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깊은 집 / 차하린
구불구불한 고샅길을 걷다보면 마을 끝자락쯤에 나타나는 집이다. 동구 밖에서 보면 마을 속에 안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뒷산에서 흘러나온 지맥이 머문 집과 마당이 온 힘을 다해서 마을을 품고 있다.
담장 곁에서 까치발로 집안을 들여다본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지붕이 조금 보일뿐 깊은 마당은 비밀처럼 숨겨졌다. 한여름부터 화등처럼 골목길을 밝히던 능소화 꽃이 사라진 넝쿨에 불붙은 잎사귀만 드리워진 담장을 돌아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잔디마당에는 가을빛이 고즈넉하게 내려앉았다. 대문에서 안채까지 부정형현무암 디딤석 세 줄이 곡선으로 길게 깔렸다. 집은 한옥 느낌이 나도록 주홍색 기와를 얹었지만 벽돌로 이층까지 올린 양옥이다. 대문 왼편 화단에는 만 리를 간다는 금목서 꽃향기가 바람이 없어도 사방으로 퍼지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 향기였다. 가을이 들면서 된서리가 내릴 때까지 상큼한 꽃향기로 가슴을 톡톡 쏜다. 그 덕에 소슬바람이 부는 가을이 쓸쓸하지 않다.
정원에는 2월부터 매화꽃이 피고나면 서향꽃이 연이어 향기를 뿜는다. 완연한 봄 햇살이 퍼지면 목련과 수수꽃다리도 얼굴을 내민다. 이때쯤 애플민트와 레몬밤이 양지바른 화단에서 새순을 밀어 올린다. 현관 앞 화분에 심어둔 로즈마리와 핫립세이지도 향기를 보탠다. 들녘의 찔레꽃 향기가 담장을 넘어오기 시작하면 마을 앞 가로수목인 이팝꽃이 팝콘처럼 부풀고 뒷산 아카시아 향기가 애절한 뻐꾹새 소리를 타고 온 마을을 덮는다. 여름에 수국의 화려한 꽃색이 잔물결처럼 마당에 깔리면 배롱나무에 아기자기한 진분홍 꽃이 불볕 여름을 달군다. 가을에는 담장 아래서 구절초가 하얗게 무리지어 피면 금목서가 진한 향기로 제 존재를 알린다. 금목서 꽃은 향이 좋아서 오스만투스 향수 원료로 쓰일 정도다. 화학적으로 정제된 비싼 향수보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던 자연 그대로 향이 으뜸이다. 자연의 향기로 사계절을 가늠할 수 있는 곳. 이곳이 내가 꿈꾸던 무릉도원이다.
집 뒤꼍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큰 감나무 근처에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는 배수를 위해서 지면을 높여 자갈과 판석을 깔아두었다. 스무 남 개 되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각각 품고 있는 제 맛을 숙성시키기 위해서 사계절 바람을 맞으며 덥고 추운 시간을 견딘다. 농익은 세월을 담고 있는 느긋한 그들의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쫓기듯이 허겁지겁 살아온 지난날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장독대 가장자리를 따라 빈터에도 화초를 심어두었다. 여름 내내 꽃을 피워낸 봉선화와 시들은 보랏빛 꽃대가 아직도 매달린 배초향이 서늘한 바람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무더운 여름날 펄펄 끓는 추어탕에 한 움큼 올라가서 없던 입맛도 살려주었던 배초향은 단방약으로 쓰일 만큼 내겐 소중하다. 이 집에 오기 전까지 베란다에서 키웠던 것인데 한데에다 심어두었더니 기세 등등하게 세를 불렸다. 늦여름부터 가지 끝마다 보라색 꽃대가 하늘거리면 유럽의 라벤더 평원이 부럽지 않다.
처마 끝에 머물던 햇살이 슬금슬금 거실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눅눅함을 걷어내는 까슬까슬한 이 가을 햇살이 얼마나 좋든지 묵은 솜이불을 빨랫줄에 널어놓고 바지랑대를 높여두었다. 오며 가며 들락거리는 바람에 맡겨두고 거실 앞 쪽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떠올려 본다. 모든 것은 지나고 보면 한순간인데 그 속에서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양 온 신경을 쏟았다. 왜 진작 마음을 내려놓고 살지 못했을까
아침마다 참새소리에 잠이 깬다. 아파트에 살 때는 숙면을 하지 못해 힘든 적이 더러 있었다. 여기로 온 후로 생체리듬이 자연의 시간에 저절로 맞추어졌다. 덤으로 햇살이 수런거리는 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와 철 따라 바뀌는 꽃향기 맡으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온몸의 감각이 다 열리면서 온 우주를 느낀다.
이곳에서는 자연과 교감이 일상이다. 달 밝은 밤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창가에 부딪히곤 한다. 그럴 때는 문풍지가 떨리던 어린 시절을 더듬으면 생각이 부풀어 올라 온밤을 꼬박 샐 때도 있다. 그믐밤에는 널평상에 누워서 초롱초롱한 뭇별을 바라본다. 별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인간 세상의 사소한 감정에서 벗어나 수억만 개의 별빛이 요동치는 우주로 끝없이 나아간다. 밤하늘로 무수한 상상을 쏘아 올리면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시간, 이 시간이 참 좋다.
그뿐만 아니다. 계절마다 체험하는 바람소리 빗소리가 도시와 다르고 산과 들에 흰 눈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겨울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비가 쏟아지거나 눈발이 날리는 날에는 정원에서 키운 허브와 들판을 산책하면서 따온 야생 박하를 다기로 우려내서 마신다. 뜨거운 차 한 잔이 한기도 몰아내지만 맑고 상쾌한 향기가 몸속을 돌면 마음까지 맑아진다. 철마다 이런 것을 푸지게 경험할 수 있는 이곳이 내겐 제격이다.
새벽이슬 내리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들려오는 듯해서 창문을 열었다. 늦가을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훅 들어온다. 밤새 별빛에 젖은 낙엽 냄새가 난다. 제 할 일을 다 하고 스스로 몸을 낮춘 나뭇잎이 욕심 많은 인간보다 겸손해 보인다. 희끄무레한 하늘에서 동살이 트고 있다. 얼른 일어나야겠다.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집이 있다. 아직은 마음속에만 있는 상상의 집이다. 가을이 깊어지니 마당 깊은 그 집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