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구속 95마일의 강속구를 뿌려대는 왼손잡이 투수가 있었다. 그의 강속구에 타자들의 방망이는 속수무책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에게 부쳐진 별명도 있다. 언.터.처.블. 그랬다. 웬만해선 그의 공을 건드리기 힘들었다.
믿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잠시 시계추를 1999년으로 돌려보자. 그는 지난 99년 자신의 모교인 부산고등학교를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다. 뿐만 아니다. 이듬해인 2000년에도 모교에 우승켭을 안겼다. 2년 연속 대통령배 MVP라는 타이틀을 덤으로 거머졌다.
우물안 개구리라고? 만약 그의 능력을 국내용이라 폄하한다면 2000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로 안내하겠다. 2000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결승전. 1회 한국선발 이동현이 연속 3안타를 맞고 무사만루 위기에 몰리자 조성옥 감독은 주저없이 그를 마운드에 내세웠다. 그는 첫타자를 삼진으로 두번째 타자를 3루땅볼로 요리했지만 세번째 타자에게 빚맞은 안타를 내줘 실점을 허용한다. 그것이 옥의 티였을뿐, 그는 5회까지 추가실점없이 미국타선을 봉쇄했고 6회 외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과 미국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된 10회 조감독은 다시한번 그를 마운드에 불렀다. 가장 중요한 순간, 믿고 맡길 투수는 그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조감독의 승부수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10회를 삼자범퇴시킨 그는 결국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고 2000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MVP와 최우수 투수상을 품에 안았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 차세대 특급 에이스라 불리던 추신수였다.
그리고 4년 뒤 추신수를 부산에서 만났다. 하지만 4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추신수는 투수가 아닌 타자로 변신해 있었다.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싱글 A팀인 샌버다니노 인랜드 엠파이어의 간판타자로 말이다.
국내 프로야구 최다 연속경기 안타기록(31경기)을 보유한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타자 박정태. 그의 투지를 반영하듯 박정태 뒤에는 '탱크', '악바리', '오뚜기'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리고 최근 '추신수 삼촌'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늘었다. 그렇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유망주 추신수가 바로 박정태의 조카다. 그러고 보면 추신수의 타자 변신은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야~신수. 신수가 훤해졌네. 역시 고국물이 좋긴 좋구나.' 지난 1월 2일 기자는 삼촌과 조카의 달콤한 저녁 데이트에 눈치없이 끼어 들었다. 부산 사직동에 위치한 삼겹살집에서 만난 박정태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카' 추신수를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노마(추신수)가 내 조카 신수라예. 내년에는 꼭 메이저리그 갈낍니다.'
여기서 잠깐! 다음은 박정태, 추신수와 함께한 삼겹살 토크다.
기자 : 아이구. 조카 자랑 하느라 바쁘시네예. (기자도 고향이 부산인지라 사투리를 쓴다.)
박정태 : 예. 얼마나 자랑스러운데예. 보기만 해도 배부릅니다. (어쩐지 박정태는 삼겹살 10인분이 나오는 동안 고기 한점 입에 안대고 계속해서 굽기만 했다.)
추신수 : 삼촌아. 내가 할께. 삼촌 좀 무라(먹어라).
박정태 : 됐다마. 삼겹살도 굽는 요령이 있는기라. 아무나 구으면 안된데이.(박정태는 삽겹살 10인분을 구워 조카 추신수와 기자를 먹인 뒤 후에 3인분을 따로 더 시켜 밥과 함께 후다닥 해치웠다.)
기자 : 조카가 삼촌과 같은 타자가 되서 좋으시겠네예?
박정태 : 어디예(아니요). 지는 신수가 그냥 투수 계속 하기를 바랬어예. 솔직히 왼손투수가 참 매력적이거든예. 근데 본인이 잘 선택해서 한거라 믿습니다. 신수는 워낙 알아서 척척하는 아였거든예.
기자 : 추 선수 왜 타자로 전향하셨습니까?
추신수 : 지도 미국에 도착해서야 팀이 저를 타자로 데려온 사실을 알게 됐습니더. 단장이 저를 불러 놓고는 설명하데예. '미스터 추. 우리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타자로서의 자질을 더 높이 평가한다. 당신은 '파이브 툴 플레이어(5-Tool Player)'다.' 단장이 저를 그렇게 평가해주니 기분은 좋았어예. 그리고 분명 메이저리그 최고의 왼손타자가 될거란 말도 덧붙였고예. 그래서 타자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기라예.
(여기서 말하는 다섯가지란 ▲타격의 정확성 ▲장타력 ▲빠른 발 ▲강한 어깨 ▲넓은 수비 범위다.)
박정태 : 신수가 고등학교때도 4번을 쳤거든예. 타격에도 소질이 있었지만 그렇게 까지 높이 평가했을 줄은 몰랐네. 미국애들 눈이 그랬다면 정확할기라예.
기자 : 지금 타자 생활에는 만족하고?
추신수 : 사실 고등학교때만 해도 타격 연습은 전혀 안했거든예, 개인훈련은 거의 99.9%가 투구연습 이었어예. 물론 지금은 100% 타격연습만 하고예. 만약 조금이라도 후회한다면 이렇게는 못할기라예. 만약 구단에서 다시 투수를 시킨다면? 글쎄예. 아마 노(no)라고 답할깁니다.
기자 : 삼촌이 보는 조카의 타격은 어떻습니까?
박정태 : 지난해 스프링캠프에서 신수랑 같이 뛴 적이 있어예. 시애틀하고 롯데하고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우리 신수 타자로 전향한지 3년 정도 됐지만 참 잘하고 있데예. 한가지 흠이라면 아직 방망이가 물흐르듯 부드럽게 돌지는 않아예. 약간 딱딱한 편인데, 제 폼에 비하면 훌륭하지예. (참고로 박정태 선수의 흔들이 타법은 세계에서 유일한 타격 자세다)
기자 : 추신수 선수는 삼촌 타격자세 보면 어때요?
추신수 : 우리 삼촌 폼을 누가 따라 합니까. 세계에서 하나뿐이 없는데 타격자세 아닙니까. 아무도 못 따라 하지예.(웃음)
박정태 : 저도 가장 난처한 질문이 타격폼이 왜 그렇냐는 거라예. 아….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어예.
기자 : 스프링캠프때 조카 앞에서 부담스럽지 않으셨어요?
박정태 : 가족앞에서 부끄러울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함께 있는 운동하는 것만 해도 좋지예.
추신수 : 저는 삼촌이 준 방망이로 홈런을 쳤어예. 롯데하고 연습경기 말고예. 시범경기때 제가 초청선수로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함께 참가했거든예. 센디에이고 파드레스 좌완 투수공을 받아쳐서 담장을 넘겼지예. 아, 병현이형(당시 애리조나) 만났을때는 볼넷 얻어서 나갔는데 다시 한번 더 만나면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예.
박정태 : 맞다. 그래서 제가 신수한테 제 방망이 몇자루 더 미국으로 보냈어예. 신수가 그 방망이로 홈런쳤다고 하길래 말입니더. 저는 신수가 대형타자가 됐으면 합니다. 파워만 좀 더 갖추면 충분히 메이저에서 통할 수 있다고 보거든예.
기자 : 추 선수도 삼촌 닮았으면 특유의 근성이 있을거 같은데?
추신수 : 근성예? 근성이라. 글쎄예. 2000년도 세계청소년선수권 결승 전날 이었어예. 그때 제가 팔이 퉁퉁 부었거든예. 무리가 왔나. 하긴 계속 등판해 던지긴 했지예. 그래도 진통제 먹고 참아가면서 결승까지 왔는데. 갑자기 시애틀 스카우터가 저를 찾더라고예. 그리고는 내일 결승전에 뛰지 말라고 하더라고예. 그때 제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싫다. 끝까지 내가 마무리할거다. 나 데려가기 싫으면 데려가지 마라. 난 꼭 내 손으로 우승컵 따 낼거다.' 한마디로 근성보다는 깡이지예.
기자 : 박정태 선수는 지난 93년 왼쪽 발목 골절부상으로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판정을 받고도 31경기 연속안타의 대기록을 수립했지예?
박정태 : 그거 제가 근성있는 선수라서 재기할 수 있었던거 아니라예. 모두가 하느님 덕분이라예. 신수야, 니도 빨리 하느님 믿어라. 오늘 9시 30분에 금요예배 있으니깐 기자님도 같이 교회 갑시데이.
추신수 : 나는 내 자신을 믿는데. 또 엄마 아빠가 다 절에 다니시고. 근데 삼촌이 계속 교회가자고 그럽니다.
박정태 : 제가 얼마전에 꿈에서 로또 1억에 당첨된 기라예. 당장 로또 샀지예. 근데 꽝이라예.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하느님의 가르침이구나. 로또 같은 허황된 일확천금 노리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는 그런 계시 말입니다.
기자 : 저는 얼마전에 꿈에서 5광(光)을 했어예. 이거 로또 대박꿈이라는 느낌이 팍 오더라고예. 다음날 1, 3, 8, 11, 12, 15 이렇게 찍었지예. 1광, 3광, 8광, 똥광, 비광 이렇게 1,3,8,11,12하고 5광이면 15점이니깐 15예. 근데 하나도 안맞더라고예.
박정태 : 에이 그때는 고스톱을 치셔야지예.
기자 : 에구.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예. 훈련은 어떻게 하십니까?
박정태 : 지금은 방망이를 잡지는 않고예 웨이트하면서 몸만 만들고 있습니다.
추신수 : 저도 지금은 웨이트 하고 있고요. 대신 좀 일찍 미국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요즘 검도 배우고 있습니더. 집중력을 높이는데 좋더라고요. 우리 삼촌은 요즘 섹스폰 배우고 있지요~
박정태 : 신수 이놈아. 그런 얘길 하면 우짜노! (부끄러운지 박정태 선수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기자 : 최희섭 선수는 시력 보호를 위해 인터넷도 안하고 TV나 영화도 안본다던데. 정말 투수들이 공 놓을 때 그립이 보입니까?
박정태 : 우리는 무식해서 그런거 모릅니다. 그냥 막 휘두르지예.(겸손의 말씀. 박정태는 통산 타율 0.296를 기록중이다. 통산 타율 역대 11위다.)
추신수 : 잘치는 타자들은 투수들이 공 놓는 순간 구질이 보인다는데, 저는 아직 거기까진 아닙니다. 좀 더 노력해야죠. 대신 투수했던 경험이 수싸움에서 많은 도움이 됩니. 저는 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데 볼카운트나 누상의 주자 등 상황을 설정해 배팅 연습을 합니. 삼촌이야 밤새도록 손바닥 다 까질 때까지 휘두르기로 유명하고요.
기자 : 추 선수, 마지막을 롯데에서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추신수 : 저는 롯데제과에서 나온 과자도 잘 안 사먹어요. 사실 저는 롯데 야구보면서 자랐거든요. 얼마나 좋아했는데. 근데 지금은 아니라예. 작년에 삼촌 재계약때 제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 삼촌은 롯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잖아요. 그래서 롯데 별로 안좋아하게 됐어예. 그냥 전 메이저리그에서 40살까지 뛰고 싶습니다.
박정태 : 신수야. 그런거 아이다. 롯데가 얼마나 좋은 팀인데.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기라. 그런 생각 갖지마라.
기자 : 새해를 맞아 조카에게 덕담 한말씀 해주세요.
박정태 : 신수야! 니는 아직 어리니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해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고. 천천히 대신 열심히 하면 곧 기회가 올거다. 그리고 부상이 있으면 절대 안되니까, 다치지 말고 몸조심해라. 또 이건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외국생활이라 외롭자나. 믿음을 가지라. 하느님이면 더 좋고.
기자 : 추 선수는 올해 목표를 말씀해 주시죠.
추신수 : 저는 지금껏 한번도 야구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예. 게다가 미국 가보니깐 다들 저보다 잘하는 선수 뿐입니다. 그래서 남몰래 더 열심히 연습합니다. 올해도 마찬가지고요. 삼촌 말씀대로 부상없는 한 해 보낼 겁니다. 음. 올해는 더블 A에서 시작해서 9월 확대 로스터때 메이저리그에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2003년 시애틀 산하 싱글 A팀에서 투표를 한 적이 있다. 누가 제일 빨리 메이저리그로 갈 것 같냐는 질문이었다. 헌데 팀 선수 30명 중 25명이 추신수를 지목했단다. 뿐만 아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역시 차세대 유망주로 추신수를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 2003년 2월 스프링캠프때 싱글 A 선수인 추신수를 이례적으로 참가시킨 대목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가장 존경한다는 추신수. 하지만 최종 목표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뛰어 넘는 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추신수. 그에게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50-50'을 기대해 보는 것은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