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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스크랩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실린 이승만의 거주지에 대한 기록-23
한베러브 추천 0 조회 49 14.11.28 2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이화장에

 

 

   이 대통령의 하야가 공식 발표된 뒤 경무대는 초상집 같은 슬픔과 허탈에 휩싸였다. 마담의 명령으로 경무대 비서와 본관 근무 경관들은 모두 이사 준비에 동원됐다.

 

   허탈해진 이박사가 본관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모시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외로운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부터 나는 할아버지 곁에 붙어있기로 했다.

 

   27일에도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 화장실엘 가려고 했다.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나 3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4·19의 충격 때문에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나 해서 조바심을 치다가 비서들을 불러들이는 소동까지 벌었다.

 

   이날 오후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경무대 뒷산과 정원을 산책했다. 손때가 묻은 사랑하던 나무 바위 정자 약수터와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는 듯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이박사는 '무슨 짐을 싸느라고 저토록 야단들이야. 그저 우리 두 사람 쓸 일용품만 가져가라고 해. 나머지는 박물관에 보내는 게 좋을 거야'라고 일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국가 예산으로 산 관물(官物) 외에는 모두 이삿짐에 꾸린 모양이었다. 가져간 게 전부 사물(私物)이긴 했으나 경무대에 원래 관물(官物)이 적었기 때문에 짐을 내간 뒤의 경무대는 보기에 극히 허술했다고 한다.

 

   이박사는 대통령을 사임한 뒤 하루라도 빨리 이화장으로 옮기려 했다. 이 결심은 만송 일가의 자살로 더욱 촉진됐다. 만송 일가 4명은 28일 새벽 경무대 구내 본관 서편에 있는 별채에서 자살했다.

 

   만송이 경무대에서 죽었다는 소리엔 나도 깜짝 놀랐다. 이틀 전에 곽주영 경무관이 남태우 경찰서장에게 '내게 바께쓰와 청소도구를 들려서 경관 몇 명만 보내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으나 그것이 만송 일가가 있을 방을 치우기 위한 것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만송 일가가 자살한 집은 영문 속기사인 이무기씨 부처(夫妻)가 살던 집의 비워두었던 큰 방이다. 강석이가 평소에 갖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을 결심한 아버지 만송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강욱을 쏜 뒤 자신에게 두 발을 쏘아 자결했다고 한다.

 

   만송 일가의 자살 소식을 들은 이박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미우나 고우나 가깝던 사람이고 강석은 양자가 아닌가.

 

   이박사는 이사를 서둘렀다. 곧 경무대를 떠나자고 했다. 이 대통령이 하야 직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 과도정부 수반이 된 우양과 매카나기 미 대사가 들어와 이사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을 갖지 않은 사람이 국가 건물에 살 수는 없어. 내 집이 있으니 그리고 가야해."

 

   이화장으로 떠날 결심을 굳힌 이박사는 '나는 하야했으니 관1호차를 타선 안돼. 그러니 이화장까지 걸어가겠다'고 우겼다.

 

   운석(장면), 동산(윤치영) 등 여러 사람과 경무대로 몰려와 차를 타고 가시라고 말렸다. 이박사는 '인파에 밀려 걸어서는 갈 수도 없으니 타고가야 한다'는 강권에 고집을 꺾고 관1호차의 번호판을 가리고서야 이날 오후 차에 올랐다.

 

   연도에는 이박사의 하야를 지켜보거나 배웅하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효자동에서 중앙청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으나 거기서부터는 차도까지 사람으로 막혀 차가 달릴 수 없었다. 천천히 이화장으로 향하던 차는 몇 차례 정차를 해야만 했다.

 

   연도에 모인 시민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돈화문 앞에서는 '이박사 만세'를 부르는 군중도 있었다.

 

 

1960.4.28 이화장으로 가는 골목길에 들어선 이승만 대통령 하야 차량과 몰려든 인파

 

   침통한 얼굴에 입을 꽉 다문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죽죽 흘렀다. 그러면서도 연신 손을 흔들어 시민들의 인사에 답례했다. 할아버지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화장 부근엔 인파가 넘치고 있었다. 대문 옆 담에는 '평안하시라 여생'·'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있었다. 비통한 하야였지만 국민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정(情)에 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차에서 내린 이박사는 바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곧 담 위에 올라와 시민들에게 손짓을 하며 '놀러들 오시오'라고 인사했다.

 

1960.4.28 이화장으로 돌아와 경비실 옆 담장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승만(John Dominis 촬영)

 

1960.4.28 이화장으로 돌아와 경비실 옆 담장에서 몰려든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승만

 

1960.4.28 이화장으로 돌아와 경비실 옆 담장에서 몰려든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승만(John Dominis 촬영)

 

▲ 1960.4.28 이화장 경비실 옆 담장에 바짝 붙어서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승만(John Dominis 촬영)

 

   이화장에 올 때는 박찬일 비서와 곽영주 경무관 그리고 경무대 본관 경비책임자였던 장 총경과 김종완 경감 등 경관 몇 명이 같이 왔다.

 

   이화장의 본채는 그동안 손을 보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루에는 먼지가 쌓여 실내화를 신지 않고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력은 약하고 스팀도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수세식 변소마저 쓸 수 없어 불편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벤치와 곰팡이 핀 등의자 외에는 의자조차 쓸만한 것이 없어 실내에서는 의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손을 보지 않아 정원의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할아버지는 하야하는 날부터 전지(剪枝)와 정원 가꾸기로 소일했다.

 

   이날부터 나는 매일 이화장에 출입했다. 할아버지의 신변이 걱정될 뿐더러 이제부터라도 사회정세·정치정세를 수시로 알려드려 공연히 사회적 물의에 끼어드시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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