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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31(부활주일) 요한복음 20:1~18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보려면?’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주일설교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의, 믿음의 기초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히려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 1886~1968)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으로 죽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종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활'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고사성어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고사성어의 뜻은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스스로 경험해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한 10대 황제인 선제(宣帝) 때 장군 조충국(趙充國)의 일화에서 유래했는데, 조선 초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때의 일화에는 이 뒤에 두 줄이 더 덧붙여지게 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견이 불여일각이며, 백각이 불여일행." 말 그대로, "백 번 듣는 것(百聞)이 한 번 보는 것(一見)보다 못하며(不), 백 번 보는 것(百見)이 한 번 생각하는 것(一覺)보다 못하고, 백 번 생각하는 것(百覺)이 한 번 행함(一行)만보다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라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당하던 것을 쫓아내주신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먼저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본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이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제일 먼저 보고 전파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보고 증거한 마리아처럼 우리들도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아야 될 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삶 속에서 직접 만나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부활의 실재를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1~10절).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운명하시고 장사된 바 되신 예수님은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눅24:6).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본 마리아가 그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립니다(1,2절). 그러나 빈 무덤을 목격한 마리아와 두 제자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요20:9)는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여 빈 무덤만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곁을 지킨 마리아도, 3년간 늘 함께 예수님과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두 제자도 빈 무덤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두 제자는 빈 무덤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2절). 유교에서는 공자의 무덤을, 이스람교는 무하마드의 무덤을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역설적으로 화려한 무덤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이 없는 텅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왜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빈무덤 뿐일까요? 주님의 제자들이 밤에 몰래 와서 주님의 시신을 훔쳐 어디다 감췄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주님을 장례한 아리마대 요셉이 매장하지 않고 화장을 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인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빈무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자랑이고 기쁨이고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대로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이란 본래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을 전제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으면 끝이야, 없어지고 마는 거야, 그러니 살아생전에 원 없이 해!”라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 생명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죽음이 없는 영원히 살게 되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부활이 그렇게도 중요하기에, 참된 믿음인가 거짓된 믿음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말씀대로 믿을 때 그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내가 부활을 말씀대로 믿을 때 부활의 실재(實在)가 믿어지고, 나의 믿음이 형식적인 데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허락하신 삶이 비록 십자가를 지는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부활의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적용)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개념으로 믿습니까? 말씀대로 실재(實在)로 믿습니까? 나는 십자가를 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부활의 삶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습니까?(9절)
2. 고난과 슬픔의 빈무덤에 함께 계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11~14절).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빈 무덤만 바라보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슬피 울고 있습니다(11절). 그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습니다(13절). 더군다나 그 때 마리아는 예수께서 그 빈 무덤에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14절). 우리가 삶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려면 우리의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예수님이 바로 우리 뒤에 서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메리 스티븐슨의 시(詩)인 “모래위의 발자국”의 시 내용입니다.
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 위로는 내 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각 장면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나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나와
주님에게서 사라지려는 순간
나는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내 인생의 행로에서 여러 번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내가 매우 슬프고 괴로웠을 때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너무나 괴로웠던 나는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너는 항상 나를 따를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니
오직 나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더군요.
어느 때보다도 주님이 필요했던 바로 그때
어찌하여 주님은 내 곁을 떠나셨는지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어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네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나는 한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느니라.
네가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볼 수 없었던 바로 그때는
내가 너를 안고 가던 때였느니라.“
[출처] 모래위의 발자국 -메리 스티븐슨 詩-|작성자 little Moses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는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의 많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려면, 내 삶의 고난과 실패의 빈 무덤 속에서 자기연민과 슬픔에 빠져 있지말고,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고난과 실패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빈 무덤만 바라보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실패와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지체들과 감사함으로 나누고 있습니까?(11,14절)
3. 말씀으로 찾아와 위로해주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15~18절).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자, 예수님이 먼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으냐”(15절)라고 하십니다. 마리아가 동산지기 인줄 알고 시신 옮긴 장소를 묻자, 그 때 예수님이 먼저 “마리아야”(16절)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예수님은 뽕나무(돌무화과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삭개오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알뿐만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잘 안다는 의미입니다. 부르시는 분은 친근하고, 사랑하고, 자상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삭개오를 아시고, 친근할 이유가 없는 세리를 친근하게 불러주십니다.
사무엘상 3장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이 소리를 듣고 제사장 엘리에게 갔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부르실 때 또 엘리에게 갔습니다. 세 번째 다시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엘리에게 갔습니다. 그 때 엘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알고 사무엘에게 만일 또 부르시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무엘상서 3:10에는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네 번째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응답할 때까지 부르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4에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별명을 ‘부르시는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부르시는 이’입니다.요한복음 10:3에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을 이름으로 아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이름으로 아는 관계입니다. 양의 모습이나, 색깔이나, 특징은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각각의 양을 이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그냥 적당히 숫자로 헤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14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을 알고 양이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아십니까? 자신의 목숨을 주시려고 아십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목숨을 버려 구원하고, 사랑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제서야 눈이 떠진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뒤 제자들에게 가서 전할 말을 알려주십니다(17절). 이에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18절)라고 예수님이 곧 승천하실 것을 전합니다. 이처럼 내가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할 때, 주님은 말씀으로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위로해주시며, 나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주십니다.
[큐티인간증] ‘예석아, 어찌하여 우느냐’ 곽예석
저는 외조부가 목사님이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두 장로,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일이 없다’고 하시며 실상 하나님보다 돈을 섬기며 사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한 번은 교회 부흥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고 교인들의 박수를 받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커서 아빠처럼 살아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는 점좀 돈의 노예가 되어 ‘다 필요없고 돈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결국 교회를 떠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쾌락과 유흥에 빠져 악하고 음란하게 살았습니다. 20대 중반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IMF 외환위기로 무너졌지만, “법정관리를 잘 받으면 회생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만 믿고 남은 재산을 탕진하며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하지만 법정관리 담당자들의 비리로 아버지의 회사는 사라졌고, 살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며 저희 가족은 남은 것 하나 없이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회사와 집을 모두 잃는 빈 무덤 같은 사건이 와서야 저희 가정은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셨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모르시기에 회사가 재건되기만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술로 푸시다가 간경화와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남은 저희 가족은 말씀을 묵상하는 공동체로 인도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물질과 봉사로 헌신하신 아버지를 데려가진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라진 아버지와 재산을 찾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다가와 “네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제 마음에도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회사부도와 아버지의 소천 사건이 우리 가정을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는 마리아처럼 저도 저와 같은 고난을 겪은 지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겠습니다(18절).
적용하기) 1. 사업장의 매출을 제일 먼저 십일조 하는데 쓰겠습니다. 적용2) 동생에게 <큐티인>을 선물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겠습니다.
적용) 매일 주시는 말씀으로 내 곁에서 내 이름을 부르시고 증인의 사명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까?(16~17절)
결 론
기독교는 주님의 빈 무덤 위에 세워졌고, 주님의 부활에서 출발하여 부활을 믿고, 부활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 신앙과 부활에 대한 확신, 그리고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은 헛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다시 우리를 새로운 소망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의 플로렌스 테일러(Florence Taylor)가 부활의 권능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부활, 이 대속의 사건은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을 통해 말씀하신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부활의 능력에 관한 성경구절 8가지를 소개합니다.
1. 고린도전서 15장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2.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4.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5.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 베드로전서 1장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7.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8. 요한복음 11장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1306#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