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자들 간에 2차대전의 발발시점을 어디로 보느냐는 다소 차이가 있다.
1차대전의 연장으로 보는 이도 있고,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대체로 독일의 폴란드침공을 그 시작으로 본다.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본다면 그 일을 시작한 이가 2차대전을 일으킨 원인자가 될수도 있다.
그 원인제공자의 이름을 부르면 만주라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이시하라 간지(石源莞爾)..
그는 그들이 칭하는 대일본제국의 육군중장으로 예편했음에도
전후 극동 전범재판이 진행될때 피고가 아니라 증인의 신분으로 출석했으며
논리정연한 언변으로 재판부를 휘어잡기도 했다.
명장으로서의 느낌보다는 전략가,사상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그가 저지른
만주사변이란게 어찌보면 우익혁명일수도 있고, 항명에 의한 쿠데타일수도 있다.
그즈음의 그는 중령계급장을 단 관동군의 일개 작전참모였으며
도쿄 대본영은 커녕, 현지사령관 조차 모르게 진행된 황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쪽 2차대전 얘기하다가 다소 뜬금없어 보이고,
되짚어 보자면 우리네 인물도 많은데 웬 느닷없는 장충동이냐고 할수도 있지만
日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정적으로서,
대척점에 있던 그의 행로가 우리와 무관치 않으며
니치렌을 근본으로 한 그의 역사관이 eastno의 생각과 부합되는 부분도 일부있고
출신은 맘에 안들어도, 인간적인 매력을 갖춘 로맨티스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본육사를 21기로 졸업한다.(다카키 마사오는 57기다)
육군은 육사16기 이후부터 독일로 유학을 보내 전략과 군사학,유물론을 습득케 했는데
그는 독일유학전 이미 니치렌신도가 되어 떠났다.
니치렌..
근대 일본에서는 불교와 천황을 중심으로 한 내셔널리즘이 많았고
그들중 하나인 니치렌이란 불교교리중 "법화경"을 신봉한 13세기 승려의 이름이며,
우리가 더러 남녀호랑객교라고 오역하기도 하는,
남묘호렌게쿄(南無好法蓮華經)라 불리우는 일본불교다.
우리에겐 3공시절 탄압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역사도 갖추고 뿌리도 있으니 우리에게 인식된 만큼의 사이비 종교는 아닌듯 싶다.
이 니치렌스님이 대예언하기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전대미문의 대전쟁이 반드시 일어나며
일본 중심의 세계통일이 실현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3세기의 니치렌이 20세기의 문고리까지는 잡았으되 열어보지는 못한듯하다..)
그 교리에 의해 일본이 세계대전후 세계의 중심이 되리라는 확신을 그는 갖고 있었다.
또한 일본이 중심이 된 황인종이 백인종의 시대를 종식시킨다고 믿었다.
독일유학에서 습득한 물리적인 하드웨어와
니치렌의 의식이 주입된 소프트웨어를 결합시켜 "최종 전쟁론"이라는 집필도 한다.
그의 역사관이 나와있는 첫째는, 인류 전쟁의 역사이다.
전쟁이란 무기와 전술의 진보에 따라 규모가 커져가고
지역간에서 국가간, 나아가 국가연합사이로 발전한다.
최종적으로 세계를 양분하는 2개의 세력이 맞붙어 한쪽이 이긴다.
그 시점이 되면 종래의 상상을 뛰어넘은 대규모의 파괴력을 갖춘 무기가 등장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류는 두번다시 전쟁을 할수없게 되며 그래서 평화가 정착된다..
이시하라는 이 이론을 기초로 하여 소비에트,아메리카,유럽,동아시아등 4개 지역간의 전쟁을 상정했다.
동아시아란 일본이 중심이 된 조선,만주,중국의 연합이다.
최후로 동아시아와 미국이 남으며 천황은 동아시아 연맹의 맹주에서 세계의 천황으로 등극한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의 논리이므로, 통찰력은 있어 보이지만.. 결국 니치렌과 진배없다.
그는 아시아 북부인종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간주했고
그 지역이라도 러시아인은 무지몽매하다고 봤다.
만주국을 세우면서 오족협화(五族協化)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건국이념으로 표방한다.
오족이란 일본,조선,만주,몽골,중국이다.
이 발상은 후일 우리 할배할매들에게도 강제주입되었던 대동아 공영권으로 변질된다.
또한 이런 생각도 갖고 있었다.. 만주는 결코 중국이 아니다.
만주의 동북부는 예로부터 조선족의 고토이고, 고구려의 4세기까지 수도인 환도는 만주였으며
고구려유민으로 건국된 발해국도 만주에 있었다.
그후 여진족의 복속이란 조선의 만주 지배나 다름없다.
만주를 중국의 한 토후국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지나족의 중국정부는 만주를 마치 예전부터 한족지배의 영역같이 토후국으로 부르며
만주족이 정한 지명인 심양을 明나라 이전의 지명으로 되돌리는것을 나는 납득할수 없다.
영어로는 Manchuria로 표기되는 지명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바꾼 고유명사에 대하여 아첨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신해혁명시 세계열강이 원세개의 중국을 淸의 계승국가로 인정치도 않았다.
만주가 지나족에게 속한다는 견해는 만리장성이 존재하는 한 억지다.
그 성곽 라인부터 관여치 않겠다는 의사표시가 아니라면 스스로 때려부셔야 한다.
(만주는 1948년까지 한족에 의한 전면지배하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eastno의 생각과도..)
1911년.. 300년을 이어온 여진족의 淸은 신해혁명에 의해 망했고
그로 인한 당시의 만주란 아시아 버전 서부개척시대로 불리울만큼
온갖 잡놈들이 우글댄 무주공산이었다.
야망의 군인,관료,관동군,만주군,팔로군,장개석군,조선독립군,
아편상,마적집단,첩자,온갖 군상들이 뒤엉킨 놈놈놈들의 집합소였는데,
그곳에 "장작림"이 있었다. 숯불장작 캐내는 숲이 아니라,
淸이 망한후 전국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담론이 난무하던 시절,
지방마다 군벌이라는 이름으로 군사력을 가진 세력들이 창궐했는데
만주지역의 군벌들을 평정한 인물이다.(삼국지의 "원소"정도 사이즈라면 얼추 맞을듯..)
그는 비록 마적 출신이었지만,
권력과 사욕만이 목적이 아닌 나름의 애국지사였고, 그 지역에서 민심도 얻어 추앙받는 사람이었다.
일본은 그를 무시할수 없었고, 그도 일본의 배경이 필요했지만
그들의 불편한 밀월관계는 깨지고 1928년 기차역에서 일본에 의해 살해된다.
그를 승계한 아들 "장학량"은 아비보다 한수 위의 범생 애국지사로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내전을 멈추고,
국공합작으로 관동군을 몰아내야 한다며 장개석을 설득하다 구금시키기까지 한다.
그즈음의 중국대륙이란 제후들이 설쳐대는 삼국지 초기의 혼란에 다름아닌 상태였고,
동북부 지역은 힘의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
장작림 폭사사건 4개월후..
관동군 작전참모를 명받아 만주로 부임하는 이시하라의 가슴속에는 정립된 생각이 있었다.
근대전은 지구전을 근본으로 한다.
태평양을 향해 있고 아시아 대륙을 등에지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아무리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미국과 겨룬다 해도
배후의 만주,조선이나 북중국을 통하여 소련군이 침입한다면 국방이 문제가 된다.
하여 일본은 국방의 근거지를 대륙에 두어야 한다. 대륙에서도 본거지는 만주다.
그러나 만주를 단순히 일본의 권익의 대상으로 지배하려는 생각은 옳지않다.
중국에게 실지회복을 자극하여, 만주가 양국사이의 쟁점이 될뿐이다.
그보다는 일본인,만주인,중국인까지 포함하여 이기적인 권익은 버리고
각 민족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독립국을 세워 아시아의 이상국을 만든다. 그것이 왕도낙토다.
한나라가 다른나라의 영토를 점령하여 식민지가 아닌 공동국가로의 전환이 가능한 얘기인가..
라는 의문에 대해 가능하다,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에 처음하는 실험일 뿐이다.고 생각했다.
이시하라 중령은 이타가키 대령,특무대 하나야 소령,장학량 고문부의 이마타 대위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극비리에 계획을 짰다.
조선군(한국주둔 일본군)참모 간타 중령과도 뜻을 모았다.
현지 일본군 살해사건등을 이용해, 도쿄로 중국군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급전을 계속 날렸지만
대본영에서는 다데카와 소장을 급파해 무마하려 하니, 이시하라는 뇌관이 필요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다데카와가 봉천에 도착하는 9월 18일을 디데이로 정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데카와가 히로히토의 명령을 받고왔기 때문이라는 설과
그의 도착후의 거사란 어렵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어쨋건 9월18일 23시에 다데카와가 게이샤집에서 한껏 마신후 잠자리에 들었을때
봉천 북쪽 800m에서 철도 레일이 폭파된 것이다.
소리는 크고 파괴력은 작은 오더메이드 폭약이었다.
관동군사령관 혼조 대장은 이시하라가 포함된 참모진과 함께 요양을 떠나 여순에 도착해 있다가
봉천의 특무대로 부터 만철선이 폭파되고 일본수비대의 교전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시하라는 짜여진 수순대로 나서서 즉각 출동해야 한다고 사령관에게 건의했다.
아니야, 좀 기다려봐..
혼조가 의아하다는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때
다데카와 영접을 명목으로 봉천에 가있던 이타가키대령으로 부터
아군1개 대대가 장학량군과 충돌하여 교전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혼조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시하라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시하라는 준비해서 달달외어 두었던 작전 계획을 늘어 놓았다.
사령관은 점점 흡족해져서 드디어 승인이 떨어졌고 예하부대로 출동명령이 하달되기에 이른다.
다음날 19일 아침..
혼조 일행이 봉천에 도착할 즈음 이시하라는 무력진군의 확대를 사령관에게 요구했다.
바로 지금 만주와 몽고를 해결하지 않으면 백년을 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북만주쪽에 병력을 투입시켜도 소련은 지금 2차 4개년계획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럼 뒷처리는 어떻게 한다는겐가..
그는 그 질문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주전체를 점령합니다.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어 민중의 손으로 독립국가를 세우는 겁니다.
일본이 그동안 해오던 권익을 버리고 화합의 정신으로 나간다면 민중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새정권이 들어서면 군사비도 간접세나 그외 것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도쿄로 3개 사단의 증원을 요청하라고 강조했다.
왕도니,협화니 뭐 이런놈이 다있나싶어하던 혼조는 차츰 발상 자체만은 참신하다고 느꼈다.
냉정한 판단을 할 경우 그러한 이시하라이즘이 과연 만주 민중에게 먹힐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기발한 착상력을 높이 평가하게 됐고 그의 치밀한 계획을 인정했다.
좋아, 한번 해보자구..
혼조는 국방상과 참모총장에게 3개사단 증원을 요청했지만, 도쿄로 부터의 답이란..
사변을 절대 확대하지 말라는 명령과 본토의 증원은 물론 조선군의 증원까지도 불허했다.
이에 이시하라는 조선군의 간다와 연락을 취하여,
한만국경의 길림,간도쪽의 헌병대위 아마카스로 하여금 불안상태를 조장시키니
결국 조선군의 단독파병이 실현되었고 관동군은 하얼빈을 지나 금주까지 내달렸다.
그는 장학량과의 전투에서 작전입안시 만주벌판은 망망대해와 다름없으니
해군전술을 도입시켜야 한다고 낮도깨비 같은 주장을 했고,
실제로 만여명의 병력으로 23만명의 장학량 동북군을 무력화 시키기도 한다.
이시하라는 10월 8일 금주외곽의 병영을 폭격했다.
그 바람에 미국 영사관이 피해를 입어 항의했으나 그는 태연자약했다.
우리정부를 그 구찮은 국제연맹에서 탈퇴시키려면 더 곤란하게 만들어야해..
불과 6개월도 안되는 1932년 3월9일 부의를 찾아내어 만주국이 설립된다.
이 사건은 정국을 들쑤셔 놓아 정부내 각료교체라는 파장을 일으켰고,
국제적으로도 외교에 큰 충격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것은 관동군의 일개 참모따위가 세계로 향해 던진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그해 8월 외려 대령으로 승진하면서 만주를 떠난다.
만주사변의 책임을 지고 제출한 사표가 반려된 이유는
우익의 청년장교들로부터 우상화되었고, 어느새 국민간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인에게 맡기면 되는거야.. 그가 귀국길에 중얼댄 말이다.
허나 그가 가져다준 영토에는 박수를 보냈지만
그의 이상이나 사상인 오족협화의 왕도낙토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귀국후에도 이상향의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
혼다 유스케라는 관료로 하여금 일본인 농업이민단을 구성케 하여
1932년 10월5일 고베항에서 423명을 보내기도 한다.
유스케와의 서신에는 그의 생각이 엿보인다.
내가 사표를 제출한 것은 만주에서의 원죄 때문이지만
자유로운 민간인이 되서 만주의 강한 지도자가 되고싶었기 때문이기도 하지..
이민단이 엄청 고생을 하고 있는데 봉천 특무대에선 15개 이상의 집창촌을 직영하며 돈을 긁고 모았고
헌병대와의 이권싸움으로 옥신각신하더군, 헌병대는 그들대로 아편생산에 몰두했었지..슬픈얘기야
그곳을 떠나기전 "만주국협화회"를 만들었으니,
자네도 참여하여 왕도낙토의 만주국 정당으로서 키워주길 바라네.
제국육군의 괴뢰국가가 아니라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말이야.
난 지금 제네바에 있고 국제연맹에 출석하여 만주에 대한 청문회에 간다네..
이시하라는 중국과의 전면전을 처음부터 반대했지만 결국 중일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고노에 수상에게 중지를 건의했지만 거절당했고
남경대학살의 기막힌 소식을 듣고는 유스케에게 글을 보낸다.
내가 물꼬를 튼 이 강의 흐름이 생각치않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나는 백번죽어 마땅하다.
처음 생각했던 강의 흐름은..유감스럽지만 내손을 떠나 지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렸어.
유스케,내가 구상했던 모든 것들과 함께..나는 끝났다네.
그것은 정적 도죠 히데키에 의한 일이었다.
그가 관동군 부참모장으로 근무할때 참모장이었던 도죠 히데키와의 악연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는 도죠로 인해 한직의 교토사단장을 전전하다가 41년 3월 예편한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소식을 듣고는 도죠에 대해 독설을 내뿜었다.
눈앞의 기름때문에 국민을 담보로 전쟁거는 미친놈도 있다더냐.. 이 전쟁은 진다.
지갑에 천원밖에 없는데 만원짜리를 사려는 일본과,
백만원을 가지고 만원짜리를 사려는 미국과 싸움이 되겠어?
그의 주장은 한중일이 합체가 된 상태에서 소련을 제압한 후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운다음 미국과 결승전을 해야한다는 논리였다.
1942년말 도죠의 초청에 이시하라는 그를 독대한다.
천황을 제외한 권력의 정상은 또라이 재야인사와의 만남에서 "대정익찬회"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것은 3공시절 유정회와 같은 어용단체로서 왕따 중이었다.
당신이 만들었으니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시게나..
그 무렵 과달카날섬의 공방전이 패배직전이었다. 전쟁에 대한 답변도 그랬다.
전쟁지도를 당신은 할수가 없어, 퇴진하는게 어때..당신은 총리를 그만둬야 해.
그날 독대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후일 극동 군사재판부가 도죠와의 의견차이에 대한 설명요청을 하자,
그런일은 없었다. 나에게는 의견이란게 있지만
그에게는 의견이 없었으니 의견대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재판부에 대해 거꾸로 이런 발언도 했다.
민간인 대상으로 폭격을 명령한 트루먼이야말로 전범으로 기소되어야 한다..
그는 1948년 A급전범으로 교수형당한 앙숙 도죠히데키보다 8개월을 더 살다가 지병으로 병사한다.
우리의 시각으로야 침략군의 한 구성원일뿐이며, 악명높은 일본군중 한 장교일뿐이다.
자국내에서 조차 평가가 엇갈리는 그 시절 육군의 이단아였고,
출중한 인물이긴 했으나 천방지축의 난물이기도 했던 돈키호테적인 그의 삶이
eastno에게는 얼핏 풍운아로 비춰지기도 하여 한때 관심의 대상이었다..
|
첫댓글 그래서 일본어에서 간지(感情)난다 그러는구나..엉뚱한 무명의 동문서답..
으음, 국기가 있다는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인듯..저라고 장충동 군바리가 멋지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의도는 아니고, 그때 이런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고, 그가 이런 생각을 하던 인물이었다는걸 말하고 싶었다는.. ^^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안빼먹고 정독을 했습니다..그랬더니 으음...
뭔 소린지 당췌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게지.. 도죠란 인물이 독일로 치면 히틀러인디, 근디 그 도죠 대신 이시하라가 정권을 잡았다면 그 전쟁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고, 우리에게는 웬수일수도 있겠지만 몽골리안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는 좀 아쉬웠다는게 요지라는.. 만주에서의 실험도 그가 실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며..만주에 대한 영역이 우리 한민족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그리 보여질수 있다는 사실이 맘에 들었다는..또 조선후기때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렸다면 만주의 회복이 가능했다는걸 이시하라가 보여 주었다는 아쉬움 따위..
(남묘호렌게쿄-일련정 , SGI. 창가학회) 일본정부가 손 안대는 셋 중 하나라든가.... 조총련, 야쿠자, 창가학회... 세밀히는 모르지만 공명당도 만들고 교육사업에, 교 활동에.... 다양한 형태로 보이더이다.
으음, 역시 선수는 선수라는..^^ SGI가 우리나라에도 지부가 있다더군요.. 다카키 마사오가 누구인지도 익히 아시죠
왜 또 정렬님을....집적거리셈 혁명 초일 당직 아나가 오독하니까 옆에서 "빛날 희"라고 고쳐준게 아마 JP였다나 어쨌다나....
또 한번 쥑이신다는.. 항복 ^^ 그 부들부들 떨며 방송한 아나운서가 박세씨 였지요 미스터 입술
요즘은 제가 헐레벌떡 삶을 살다보니.......... 이시하라 간지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 투덜 고수님의 추종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요. ^^ 저희들이 어릴 때, 어른들이 '남녀호랑개" '남녀호랑개" 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지요. 어떤 사이비 종교 정도로 알았다고 할까....니치렌의 니치렌종? 일본의 신불교이지요. 니치렌은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2살 천태종 세이초지에 맡겨져 출가...1253년 고향으로 돌아와 세이초지에서 '나무묘법연화경' 의 제목을 외우고 입교 선언한 뒤 니치렌종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을 외우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으로 빠른
성불을 할 수 있다고.....근데 나무묘법연화경이 일본말로 '남묘호량개교' 라고 합니다. 글고 나무라고 하는 것은 귀의, 신순의 의미로 '법화경' 을 숭배하고 믿고 받아 들인다는 의미래요. 이것을 경상도 사람들은 발음이 잘 되지 않으니 그냥 '남녀호랑개' 로 발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녀호랑개' 만 외우면 성불(천국) 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단순한 신앙인지....^^ 특히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 문화의 특색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이 신불교라고 하더라구요. 일본에 잡신이 많은 것은 환경의 영향 때문이겠지요. 교양과목으로 머리에 쥐 나도록 외웠던 일본문화 읔~~!! (죽는 시늉) ^^ 발음이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레벌떡 사시지 마세요..^^ 좀 쉬엄쉬엄 사시라는.. 이시하라 간지가 한국인이었다면 만주가 어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국력이 중요하겠지만 인물도 중요하니까요.. 고구려 얘기만 나오면 저는 피가 솟구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30년전 이 인물을 처음 접했을때 만주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고 저는 충격이었다는.. 니치렌에 대해서는 논문을 쓰셔도 될듯..
오늘은 12시에 수업이 있어 천천히 헐레벌떡 거리다 지금 나갑니다. 나갈라카니 잊은 게 있어서....근데 인물을 비교해보니 이시하라 간지보다 투덜고수 님이 더 잘생긴 것 같아요. 이스트노 님은 청년 때 인기가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 또 헐레벌떡 나갑니다. 학교 갔다 올 때 까지 울지말고 기달리고 계셔요. ^^
그린님 내참 죽것다는.. 이 대목에서 우째야 하는건지 대사를 죄다 까먹었다는..^^
그린님 그 궁금증은 지가 해결해 드리리다..[젊은날의 초상화]라는 게시판에 글쓴이 eastno 요래 찍으모...이스트노님의 아가적 사진부텀 고딩 대딩,군시절 때 사진까정 싹 다 나오신다는....그거 보고 간지보다 간지남이었나...판단하
이시하라 간지가 고수님과 같은 인간적인 매력을갖춘 로맨티스트건 풍운아건...역사는 흐름니다 근데 넘 길어요머리 뽀개지는줄 알았네
이거이 길다는걸 보니 앞전의 마켓가든은 귀경도 안하신듯.. 그건 요거의 한 5배 사이즈는 되는디 그래도 보시는 분덜은 다 본다는.. 등산할때 복장만 보다가 어제 드레시한 옷을 입구 와서 잘 몰라 보겠던디요, (웬 쉑시한 아짐이 왔나 했다는)..으음
저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내용 보기전에 집 이사하라고 하는지 말든지로 이해(?) 했당께용 ㅎㅎ
문득 만주벌을 누비던 독립군들을 생각해봅니다.^^"그 당시 만주는 당대의 모든 이념과 사상의 총집결처, 거대한 실험장이었지요. 이시히라 간지의 세계최종론및 동아연맹론에 의거한 만주에의 꿈은 결국은 몰락을 향한 신생新生에의 열정이라는 아이러니를 처음부터 배태하고 있었던 게지요. 만주국 건설에 대한 이시하라의 장탄식... 불구하고 인간적 매력을 가진 이시하라 간지입니다.
으음, 그래봐야 일본 군바리이고 침략군이지만.. 만주에 대한 시각만큼은 엉덩이 퍼런 몽골리안이 맞다는..한족의 엉덩이는 퍼렇지가 않다죠 전에 "언제나"님이 올리신 사진을 보니 인디언 전통 기구들이 우리와 많이 흡사한걸 보더라도 몽골리안이 실하다는 생각..환경이 성격을 만드는건지, 일인들이 과거 우리에게 했던 행태를 보면 패죽이고 싶지만, 족보상 사촌간인게 맞긴 하다는.. 우쨋건 들님 반가워유..^^
나는 왜 이 글을 읽는데 힘이 들지 여전히 국수주의자라서 ㅎㅎ 님을 보헤미안같이 보았는데 또 다른 느낌입니다
힘이 드는 원인이야, 글 내용중 인정하기 싫은 대목이 있어서겠지요.. 그런 내용에 대해 지적해주심을 저는 원한답니다... 생각이란 다르기 마련이고, 토론 하는것도 재미있잖아요.. 보헤미안은 제가 꿈꾸는 이상향인데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