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간을 나타냈던 20:26의 표현과는 달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이 문구로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의 발생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은 20:26-29의 현현 이후 그리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고 본다. 디베랴 바다 - 요한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음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본문은 이를 간접적으로 발해주고 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 '긴네렛 바다' '긴네롯 바다' '게네사렛 호수'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는데, '디베랴 바다'로 불리어진 까닭은 '디베랴'가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타내셨으니 - 여기에 서술되는 예수의 현현은, 요한의 말대로 하면 세번째이나 정확하게는 네번째이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
두번째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 세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지금이 네번째이다. 아마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을 구별하였던 듯하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현현의 이야기는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는 점, 소재가 물고기라는 점에서 눅 5:1-11과 유사하다는 견해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 때문에 결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눅 5장에서는 제자들이 고기글 잡지 못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예수의 명령을 따라 다시 바라로 나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계속 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눅 5장에는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자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는 153마리에 달하는 많은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른 찢어지지 않았다고 보도된다. 셋째, 눅 5장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나 여기에 오는 이야기는 지상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요 21: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함께 잇더니 - 함께 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이중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세베대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아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제자들이 왜 갈릴리에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바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 (2)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자 실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에 자기들이 거주하였던 갈릴리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3)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날 준비를 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을 것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추측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라는 점에서 다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며 세번째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코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없는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이 언급되지 않은 점과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한 점 등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요 21: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물고기 잡으러...잡지 못하였더니 -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과거의 직업으로 되돌아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20:26-29와 쉽게 조화되지 않아 보인다. 혹자는, 최초에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로 간다고 했을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불확실하다 하더라고 이 이야기가 복음서의 현 위치에서 갖는 의미는 사도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사람을 낚는 것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은 예수의 명령과 도와주심에 의해서만 온전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본문 가운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표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며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 성공을 거둔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도적 사명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좋은 결과를 얻들 수 있다. 하편 본문의 '이 밤에'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에 가장 좋은 시간이 밤이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잘 이해되는 부분이다.
[요 21: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날이 새어갈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이아스인데,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1)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 이렇게 보는데에는 다른 곳에서 사용된 '프로이'의 용법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바 마 20:1에서 이 단어는 그날의 일이 시작되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다음과 같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지금 갈릴리 바다에는 여명이 밝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런데 바닷가라는 특성상 자주있는 일인 것처럼 어느 정도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두번씩이나 예수릎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면 눅 24:16의 상황처럼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닷가에 서셨으나 - 여기에는 예수께서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 설명이 없다. 다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고 언급될 뿐이다. 아마 이것은 20-:19에서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물리적 작용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셨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요 21: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애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갈린다. 혹자는 '어! 여보게들!'의 뜻으로 보며 또 어떤 학자는 '젊은 이들!'의 의미로 본다. 현대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애들아'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애정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고기가 있느냐...없나이다 -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18: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라기온'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와 '....와 함께'를 뜻하는 '프로스'가 결합된 것으로'떡과 함께 먹는 양념'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러니까 본문의 '고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요 21:6]"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1)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거나 (2)아니면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그러한 추측은 본절에 접근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 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혹자는 '오른쪽이라는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가 '행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여퀴에인)는 말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때 제자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응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으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수 었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읜 관계에있으며 그들의 능력의 원천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요 21: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주시라 -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시몬 베드로...겉옷을 두른후...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