수양하는 또 하나의 명상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기록들은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다.

매스컴의 영향이 없던 시절에는 여행의 욕구가 지금보다 덜했을까? 아마도 그 반대였을 것이다. 몇몇 선구자를 통해 말로만 전해지는 먼 곳의 풍광은 언제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매체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할 수도 없고 엄격한 사회 규율로 아무때나 외출할 수 없던 이들에게 여행은 인생을 걸고라도 받고 싶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제주 백성을 살려낸 공을 높이 산 정조가 상을 주려 하자 금강산 여행을 가게 해달라는 만덕의 이야기는 그래서 유난스럽지 않다.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이 쓴 <만덕전>은 만덕의 이런 바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원하는 것 없고, 서울 가서 임금님 계신 곳을 바라보고 금강산으로 가서 일만이천 봉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소이다."


만덕의 바람은 만덕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낯설고 불편한 여정일지라도 엄격한 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산에 돌아다녀도 안 되고 절에도 함부로 갈 수 없는 아녀자들에게 여행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유희로 여겨졌다. 물론 남자들도 아무 때나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선조는 자연을 집 안에 들여 마음으로 여행하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다. 이 특별한 여행법을 와유(臥遊)라고 했다.


선조의 여행법, 마음으로 노니는 와유


송나라의 종병이라는 사람이 늙고 병들어 여행 떠나기 어려울 때를 대비해 그동안 유람했던 곳을 모두 그려 방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누워서 여행한다는 뜻의 ‘와유(臥遊)’라 불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와유첩발>에 이런 문구가 있다.


"와유란 몸은 누워 있으나 정신은 노니는 것이다. 정신은 마음의 영이요 영은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

불빛처럼 순식간에 만 리를 갈 수 있기에 사물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

천하의 빼어난 볼거리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옛 문인과 시인들이 거의다 시와 문으로 묘사해두었다. (…) 앉은 자리에서 감상하더라도 마음이 가지 못하는 바가 없다."


눈과 마음으로 산천을 관람하는 이 와유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즐겨 하던 여행법이었다.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즐기다 보면 폭포 소리가 들리고 시가 절로 나오는 경지에 이른다. 선비들의 이 와유 여행을,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 먼 길가기 불편한 이들이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생각해낸 방편이라 가볍게 보지 말 것.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한여름 주말 도로의 정체를 생각하면 지금이라고 별반 편리할 것도 없다. 자연 속에서 심신을 비우고 망중한을 보내는 시간은 기술력으로 되는 일이아니다.

우리 선조의 이 와유는 현대인이 배울 만한 정신 여행법이다. 마음이 가지 못하는 바 없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여행법이다.


산수화에 기록한 명승지의 호젓함

삼척의 망중한을 담은 ‘죽서루’


선비들에게 여행은 예술을 꽃피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시화에 능한 선비들은 입소문 난 명승지를 찾아가 그곳의 풍광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묘사했다. 여기, 특히 많은 사랑을 받은 명승지 세 곳과 그에 얽힌 산수화를 소개한다.


관동에서 제일가는 죽서루
누각 아래 푸른 물 도도히 흐른다
오랜 세월 돌과 물이 어우러진 경치
천고의 문장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도다


1875년 삼척부사로 부임한 심영경이 죽서루의 빼어난 모습에 감탄해 만든 시구다. 당시 수많은 문인이 이곳에 앉아 누각 앞에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으며 각자의 소감을 시로 읊곤 했다.

평범해 보이는 죽서루가 관동 제1경이 된 데에는 절벽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의 힘이 컸다.


동해안에서 가장 긴 하천인 오십천은 발원지에서 동해까지 50여 번 돌아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십천이 50굽이를 돌 때 여울을 이루는 동안 그 사이사이에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 잡았다.

물굽이가 유난한 이 하천은 죽서루에 이르러 가장 뛰어난 풍광을 자아낸다. 오십천 협곡의 암벽은 장기간에 걸친 침식과 퇴적으로 다양한 지형을 형성했는데, 죽서루는 이 협곡이 끝나는 곳에 있다. 절벽과 석회암 지형은 경사가 급한 주변 산지와 어우러지며 ‘관동 최고의 경치’를 만들어낸다. 이곳에는 옛 선비들의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을 즐기는 마음’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자연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는 일은 권력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서루는 웅장하거나 도드라지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바위 위에 기둥을 그대로 올려 17개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이렇게 아름다우니 묵객들의 화폭에 수차례 옮겨졌음은 당연한 일. 특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화폭에 옮기는 화풍이 유행한 조선 후기에는 죽서루와 오십천은 단골 모델이었다.

특히 강세황이 그린 ‘죽서루’는 산수에 깊이 묻혀 있는 죽서루의 모습을 치우침 없는 선비처럼 단아하게 표현했다. 절벽을 끼고 도는 오십천과 그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은 지극히 평화롭다.

가파른 절벽은 계단처럼 안정적이고 단단하게 죽서루를 떠받치고 있다. 이 그림을 집 안에 들여놓고 삼척까지의 먼 길을 마음으로 떠난 이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보물 제213호로 지정된 죽서루는 앞으로 삼척의 더 큰 볼거리가 될 예정이다. 삼척시는 2018년까지 죽서루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정선 ‘구담도’(26.5×20cm, 18세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유유한 강물이 대비를 이루어 신비로워 보인다. 구담봉을 오르며 몸과 마음을 닦은 퇴계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퇴계의 로맨스를 간직한 구담봉


퇴계는 단양군수 자리를 자처할 만큼 단양의 경치를 사랑했다. 특히 단양의 구담봉과 도담삼봉을 유난히 좋아해 “중국의 소상팔경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구담봉 아래를 흐르는 남한강에 대해서는 “봉우리들이 그림과도 같은데 협문이 마주 보고 열려 있고, 물은 그곳에 쌓였는데 깊고 넓은 것이 몹시 푸르러 마치 새로 산 거울이 하늘에서 비추는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 그의 말처럼 단양은 맑은 물과 유려한 봉우리들로 신비한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퇴계가 단양을 유독 사랑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그를 위해 평생을 바친 관기, 두향 때문이다.


"외로운 무덤이 관도변에 있어 거친 모래에 꽃도 붉게 피었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에 강선대 바윗돌도 없어지리라"


조선 후기 문인 이광려가 퇴계 사후 150년을 기리며 두향의 묘를 참배하고 헌사한 시다.

두향은 퇴계가 단양군수로 지내는 동안 퇴계와 깊은 정을 나눈 관기다. 퇴계는 두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단양군수로 부임해 18세 꽃처녀 두향을 만났다. 그녀는 벽촌의 관기면서도 시서화에 능하고 총명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지성인 이황은 두향을 만나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9개월 후 퇴계가 풍기로 발령이 나면서 둘은 애끓는 이별을 맞이한다. 일평생 하나의 사랑을 품게 된 두향은 관에 간청해 관기를 그만두고 강선대 인근에 터를 잡고 수절한다. 그리고 20년 후, 퇴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사흘간 애도한 뒤 강선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두향의 무덤은단양 구담봉 바로 위 말목산 자락에 있다.


구담봉은 단양군 단성면과 제천시 수산면에 걸쳐 있는 암봉이다. 물에 비친 모습은 거북이 같고 물속에 있는 바위에 거북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두사람의 사랑 이야기 때문인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묘한 비련을 느낀다. 그 정서는 겸재의 ‘구담도’에서 더욱 커진다.

정선이 알고 그렸는지 아니면 퇴계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가 호사가들에 의해 부풀려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구담봉이 내뿜는 분위기에는 서글프고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림 속 조용히 흐르는 물과 그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은 현세를 기반에 둔 것 같으면서도 먼 산은 이상 세계의 모습 같기도 하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유유한 강물이 대비를 이뤄 그림의 신비함은 더 강렬하다.

단양에 갈 일이 있다면 가기 전에 이 그림을 먼저 보길 권한다. 비록 긴 시간이 지났지만 단양은 여전히 화구를 꾸려 길 떠나는 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방운 ‘의림지’(26×32.5cm, 조선 후기, 국민대학교 박물관 소장). 저수지와 함께 조성된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한여름의 더위를 달래준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 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모습이 호젓해 보인다. 우리 선조는 피서를 즐기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되돌아보며 마음 다스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인 묵객이 사랑한 고대 저수지, 의림지와 제림


죽서루와 구담봉 외에 조선 시대 시인과 화가들이 즐겨 찾던 대표적인 장소가 또 있다.
앞의 두 명승지가 물을 배경으로 누각이나 봉우리가 돋보이는 풍광을 자랑한다면, 이곳은 숲을 배경으로 물이 돋보이는 곳이다. 만수 면적 15만 1,470m²에 달하는 수리 시설, 의림지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3대 고대 수리 시설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그리고 제천의 의림지다. 그중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곳은 의림지뿐이다.


1802년 가을, 청풍부사로 재직 중이던 안숙은 이 일대를 여행하고 다양한 서체로 이 여행을 기록했다. 그리고 당대 유명한 산수화가인 이방운을 불러 이곳을 그리게 했다.

이방운은 그의 서화첩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에 이 의림지의 특징을 잘 잡아 묘사했다. 그는 정선의 산수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진경 세계를 구축했다. 그림 속 의림지의 아름다움은 제방 위에 조성된 소나무와 버드나무 숲으로 배가된다.

현재 이곳에는 노송과 버드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는데, 이 때문에 ‘의림지와 제림’이 한데 엮여 명승으로 지정됐다. 의림지 제방에 숲이 있는 이유는 수목의 뿌리가 서로 얽혀 제방을 튼튼하게 만들고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현재 의림지 노송들은 제방의 기능을 보완할 뿐 아니라 정자와 어울려 오래된 수리 시설의 의연함을 보여준다.


의림지에는 음악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야금 12곡을 작곡한 가야국의 음악가 우륵이 신라 진흥왕 때, 용두산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곳의 시초라고 한다.

우륵은 노후를 이곳에서 보내며 의림지 근처 연자암에서 가야금을 탔다. 그 옛날 잔잔한 저수지 위로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흐르는 풍경을 생각하니 마음에 작은 진동이 인다. 게다가 그게 500년대의 일인 걸 생각하면 의림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용히 자리를 지켰는지 짐작이 간다. 후세는 이곳을 유원지로 조성해 의림지의 아름
다움을 유지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제천시는 의림지 주변에 목교를 설치해 물 가장 가까이서 가장 훼손이 덜한 방법으로 관람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관광객은 협곡 사이로 장쾌하게 내려오는 용추폭포의 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의 값진 여행 기록


지리 정보와 교통수단의 부재, 그리고 신분상의 제약으로 이동이 쉽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 타지를 본다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 선조가 어렵게 남긴 여행 기록은 현대에 와서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특히 문밖 외출이 누구보다 어려웠던 여성에게 여행의 기회는 기적 같은 것으로, 그들의 순수한 눈으로 써내려간 산천 풍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물한다.


동해 일출을 보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던 의유당 남씨는 남편의 허락을 받아 소원을 성취한 그날의 모습을 <의유당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의유당 남씨보다 더 뜨겁게 여행을 원한 이도 있었다.

남장을 하고 14세에 여행을 떠난 김금원은 조선시대 여자 중 가장 뛰어난 모험가로 꼽힌다. 몰락한 양반의 서녀였던 그녀는 산수 관람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여성들과 달리 여행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철학을 다잡은 진정한 여행가였다. 김금원은 호서와 관동을 여행한 14세부터 서울에 정착해 살아간 34세까지의 삶을 <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에 담았다.



에디터 김선미

자료협조 고려대학교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민대학교 박물관, 단양군청, 삼척시청, 제천시청
참고도서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펴냄),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김학범 지음, 김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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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운 ‘의림지’(26×32.5cm, 조선 후기, 국민대학교 박물관 소장).


水蘭山菊惜香衰, 小棹沿?百頃遲,

自有渚涯成器局, 誰云?旱被盈虧,

雲端不識源窮處, 壑底惟看瀑始垂,

高唱大堤歌一曲, 跳魚飛鴨各天姿

 

수란과 산국화 향기가 시드는 것 애석하게 여겨서 조그만 배 타고 넓은 강을 더디게 올라가네,

저절로 물가의 형세 이루어졌으니 누가 장마와 가뭄으로 차고 줄어든다고 말하겠는가

구름 저 멀리 물줄기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는데 골짜기 밑에는 폭포수 떨어지는 것만 보일 뿐이네.

[방죽노래:大堤曲]한곡조를 큰 소리로 부르니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나는 오리는 각각 천연스러운 제 모습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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