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이 광복절 공휴일이기에 시골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직장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골로 향했다.
2003년 8월 14일(목요일).
밤.
어둠이 깔린 정적.
잠 자기가 아까워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대문 빗장을 열고 바깥마당으로 나갔다.
바람이 서늘하고, 둥근 달은 밤하늘에 떠 있었다.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 알맞은 크기로 자란 금잔디 위에서 서성이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시간은 멈추었다. 두 팔을 활짝 펴니 그림자도 나를 따랐다. 굳어진 몸을 펴려고 무릎도 굽히고 허리도 좌우로 뒤틀며 흔들었다. 또 혼자서 의미도 없는 말을 쉴 사이 없이 중얼거렸다. 스쳐가는 바람이 듣겠지. 정령(精靈)이 들었겠지. 바람은 은행나무 잎사귀에서 매달려서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냈다. 새벽 4시까지 바깥마당에서 서성거렸다.
잠에서 깨어난 어머니가 쉰여섯 살 아들을 찾으러 밖에 나와서 ‘어서 자야지’ 말씀하실 때까지 바깥에 머물렀다.
곤하게 늦잠 자는데 시끄러운 소리.
'조개 잡으려 왔어, 인자도 내려오고 있어!'
대전 누나가 생질녀 내외와 외손녀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조개 잡으려고 누나는 대전에서 서해안까지 올라오고, 여동생은 서울에서 내려와? 의문이 들었다.
조간(潮間)이 표시된 충남 보령시 웅천농협 달력을 보니 물때가 칠팔물이었다. 이미 물때가 살짝 지났다. 그러나 아직은 바닷물이 많이 쓰므로 충분히 갯것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리는 음력 2 ~ 4일과 17 ~ 19일 사이에 크게 생긴다. 여름철에는 갯물이 거의 쓰지 않으나 추운 겨울철에는 물이 많이 쓴다. 조차(潮差), 즉 밀물과 설물 때의 간만 차이는 무창포에서는 6.1m 쯤 될 것으로 짐작했다.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여동생은 서해안고속도로가 꽉 막혀서 무창포나들목까지 내려오려면 두 시간이 더 걸린다는 전갈이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무챙이(무창포의 옛 이름)를 다녀올 시간이었기에 생질녀 내외와 함께 무창포해수욕장으로 나갔다.
갯것을 잡으려고 호미와 헌 그릇을 가지고 갔으나 정작 바닷가에는 밀물이 가득 차서 바다가 시원스럽게 열리지 않았다. 안목쟁이(너덜바위)까지만 겨우 물이 빠지고 그 뒷편에는 바닷물이 철렁거렸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표면이 들어난 너덜바위 곁에는 많은 관광객이 삼삼오오 뭉치고 흩어져서 부산하게 호미로 갯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갯것 채비만 요란하게 준비한 사람들이었다.
무창포해수욕장은 ‘바다가 열리는 곳’으로 알려져서 관광객이 년중 내내 찾아드는 곳이다. 이런 이유로 고동류, 바지락류 등 이패엽 조개가 아직도 무사하게 남아 있을 성싶지 않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거기에 무엇이 남아 있겠어? 어패류 씨알맹이도 다 긁어가 놓고선. 해변 관광책자에도 비극적으로 표현했어. 다 없어졌다고. 여름에는 바다가 열리지 않고 추운 겨울에야 더 많이 열려.'
외지에서 몰려온 관광객이 공연히 미웠다.
'차라리 독산으로 놀러 가자,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르켜 주지.'
독산리는 무창포해수욕장에서 남쪽으로 2km 쯤 내려가면 있다.
내륙 쪽으로 꼬불거리는 좁디좁은 마을안길이어서 훨씬 더 멀었다. 야트막한 야산과 손바닥만한 논에 푸르름이 가득 차서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자아냈다.
무창포에 비해 개발이 덜 된 독산해수욕장 모래장불에도 자가용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조개잡이 사람들이 박씨(바가지를 만드는 식물의 씨앗)처럼 모래장불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민조개가 참으로 많다는 증거였다.
오전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갯바닥을 긁어서 조개를 두 말쯤 팠다. 한 사람이 한 말씩 잡았다는 계산이다.
오후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여동생 내외, 대전 누나와 그 가족과 함께 내륙지방(성주산)의 계곡을 찾아갔다. 폐사지 성주사지(聖住寺址)에는 신라말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가 있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자고 차 멀미를 심하게 한 여든여섯 살 어머니한테 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춧돌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성주사지 앞 계곡에는 인파들이 몰려 있어서 우리 일행이 앉아서 발을 물속에 담가 놓을 만한 공간은 이미 없었다. 이끼 낀 바위와 자갈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차라리 부사간척지로 놀러 가자. 좁디좁은 계곡보다는 시야가 툭 터진 바다가 더 낫겠지.'
성주산에서 웅천(熊川)으로 되돌아 나왔다. 웅천읍 노천리 으등산을 지나서 보령군과 서천군으로 경계하는 바닷가로 향했다. 농경지를 만들기 위하여 갯벌을 막은 곳, 거대한 방파제가 시작되는 소황리 장안해수장으로 갔다.
해질 무렵, 노을을 기다렸으나 서편 하늘에만 낮게 깔린 구름 속에 해가 갇혀서 장엄한 노을은 없었다. 대신 방파제 위에서 넘실거리는 파도와 이따금 바닷물을 박차고 공중으로 나는 물고기들을 보았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이고 묘기이겠지.
제방뚝 아래 바람을 피해서, 부탄가스로 불을 피워서 중닭 세 마리를 끓여서 만든 백숙을 먹었다.
밤중에 바다를 쳐다보고 서늘한 갯바람을 맞는 것이 전신이 시원했고 또 마음도 넉넉해졌다. 객지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생각치도 않게 한데 어울려서 보낸 시간이 더 좋았다.
8. 16. 토요일 아침.
맛조개를 잡으려고 갯바다으로 나갔다.
독산해수욕장과 장안해수욕장이 서로 마주치는 중간 지점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삽으로 모래땅을 팠다.
썰물로 바닥이 들어난 모래톱에서 맛살을 잡으려면 삽으로 모래를 살짝 걷어 내야 한다. 삽으로 떠낸 모래 속에서 콩알 크기로 펑 뚫린 구멍이 보인다. 이 구멍에 준비해 둔 ‘가는 소금’을 부으면 맛소금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짜가운 소금기를 느낀 맛(맛조개)은 구멍 위로 갑자기 쏘옥 올라오면 두 손가락으로 잽싸게 잡아채서 꺼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잡는 양이 적었다. 얼마 뒤에는 바닷물이 들어올 터인데...
갯물이 바다 안으로 계속 빠지고 있었다. 민조개가 많이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갯벌을 완전히 덮을 것 같은 사람들이 조개잡이에 정신이 팔렸다. 갯물이 바다 뒤편으로 자꾸 물러나는데도 사람들은 한 자리에서 뜨지를 못했다. 욕심이었다.
나는 더 큰 조개를 잡으려고 뒤로 빠지는 갯물을 뒤따라서 바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뒤에는 갯물이 멈추었다가 빠르게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다. 시간이 아까웠다. 잔잔한 물 속에서 호미로 모래땅을 북북 팠다. 모래를 긁으면 갯물이 빠지면서 조개들이 한 군데로 몰렸다.
'팔십 평생 이렇게 많은 조개를 처음 본다'며 바로 이웃에 있는 용머리 갯마을 출신인 여든다섯 살 어머니는 조개잡이에 정말로 신이 났다. ‘호미로 긁적거려서 잡은 것보다도 모래 갯벌 속을 손가락으로 뒤짚어서 잡는 것이 더 많이 잡을 수 있다’ 고 덧붙였다.
껍질이 매끄럽고 납작한 넓적고동도 조금 잡았다.
승용차 트렁크에 가득 실은 민조개는 일곱 말쯤 되어 보였다.
작은 모새(모래의 사투리)를 먹고 찌꺼기는 게워내는 민조개는 뻘의 자양분을 빨아먹는 이패엽 조개다. 그래서 조개의 내장은 시꺼먼 했다. 뻘흙이 남아 있기에 식용과 상품가치가 적었다. 또 죽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처리해야 한다. 조개가 먹은 모래를 뱉어내도록 살아 있는 조개를 소금물에 오랫동안 가만히 담가 놓아야 한다. 서울과 대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므로 우리는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다. 시골집에 홀로 남는 어머니가 처단하기에는 그 양이 너무나 많았다.
해금질(모래를 뱉어내는 일)할 시간이 없어서 두 개의 큰 양은솥 안에 붓고는 연방 장작불 때며 삶았다. 삶은 물을 양푼에 그득하게 쏟아 담고는 나, 어머니, 생질녀와 함께 알맹이를 빼냈다. 누나는 샘터에서 알맹이를 씻어서 모래알을 빼냈다. 손으로 북북 문질러서 내장을 없앴으므로 조갯살이 크게 줄어들었다. 짓그러운 잔모래를 어석어석 씹는 것보다는 차라리 덜 먹는 게 낫다. 삶고, 알맹이를 빼내고, 모래알을 떼어내는 손공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세 시간이 넘었다.
나는 조개 삶은 물과 알맹이를 패트병에 담은 뒤에야 밤 늦게 서울로 향했다. 다음날인 8월 17일 새벽 두 시 반경에야 잠실 아파트에 도착했다.
직장 근무를 마치고 밤 늦게 고향에 내려갔고, 여든여섯 살 늙은 어머니와 함께 폐사지 성주사지에 들렀고, 갯바다에 나가서 민조개를 잡은 이야기가 또하나의 추억거리가 되었다. 오래 기억하고 싶다.
2003. 8. 18. 월요일.
원 제목은 '민조개를 잡고'이다.
어머니가 아흔일곱 살이 되던 정월 초순에 먼 길 떠났다.
그 어머니를 기억하고 싶어서 제목을 '민조개와 어머니'로 고쳤다.
오늘은 2017. 10. 23.
강남구, 서초동에 이르는 양재천을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첫댓글 형제자매 동기간들이 고향땅 바닷가에서
조개잡은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제 시에 관심 가져준 최 선생님 !
오늘 '등단시인방'에 한글로 쓴 시 한 편 올렸습니다.
박 선생님.
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사라진다는 말이 아픔이지만 때로는 아름다움이지요.
여러 번 시를 다듬었다는 님의 말이 그냥 좋아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저도 조개잡는 이야기를 더 다듬고 있지요.
예쁜 댓글 달아주신 박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래 전에 이야기네요.
저도 여행가면 호미를 들고 나섰지만 허당이었습니다.ㅎ
관광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니 조개가 남아 나겠어요.ㅎ
즐감해봅니다.좋은 하루 되세요!^^
예, 50대 초반에 쓴 일기이지요.
바다가 열리는 곳으로는 남해안 진도와 서해안 무창포가 알려졌지만 갯것이 제대로 남았겠어요?
씨알마저 다 긁어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갯것들이 종자를 남기겠어요?
지나친 관광은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짓이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대형 중장비로 바닷모래를 싸그리 훑어간 뒤로는...
강모래를 바닷가에 퍼 붓대요. 장난도 이런 멍청한 짓거리를...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