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魏)왕조:後魏]
탁발씨(拓拔氏),219 - (386) - 535
대공·대왕가 219 - 377
1.탁발력미(拓拔力微) - 시조 신원제(始祖 神元帝) 219 - 277
2.탁발사막(拓拔沙漠) - 문제(文帝) 277 - 283
3.탁발실록(拓拔悉鹿) - 장왕(章王) 283 - 286
4.탁발작(拓拔綽) - 평왕(平王) 286 - 293
5.탁발불(拓拔弗) - 사왕(思王) 293 - 294
6.탁발녹관(拓拔祿官) - 소왕(昭王) 293 - 295
7.탁발의로(拓拔猗盧) - 목왕(穆王) 295 - 316
8.탁발보근(拓拔普根) - 전폐왕(前廢王) 316
9.탁발시생 - 후폐왕(後廢王)
<대(代)>왕조
1.탁발울률(拓拔鬱律) - 태조 평문제(太祖 平文帝) 316 - 321
2.탁발하록(拓拔賀傉) - 혜제(惠帝) 321 - 325
3.탁발흘나(拓拔紇那) - 양제(煬帝) 325 - 329 & 335 - 337
4.탁발예괴(拓拔翳槐) - 열제(烈帝) 329 - 335 & 337 - 338
5.탁발십익건(拓拔什翼健) - 고조 소성제(高祖 昭成帝) 338 - 377
북위 황제 386 - 535
북위 황조 설립자 탁발규
1.탁발규(拓拔珪) - 태조 도무제(太祖 道武帝) 386 - 409
도무제 탁발규(道武帝 拓跋珪, 371년 ~ 40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북위의 건국자, 초대 황제(재위 386년 ~ 409년).
묘호는 태조(太祖). 할아버지는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며, 아버지는 탁발식(拓跋寔)이다.
도무제는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쇠퇴한 시기를 틈타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이후 1년후 국호를 위나라로 정했다.
도무제는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을 토벌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고, 중국으로 진출을 개시해 하북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해 397년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안주했다
398년 수도를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강제이주시켰다.
도무제는 중국 전통의 국가체제을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409년 북위의 명원제가 계승하였다.
2.탁발사(拓拔嗣) - 태종 명원제(太宗 明元帝) 409 - 423
명원제 탁발사(明元帝 拓跋嗣, 391년 ~ 423년)는 북위의 제2대 황제(재위:409년 ~ 423년)이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391년, 탁발규(도무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유귀인(劉貴人)은 탁발사가 태자 되기 전, 북위의 관습에 따라 도무제에게 자살을 명령받았다. 이것을 안 탁발사는 한탄해 슬퍼해, 도무제에 반발한 적이 있었다.
409년, 아버지 도무제가 이복동생 탁발소(拓跋紹, 둘째 아들)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탁발소를 토벌해 즉위한다.
전란에 항상 치세를 보내, 423년, 송과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
3.탁발도(拓拔燾) - 세조 태무제(世祖 太武帝) 424 - 452
태무제 탁발도(太武帝 拓跋燾, 408년 ~ 452년)는 북위의 제3대 황제(재위 : 423년 ~ 452년)이다.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그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 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인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최호는 한인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강제적인 한족화는 선비족의 반감을 사서 450년에 주살되었다.
그후 북위에서 태무제가 암살당해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문명황후(文明皇后)였다. 문명황후는 4대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獻文帝)의 적모(嫡母)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4.탁발준(拓拔濬) - 고종 문성제(高宗 文成帝) 452 - 465
문성제 탁발준(文成帝 拓跋濬, 440년 ~ 46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4대 황제(재위:452년 ~ 465년).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452년, 종애(宗愛)가 문성제의 조부 태무제를 시해해, 다음에 황후 영으로, 황족인 동평림왕 탁발한(東平林王 拓跋翰, 탁발황의 이복동생)을 살해했다. 종애는, 문성제의 계부(막내 숙부)의 남안왕 탁발여(南安王 拓跋余)를 옹립 했다. 하지만, 8개월 후에는 탁발여도 종애에 배신하고, 친정(親政)할 수 있도록, 종애의 주살을 상의하였다. 그것이 민감하게 해, 선수를 친 종애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에 대해서, 서경의 육려 동림낭중(근위 단장) 유니(劉尼) 전중상서 원하(源賀)가 일어서, 종애를 살해해, 황태자 탁발황의 장남 탁발준을 옹립 했다.
즉위 후는 백성의 경제력 휴양을 옳다고 해, 개간 식산을 장려했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해, 사문의 담요에 명해 운강석굴의 축조를 시작했다. 담요5굴이라고 말해지는 거대한 불상중, 최대의 제20굴의 불상은 도무제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여겨져 이하, 명원제·태무제·경목제·문성제의 모습을 본떴다고 여겨진다.(「황제즉여래」의 사상의 시작) 또, 담요의 상주에 의해 승려기호나 불도호를 마련했다.
5.탁발홍(拓拔弘) - 현조 헌문제(顯祖 獻文帝) 465 - 471
헌문제 탁발홍(献文帝 拓跋弘, 454년 ~ 476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5대 황제(재위:465년 - 471년). 묘호는 현조(顯祖). 문성제의 장남이다.
456년에 태자 되어 465년에 즉위 했다. 치세 초기는 어렸기 때문에, 승상 을혼(乙渾)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지만, 계모 풍태후(馮太后, 문명황후(文明皇后))가 을혼을 살해하여 칭제를 실시했다.
469년에 장남 탁발굉(효문제)을 태자로 정해, 친정을 개시한다. 삼등 구품의 제를 규정 국내의 통치를 정비해, 다음의 효문제의 전성기의 주춧돌을 쌓아 올렸다.
471년에는 양위 하여, 태상황제를 자칭 했다.
효문제 원굉
6.원굉(元宏) - 고조 효문제(高祖 孝文帝) 471 - 499
효문제 원굉(孝文帝 元宏, 467년 ~ 499년, 재위:471년 ~ 499년)은, 북위의 제6대 황제. 성은 탁발(拓跋), 후에 성을 고쳐서 원(元)씨로 바꾼다. 묘호는 고조(高祖)이다.
그의 시기 풍태후(馮太后)의 섭정때 유교적인 예법을 채용하고, 균전제을 시행하면서 삼장제를 확립했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었다.
493년 효문제는 수도를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 후 대대적인 한족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황실의 성씨을 원씨(元氏)로 고치고,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을 만들었다. 선비족과 한족명족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한족 문화와 동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면 지금까지 내려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효문제의 사후 반발이 더 거세져 어린 효명제(孝明帝)을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혀,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은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 주둔지였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7.
원각(元恪) - 세종 선무제(世宗 宣武帝) 499 - 515
선무제 원각(宣武帝 元恪, 483년 ~ 515년, 재위:499년 ~ 51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7대 황제. 묘호 세종(世宗)이며. 제7대 황제 효문제의 차남이다.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 황태자의 자리를 폐위당하고, 아버지 효문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혹은 자살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원각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에 효문제의 죽음으로 따라 17세에 즉위 했다. 초기에는 종실에서 숙부의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헌문제의 둘째 아들로 효문제의 둘째동생), 서경령의 왕숙등의 보좌를 받았다고 한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다.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다.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고 한다. 508년에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같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해졌다
8.원후(元詡) - 숙종 효명제(肅宗 孝明帝) 515 - 528
효명제 원후(孝明帝 元詡, 510년 ~ 528년, 재위:515년 - 528년)은, 북위의 제8대 황제이다. 제7대 황제 선무제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호충화이다. 묘호는 숙종(肅宗).
어린 효명제(孝明帝)을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혀,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 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은 523년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이곳엔 왕실 계통의 유력자들이 머물면서 국경을 지켰기에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 정책과 수도의 이전으로 인해 대우가 소홀해 지면서 그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우지만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 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河陰의 變)
9.원자유(元子攸) - 경종 효장제(敬宗 孝莊帝) 528 - 530
효장제 원자유(孝莊帝 元子攸, 507년 ~ 530년, 재위: 528년 ~ 530년)는, 북위의 제9대 황제. 제6대 황제 효문제의 조카. 아버지는 팽성왕(효문제의 이복 막내 아우)으로, 팽성왕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이부인(李夫人)이다. 묘호는 경종(敬宗)이며, 그리고 효압제(孝庄帝)라고 한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웠다. 그러나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河陰의 變)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10.원엽(元曄) -효경제(孝敬帝,장광왕) 530 - 531
字는 華興. 北魏 十代 동해왕東海王. 在位 530~531. 처음에 起居郞이 되고 通直散騎常侍로 진급. 孝莊帝 때 長廣王에 봉해짐. 太原太守로 나아가 行幷州事가 되었다. 永安 三年(530), 天柱大將軍 爾朱榮이 효장제에게 살해되자 領軍將軍 爾朱世隆ㆍ汾州刺史 爾朱兆 등이 幷州로 도망가 元曄를 帝로 擁立했다. 翌年에 폐위되었다. 節閔帝가 즉위하자 東海王에 改封되었다. 孝武帝 때 살해되었다.
11.원공(元恭) -절민제(節閔帝) 531 - 532
절민제 원공(節閔帝 元恭, 498년? ~ 532년, 재위:531년 ~ 532년)은, 북위의 제11대 황제이다.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12.원수(元脩) -효무제(孝武帝,출제) 532 - 535
효무제 원수(孝武帝 元脩, 510년 ~ 534년, 재위:532년 ~ 534년)은, 북위의 제13대(최후)의 황제. 자는 효칙(孝則). 제7대 황제 선무제의 조카.「북사」에서는 시호는 효무제(孝武帝)이지만, 「위서」에서는 출제(出帝)로 하고 있다.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晉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고환은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 낙양을 탈출해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우문태(宇文泰)에게 의지하자, 고환은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 같은 해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동위 황제 535 - 550)
1.원선견(元善見) - 효정제(孝靜帝) 534 - 550
효정제(孝靜帝, 524년 ~ 551년)은 동위의 황제(재위:534년 ~ 550년). 성은 원(元), 이름는 선견(善見). 북위 효문제의 증손으로, 조부는 원역(元懌, 효문제 넷째아들). 원단(元亶)의 적자로서 태어난다.
효무제가 달아나자 고환은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업(鄴)으로 옮겼다. 이로써 동위가 건국하게 되었다.
같은 해 우문태와 효무제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 서위라 부른다.
동위는 고환의 전횡이 계속되면서 효정제는 고씨일족의 꼭두깍시에 불과했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재상이 되어 550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북제(北齊)을 건국했다.
(서위 황제 535 - 556)
서위(西魏 535년 ~ 556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가 분열하여 건국한 나라이다. 관중지방(關中;현재 섬서성(陝西省))을 중심으로 영토를 가지고 있다. 국호는 위나라지만 같은 북위로부터 분열된 동위와 구별하기 위해 서위라고 부른다.
534년 대승상 고환(高歡)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북위의 효무제(孝武帝)는 낙양에서 도망쳐 관중으로 가서 우문태(宇文泰)에게 보호를 받았다. 황제가 없어진 고환은 곧이어 업(鄴)에서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동위가 건국하게 되었다. 한편 효무제를 보호하던 우문태는 효무제와 서로 사이가 나빠져,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니 이것이 바로 서위가 되었다.
서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장악하여 황제는 우문태의 꼭두각시였다. 국력은 동위에 비해 떨어졌지만 군사적으로 여러차례 동위를 압도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남조 양(梁)나라가 후경(後景)의 난에 의해 혼란해진 사이를 틈타 사천지방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공제(恭帝)때 강릉(江陵)을 함락하여 양나라의 원제(元帝)을 자살하게 했다. 양나라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찬(蕭餐)을 보호하여 강릉으로 복귀시켜 자살한 원제를 대신해 양나라의 주인으로 삼으니 이것이 후량(後梁)이었다. 우문태의 사후 뒤를 계승한 우문각(宇文覺)은 556년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서위는 멸망하였다.
1.
원보고(元寶炬) - 문제(文帝) 535 - 551
아명이 ‘검은 수달’이던 우문태는 한인들이 전통적으로 오랑캐 취급을 하던 북방의 선비족 출신이다. 위촉오 삼국 시대, 그리고 사마중달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을 거쳐 저족, 강족, 선비족 등 북방의 오랑캐들이 패권을 다투는 혼란기에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은 풍운아이기도 하다.
변방에서 군권을 장악한 그는 쿠데타로 북위의 효무제를 살해한다. 그리고 허수아비 황제인 ‘원보거’를 들러리로 내세워 서위를 건국했다. 이후 17년간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다 북주를 창업하고 황제에 오른다
2.
원흠(元欽) - 폐제(廢帝) 551 - 554
西魏 二代 廢帝(Feidi). 在位 551~554. 文帝(元寶炬) 長男. 大統 元年(535), 皇太子에 책봉. 十七年(551), 즉위. 폐제 三年(554), 宇文泰를 죽이고자 했다가 일이 누설되어 폐위되고 얼마 뒤 毒殺됨
3.
원곽(元廓) - 공제(恭帝) 554 – 556
西魏 三代 恭帝(Gongdi). 在位 554~556. 文帝(元寶炬) 四男. 大統 十四年(548), 齊王에 봉해짐. 廢帝 三年(554), 宇文泰에게 擁立되어 帝位에 올라 姓을 拓跋로 회복. 恭帝 三年(556), 宇文泰K 没하자 宇文覺에서 선양하라는 압박을 받고 선양. 이에 의해 서위는 멸망. 宋公에 봉해졌다가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