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7
밤을 새고 나면 몸은 파김치처럼 쳐지고 지쳐서 더 이상 걷기 조차 힘든 상태가 되지만 아침이 되면 어디에선가 에너지가 만들어져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뛰어간다. 자연과 동조하는 우리 몸의 신비다. 거기다가 CP4 Bourg St. Maurice까지 15km 구간은 주욱 내리막이다. 임도 구간도 많다. 서비스 구간인 셈이다. 그냥 달리면 된다.
나름 속도를 내보지만 많은 주자들이 내리막에 약한 나를 추월해 간다. 오랜 기간 마라톤과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평지와 오르막은 비교적 수월하게 가는데 유독 내리막에서는 자신이 없다. 특히 작년 제주대회에서 무릎 부상을 당한 이후로는 더욱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자칭 엔지니어랍시고 무릎에 가해지는 힘과 충격량이 최소화되는 자세와 주법 등을 연구하고 훈련을 하면서 임상실험도 해보지만 나이가 들면서 탄력을 잃어가는 무릎을 어찌하겠는가? 젊고 빠른 친구들이 중력 관성을 죽이지 않고 탄력을 이용해 리드미컬하게 내려가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더군다나 2주전 UTMB Korea팀과 영알5피(영남알프스 5봉 종주) 최종 훈련 후 작년에 부상 당했던 왼무릎이 다시 아파오면서 여기 오기 전 운동을 중단하고 치료에만 전념했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할 수 밖에 없다. 후반에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CP4를 통과하고 나니 햇살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긴발토시와 긴팔상의를 벗어버리고 머리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을 모자 안에 눌러 써 보지만, 가끔씩 만나는 계곡물에 머리를 박고 더위를 식혀 보지만, 그리고 계곡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셔 보지만, 한국의 산과 달리 그늘 한 점 없는 몽블랑 자락의 이 곳 주로에서 더위와 갈증은 나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만큼 발걸음도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가끔씩 뜨끔뜨끔 했다. 고산증인가? 아니면 심장에 좀 무리가 갔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여기서 이 세상과 하직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기에 지금은 무리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내게 지속가능한 페이스는 얼마일까? TV에서 본 나무늘보가 생각났다. 마치 나무 늘보처럼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움직이자. 그리고 레이스 전략도 급변경했다. 지금부터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예상 페이스 챠트도 잊어버리자. 완주만이 지상 목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랫배에 심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동안 설사가 멎지 않아 CP마다 화장실에 들렀어도 통증은 없었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정도로 배가 아팠다. 혹시 맹장이... 아니면 결석.... 마음 속으로는 여기까지이겠구나, 헬기에 실려나가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할 수 없이 주로를 벗어나 쉬어보기로 했다. 통증이 지속된다면 별 수 없이 레이스를 포기해야 겠지만 웬만하면 참고 가보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괜찮냐고 물어본다. 다행히 통증은 5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 가다보면 다시 통증이 생기고 쉬면 괜찮아져 다시 가기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산 위에 설치한 간이 CP, Fort de la Platte에 도착했다. 5유로에 판매하는 콜라도 마시고 무료로 공급되는 시원한 물을 실컷 마셨다.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또 아래에서 긴급 신호가 왔다. CP 스탭에게 휴지가 없냐고 물어보았지만 다들 없단다. 이전 CP에서 일보고 나서 휴지를 챙겼어야 하는데 깜빡한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인도 주재원 시절 보아왔던 이동식 비데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산 위로 올라가 완벽하게 은폐된 장소에서 일을 본 후 왼 손으로 처리하고 오른 손에 쥔 물병을 이용해 씻어내고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양 쪽 모두 깨끗해진다. 물도 얼마 들지 않았다. 난생 처음 직접 시도해본 이동식 비데는 기대이상이었다. 간이 CP로 다시 돌아와 물을 보층하고 있는데 아까 휴지 부탁했던 스탭이 걱정이 되었는지 휴지 구했냐고 물어본다. "응 (조끼에 달린 물통을 가리키며) 이걸로 해결했지" 라고 대답하니 빙그레 웃는다.
CP5 Cormet de Roselend 까지 가는 주로는 깍아지른 암벽을 오르내리는 험한 지형이었다. 아마도 이 구간에서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많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지 않고 한발 한발 집중하며 걸었다. 조금 전 간이 CP에서 일을 보아서 그런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복통이 자연스레 멈추어 있었다. CP5에 들어가기 얼마 전부터는 몸 컨디션도 살아나 평지와 내리막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제 65km 지점까지 왔으니 좀 더 힘을 내 보자. CP에 들어서니 여성 서포터즈 한 분이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 머리에 뿌려 주었다. 결혼 전에는 돌아가신 엄마가, 결혼 후에는 아내가 수돗가에서 찬물로 등목을 해주던 생각이 떠올랐다.
CP6 La Gittaz까지는 구간거리가 7.5km 밖에 되지 않아 괜찮지만 CP7 Beaufort 까지는 구간거리가 18.8km로 길어 다소 걱정이 되었다. (상승고도 1000m, 하강고도 1900m) 이렇게 긴 여정을 떠날 때 누군가 같이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옆에 친구가 있어서 같이 이야기하면서 걸어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갑장 친구 영표와 클럽 후배 종두, 숙소 친구 체릉 - 다들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레이스 출발 전에는 초반에 넷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가다가 각자 페이스에 맞게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모이고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종두는 출발과 동시에 잃어 버리고 영표는 첫 CP 가는 도중 만나 잠깐 이야기 했을 뿐, 체릉은 레이스 내내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비록 몸은 각자 떨어져 있어도 주로 어딘가에 있을 것라고 하는 생각만으로 내게 위안이 되었다. 내가 힘든 만큼 그들도 힘들겠지,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겠지... 꼭 완주할거야...
한 낮의 더위가 물러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75km 지점에 있는 산 속 간이 CP, Entre deux Nants에 도착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배탈약이 CP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간이 CP여서 반신반의하면서 물어보았는데 설사약이 있다고 한다. 빨리 작용하는 약은 아니지만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알약과 가루약을 주었다. 아~, 지금까지 여러 CP를 지나면서 왜 약을 받아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머리를 쥐어뜯고 또 뜯었다, 바보, 멍청이, 등신..... 약을 먹고 두세시간 지나고 나니 속이 한결 편해졌다.
첫댓글 이제라도 약을 받아 드셔서 다행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