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방지일 (8) 신앙잡지 '게자씨' 발간 평양 집 팔아 비용 충당
2008. 11. 3. 17:59
룸메이트와 함께 시작한 방기도회는 날이 갈수록 은혜가 충만했다. 둘이서만 나누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모임을 확대하기로 했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의미로 이름을 '종적회'로 정했는데, 처음에는 3명이 모였다.
우리는 그저 받은 은사를 함께 나누자는 소박한 바람에 각자 한 달에 20전씩 회비를 납부해서 '게자씨(정식명칭은 겨자씨)'를 발간하게 됐다. 60전으로 종이와 미농지를 구입한 뒤 강판에 내용을 긁어 학교에 있는 등사기로 등사를 했다. 이렇게 밀면 200장 정도가 나오는데 호치키스로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을 6년 동안 이어갔다.
당시 기독교 잡지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발간됐던 '신앙생활'과 성결교의 '활천', 그리고 이용도 목사가 조선총독부에 등록한 '예수선도원'이 고작이었다. 학생들의 힘으로 발간된 건 게자씨가 유일했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고등계의 경찰이 방을 수색하고 잡지를 모두 압수해갔다. 그리고 우리가 펴낸 등사물이 허가를 받지 않고 출판한 것이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경찰은 위세가 대단했지만, 나는 또박또박 따졌다. "내가 돈을 받고 판 것도 아니요, 신앙간증을 편지로 써서 친구들끼리 나눠보는 것 뿐인데 출판법 위반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며칠 뒤 경찰은 "잘 알지 못해서 그랬다"며 사과했다. 그런데 계속하려면 조선총독부에 원고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회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공부하고 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원고 검열과 허가까지 받는 일이 쉽지 않다"며 포기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내가 계속 맡겠다고 했다. 시간문제일 뿐이니 조금만 부지런하면 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원고를 수집해 총독부에 보냈다. 며칠 뒤에는 원고 페이지마다 '검열'이란 붉은 도장이 찍혀왔다. 고생은 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주문 부수도 늘었다. 우리는 더 많은 부수를 뽑을 수 있도록 등사 대신 인쇄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빚이 쌓여갔다. 할 수 없이 평양에 있던 집을 300원에 팔아 몽땅 게자씨 발간하는 일에 쏟아 부었다.
얼마 후에 중국 선교사로 가 계시던 아버지가 평양에 오셔서 집을 판 사실을 아시고 추궁하셨다. 아버지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더 이상 꾸중은 없으셨다. 한번은 총독부의 허락을 받고 주기철 목사의 간증을 담은 '죽으면 죽으리라' 원고를 2000부 인쇄했다. 하지만 평양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평남고등계에서 허락할 수 없다고 해 고스란히 압수당한 일도 있었다.
몇 해쯤 지나 함께 만들었던 친구들이 유학길에 떠나게 되고 나는 선교사의 길로 떠나게 됐다. 누군가 게자씨 발간을 맡아야 했다. 동창에 이어 당시 평양의 교역자 회장인 한 목사에게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물자부족을 이유로 모든 잡지를 정간시키면서 게자씨도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됐다. 성경구락부가 나에게 가르치는 사역에 도움을 줬다면, 게자씨 발간은 문서선교활동에 큰 힘이 됐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기사원문 : https://v.daum.net/v/2008110317591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