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여행지를 전주로 정한 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지난 고덕산 산행 때 답사치 못한 만경대도 한 몫 하였다.
여행을 끝내고 아이들과 헤어진 후 이렇게 따로 고덕산성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
지난 고덕산 산행 ☞ http://cafe.daum.net/phanmaum/FXy6/562
만경대의 위치
지난 고덕산 산행 때 답사치 못해 아쉬움이 남은 남고산성 만경대를 찾았다.
분명 이 자리 이 이정표에서 헤매다 말았으니, 오늘 또다시 이정표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만경대 →0.2km>
이정표가 가리키는 차량 뒤로 200m 들어가 보았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만경대를 찾을 수가 없다.
공동묘지로, 능선으로 헤매었지만... ※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이정표는 잘못 되었다. <→0.2km)를 <↑0.2km>로 바꿔야 한다.
결국 서문을 올라서서...
서문에서 불과 20여 미터 전방 우측에 이정표가 보인다. 사진 좌측엔 남고사가 보이고...
만경대 암각서가 우측 산길로 50m 오르면...
만나는 남고산성 바위지대에 있다.
이름이 말하듯 만경대(萬景臺)는 사방 조망이 트이는 곳이라 망원경이 비치되어 있다.
남고산성은 고덕산성이라고도 하며,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 방어를 위해 쌓았다하여 견훤산성이라고도 한다.
만경대는 서문을 중앙으로 억경대와 마주 보고 있다. 만경대암각서는 포은 정몽주, 관찰사 권적, 이서구 등의 시가 새겨져있다.
이성계가 남원에서 황산대첩을 이룬 후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어른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렸다.
그 자리에 종사관으로 함께 한 포은 정몽주가 있었는데, 새로운 왕조 개창을 암시하는 이성계의 '대풍가'를 듣더니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홀로 말을 몰고 전주천을 건너 지금의 남고산 만경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만경대 벼랑에서 멀리 북쪽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쓰러져가는 왕조의 한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한 수의 시에 담아 읊었다.
이른바 ' 등전주망송대(等全州望宋臺)'다.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서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1390년 최영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하는 권력구조가 재편이 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력가 최영이 하루아침에 목슴을 잃는 일이 요즘 김정은 3대 세습에서 장성택 처형되듯 간단한 일이었다.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려 전력을 다할 무렵, 혈기 왕성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26세)이 등장한다.
칼잡이 이방원은 글쟁이 정몽주보다 30년이나 어리지만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에 도발을 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가 즉석에서 '단심가((丹心歌)'로 멋진 승부를 겨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 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56세의 생을 마감하고 3개월 뒤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가 된다.
높은 누대에 기대어 저녁 노을을 보며
슬픈 신하는 망국을 그리워 하네
겹겹이 청산은 넓은 광야가 둘러싸고
집집마다 서리 맞은 나무 겹겹이 성을 둘렀네
서풍이 비를 뿌리니 가을이 이르고
수평선에 해가 지니 바다기운 돋아 나네
여기는 포은이 시를 읊던 곳
하늘가에서 홀로 서울을 바라보네.
이서구(李書九)
관찰사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만경대에 올라(登萬景臺) 포은 선생 원운과 권적의 차운한 시를 보고 새긴 시다.
안내판
만경대에서 전주시내를 내려다 본다.
첫댓글 결국 해내셨네요. 좀 얻어 갑니다.
수고 많아 네요
전주시내 문화재 답사와 완주의 편백숲, 그리고 호남정맥의 옥녀봉과 한오봉을 1박 2일로 다녀왔어요.
귀가길에 일부러 남고산성 만경대를 들렀습니다. 언젠가는 답사해야만 될 것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