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5-24 03:00
양자 창과 양자 방패의 대결[정우성의 미래과학 엿보기]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요즘 휴대전화는 지문인식을 넘어, 얼굴을 알아보고 잠금 화면을 풀어준다. 이전에는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려면 0000에서 9999까지의 숫자를 모두 넣어보면 된다. 즉 비밀번호 숫자의 조합이 만 개에 불과하다. 집이나 사무실의 문에 많이 사용하는 자물쇠도 마찬가지다.
숫자로 구성된 암호는 시간만 있으면 결국 푼다. 금방 풀 수 있는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시도해도 답을 찾지 못할 만큼 숫자의 조합이 많은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암호를 뚫으려는 창과 달리, 침입자를 막으려는 방패는 암호를 풀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숫자에 더하여 문자까지 사용하면,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기 위해 시도해야 할 경우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암호는 잠겨 있는 휴대전화나 문을 여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는다. 비밀 통신에도 활용된다. 스파르타나 로마가 전쟁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암호를 사용하여 명령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로 이 시기에는 문자를 다른 문자로 바꾸는 식이었다. 가령 알파벳 ‘A’는 두 글자 뒤의 ‘C’로 바꾸고, ‘C’도 역시 두 글자 뒤의 ‘E’로 바꾸는 식이다.
전쟁의 역사를 가장 크게 바꾸어놓은 암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사용한 에니그마이다. 전달하고 싶은 문장을 입력하면,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문자를 바꾼다. 그런데 문자만 바꾸는 게 아니라, 문자 바꾸는 법칙까지 톱니바퀴가 매순간 바꿔버린다. 로마에서는 ‘A’가 무조건 ‘C’로 바뀌었지만, 에니그마는 매번 공식에 따라 다른 문자로 바꿨다. 전쟁 초기 에니그마를 해석하지 못한 연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톱니바퀴의 방정식을 푼 뒤에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훤하게 꿰뚫어봤다. 암호를 만들고 푸는 과정 모두에 복잡한 수식이 동원되었다. 현대의 암호는 더욱 복잡해져서 슈퍼컴퓨터를 동원해야 할 만큼 정교하다. 휴대전화의 비밀번호에는 0부터 9까지, 총 열 개의 숫자가 사용된다. 손가락이 열 개인 탓이다. 하지만 컴퓨터는 다른 방식으로 숫자를 이해한다. 회로에 전기가 흘러서 전구가 켜지면 1, 꺼지면 0의 손가락이다. 그래서 전기가 흐르는 도체와 그렇지 않은 부도체가 아니라,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 성질을 갖는 반도체를 사용하여 필요에 따라 전기를 흘렸다가 끊는다. 하나의 전구는 0 또는 1 중 하나만 표시한다. 그런데 아주 작은 미시의 물질세계로 들어가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양자(quantum)역학의 법칙이 적용된다. 여기에서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양자컴퓨터는 전구가 0과 1을 적당히 조합한 중첩의 상태로 정보를 처리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출력의 단계에 이르러 0 또는 1 중 하나의 상태로 결과를 보여준다. 즉 전구 하나가 표현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늘어난다. 여기에 더하여 양자컴퓨터의 전구는 얽혀 있다. 서로의 정보를 참조하여 전구를 켤지 끌지 결정한다. 그래서 양자컴퓨터는 보다 많은 정보를 더욱 빨리 계산한다.
이러한 양자 기술은 창과 방패 모두가 활용한다. 단지 톱니바퀴 몇 개가 들어있던 에니그마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톱니바퀴로 발전한다. 한편 무척 빠른 양자컴퓨터는 복잡하게 조합된 암호의 방정식도 재빨리 계산해낸다. 첨단 기술이 서로 맞부딪혀 끝장 전쟁을 하는 셈이다. 과연 뚫느냐, 막느냐의 싸움은 끝이 있는 것일까?
양자 기술은 국가 안보와도 맞물려 여러 국가와 글로벌 기업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얼마 전 구글은 슈퍼컴퓨터가 1만 년 걸릴 계산을 200초 만에 끝내는 양자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양자암호와 해독기가 당장 세상에 등장할 수준은 아니다. 구글이 발표한 기술은 특정한 문제에 제한적으로 양자컴퓨터를 적용한 것이다. 즉 다른 문제는 아직 200초 만에 풀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했던 에니그마에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기술은 연구개발에 굉장히 많은 재원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사용하는 데에도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모든 부대에 에니그마가 일시에 보급되어야만 일사불란한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 전쟁이 길어지며 에니그마의 톱니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때마다 다시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다. 양자 기술 역시 앞으로 상당한 투자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암호라는 건 완벽하지 않다. 이 세상에 뚫리지 않는 암호란 없다는데, 전혀 의외의 방식으로 암호를 해체할 수도 있다. 에니그마가 활약하던 대서양 반대쪽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인디언을 암호병으로 활용했다. 이들이 쓰는 말은 소수의 통역병을 제외한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외계어였다.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암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아파트 대문의 숫자 자물쇠에 고압의 전기를 흘려서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했고, 아예 대문을 떼어내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마스크가 일상화된 요즘, 얼굴을 인식해서 잠금 화면을 풀어주는 휴대전화가 마스크 쓴 얼굴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매가 닮은 자식이 마스크를 쓰고 부모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면, 잠금 화면은 맥없이 해제된다. 뚫느냐, 막느냐의 다툼은 언제 끝날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전쟁이다.
* 오늘의 묵상 (220930)
예수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에 자리한 성읍들로, 그분께서 공생활 시작부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과 수많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곳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주민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무심하게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라 버린 씨앗처럼 죄와 불신 속에 변화를 거부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받게 될 혹독한 징벌을 예고하십니다. 그 징벌이 사치와 교만과 우상 숭배로 타락하였던 이방 도시 티로와 시돈에 내려진 죽음과 멸망의 심판(이사 23장; 에제 26─28장 참조)보다 훨씬 무겁다고 하신 것은,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복음과 기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데 비하여 이 세 성읍의 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제 의지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무엇도, 지킬지 버릴지 판단할 대상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론적 응답입니다. 마치 까닭 없는 극한의 고난 속에 하느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주장하며 끈질기게 답변을 요구하던 욥이, 창조주이신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입을 가리고 침묵하며 승복함으로써 완성한 그 믿음처럼 말입니다(제1독서 참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야말로 당신과 그리고 성부와 영원한 일치에 동참하는 가장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복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제자로서 그 진리를 주위에 증언하는 삶으로, 모든 순간 하느님 앞에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대구가톨릭대신학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