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17)-붓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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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가 공양한 유미죽을 먹고 기운을 차린 싯다르타는 새벽별을 보며 깨달음을 이루었다. 인도 델리박물관에 있는 조각.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는 붓다가 됐다. 인도에서는 우주의 본성을 깨달은 이를 ‘붓다’ 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가타(Tathagata)’라고도 한다. ‘진리로 간 분’ 또는 ‘진리에서 온 분’이란 뜻이다. 한자로 표현하면 ‘여래(如來)’다. ‘여(如)’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 즉 ‘진여(眞如)’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신 분’이라 말한다. 불교의 ‘타타가타’도 비슷하다. ‘진리가 (이땅에) 오신 분’을 일컫는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통한다.
나는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 한참동안 새벽 하늘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새벽이 되고, 어슴푸레한 새벽이 또 아침이 됐다. 새들도 잠을 깼다. 사원 곳곳의 나무와 탑들 사이에서 새들이 울어댔다. 2600년 전에도 그랬을 터이다.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그 아래 앉은 붓다에게도 또 하루가 밝았다. 그런데 붓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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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 대탑의 벽에 새겨져 있는 불상. 붓다의 가부좌는 고대 인도부터 내려오는 요가 수행의 자세이기도 하다. 백성호 기자
왜 그랬을까. 그는 자신이 뚫은 ‘이치’를 되짚고 있었다. 바둑으로 치면 일종의 ‘복기’다. 깨달음의 문을 열기까지 자신이 두었던 바둑둘. 그걸 거꾸로 하나씩 거두어보기도 하고, 다시 놓아보기도 했다. 깨달음의 이치는 막힘이 없어야 한다. 앞으로 가도 뚫려야 하고, 뒤로 가도 뚫려야 한다. 상하좌우가 다 뚫려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이치(眞理)다.
붓다도 그랬다. 팔리어 경전에 의하면 싯다르타가 놓은 첫 바둑돌은 “늙음과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이었다. 그 다음에 둔 두 번째 돌은 “태어남에서 온다”는 답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처음 둔 돌과 두 번째 둔 돌, 그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싯다르타의 장고(長考)다. 그게 명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參禪)이고, 이치에 대한 궁리(窮理)다. 그게 돌과 돌 사이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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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앞에서 티베트 순례객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는 세 번째 돌을 놓았다. “그럼 태어남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는 “존재에서 온다”는 네 번째 돌을 놓았다. 이런 식으로 싯다르타는 물음표로 가득한 인간의 삶과 세상의 급소를 콕콕 찔러가며 바둑돌을 하나씩 놓았다. 그가 수행의 바둑판에 내려놓는 돌들은 이치에 대한 깊은 궁리의 결과물이었다. 때로는 물음의 형식이었고, 때로는 답의 형식이었다.
포석과 행마는 계속 이어졌다. 팔리어 경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존재는 집착에서 오고, 집착은 갈애에서 오고, 갈애는 느낌에서 오고, 느낌은 접촉에서 오고, 접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서 온다. 여섯 감각기관은 이름과 모양에서 오고, 이름과 모양은 형성에서 오고, 형성은 어리석음에서 오고,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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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 사원의 작은 탑에 새겨진 붓다의 조각상. 순례객들은 그 앞에 놓고 놓으며 두 손을 모았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는 그렇게 바둑판을 뚫고서 붓다가 됐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둔 바둑돌을 하나씩 거꾸로 되짚으며 복기(復棋)를 했다. “어리석음에서 형성이 오고, 형성에서 이름과 모양이 오고…태어남에서 늙고 죽음이 생긴다.” 처음에는 ‘어리석음’이 종점이었는데, 복기할 때는 ‘어리석음’이 출발점이 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리수와 대탑 둘레를 돌았다. 보드가야 사원은 기운이 강하다. 에너지가 남다르다. 숱한 수행자들이 찾아와 명상을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주와 하나가 된 붓다의 에너지가 지금도 흐르기 때문일까. 천천히 발을 떼며 걷고 있는데 안에서 물음이 올라왔다. “붓다는 왜 어리석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했을까. 그가 말한 어리석음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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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 대탑 앞에서 명상에 잠긴 외국인 수행자. 대탑 주위에는 강한 에너지가 감돌았다. 백성호 기자
어리석음의 정체는 간단하다. 착각이다. 무엇에 대한 착각일까. 이치에 대한 착각이다. 가령 백조가 “나는 오리야”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건 착각이다. 물고기가 “나는 호랑이야”라고 여긴다면 어떨까. 그 또한 착각이다. A를 C로 보고, B를 D로 보는 게 착각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A를 A로 보는 것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것이다.
백조가 자신을 오리라고 착각하면 어떻게 될까. 하늘을 날 수가 없다. 두 날개를 활짝 펼 수가 없다. 그저 뒤뚱거리며 살 뿐이다. 그러니 온전히 백조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자신이 오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그게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나는 미운오리새끼야, 나는 중생이야”라는 착각. 그 근원적 원인이 바로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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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미운오리새끼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붓다는 "아니야, 너는 백조야. 본래 부처야"라고 말한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는 두 눈을 떴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더 이상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허덕이는 세상이 아니었다. 붓다가 본 것은 ‘깨달음의 세계’였다. 그렇다고 그게 이 세상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나 ‘꿈 속의 세계’는 아니었다. 겉만 보면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똑같은 세상이었다. 농부는 여전히 밭을 갈고, 아이들은 뛰어놀고, 사냥꾼은 짐승을 쫓고, 냇가의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자연도 그랬다.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렸다. 똑같은 세상이었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을까. 붓다가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가 말이다.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겉모습(色)만 본다. 붓다는 다르다. 겉(色)과 속(空)을 함께 본다. 둘을 동시에 뚫어서 본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다. 생로병사로 인한 삶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붓다는 여여하다. 왜 그럴까. 폭풍(色) 속에 깃든 공(空)을 함께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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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는 눈이 깊다. 세상 온갖 소리의 정체가 공함을 알기에 사자는 여여하다.
눈을 뜬 붓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자신이 오리라고, 중생이라고 생각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오리라고, 중생이라고 여긴다. 붓다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겉과 속을 함께 뚫어서 봤더니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속성과 붓다의 속성이 똑같다. 그래서 불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중생이 아니야. 너는 본래 부처야.” 그래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건 깨달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야”라며 오히려 붓다의 시선을 반격한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이 오리라고,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간곡하게 말한다. “너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야. 하느님께서 ‘신의 속성’을 네 안에 불어넣어 주셨지. 그러니 네 안에는 애초부터 ‘하느님 나라의 속성’이 흐르고 있어. 다만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으로 너에게 착각이 생긴 거야. 에고의 착각이지. 그 착각 때문에 네 안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거야. 그런 착각을 부수는 통로가 ‘자기 십자가’야. 그러니 그걸 짊어지고 나를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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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한 여성 순례객이 스카프를 둘러쓴 채 명상에 잠겨 있다.
이치의 바둑판에서 복기를 마친 붓다는 망설였다. 이걸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팔리어 경전에는 당시 붓다의 심정이 독백으로 기록돼 있다.
“내가 깨달은 이 가르침은 깊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평온하고, 숭고하고, 생각의 울타리를 초월하고, 미묘하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알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다. 내가 만일 이 진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 몸만 피로하고 괴로운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붓다의 외로움’이 읽힌다. 세상의 쓸쓸함과 다른 차원의 쓸쓸함이다. 모든 이의 눈앞에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땅. 해탈의 땅. 오로지 붓다만 그 땅을 보고 있었다. 그때 붓다에게 음성이 들렸다. 팔리어 경전에는 그게 ‘브라흐마(Brahma)의 목소리’라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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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머리가 네 개다. 카스트 제도의 네 계급을 상징하기도 한다.
힌두교에서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이다. 우주의 근본원리를 신격화한 셈이다. 비슈누(유지의 신), 시바(파괴의 신)와 함께 브라흐마(창조의 신)는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삼주신(三主神)으로 꼽힌다. 한역 경전에서는 ‘범천(梵天)’이라 부른다. 나는 그게 우주와 하나가 된 붓다의 내면에서 올라온 목소리라고 본다.
브라흐마는 간절하게 붓다를 설득했다. “부디 가르침을 설하십시오.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어서 브라흐마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마치 산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온 주변의 사람을 다 보듯이/우주적 눈을 가지신, 오! 지혜로운 이여…슬픔을 벗어난 분이시여…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브라흐마의 간청을 듣고서 붓다는 노래로 답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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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엘로라 석굴에 있는 붓다의 조각상. 붓다의 얼굴에 햇볕이 들어오자 생기가 돌았다. 백성호 기자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불사의 문’이라 불렀다. 왜 그럴까. 우리가 그 문을 통과할 때 삶과 죽음을 나누는 문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턱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주적 눈’이 드러난다. 붓다의 눈이다. 붓다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 눈을 떠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