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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지리산 탐방기(2017. 7. 17.-18.)
지리산에 가기로 한 달 전에 날짜를 잡아놓았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상관없이 지리산을 가야만 했습니다. 장마전선이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여 마음 놓고 지리산 뱀사골로 향했습니다. 대구 설화 명곡역에 모여 오전 10시에 출발하였습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입니다. 3개 도 경남, 전북, 전남에 5개 군 함양, 산청, 하동, 남원, 구례가 접해 있습니다. 산 높이도 1915m가 되는 남한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큰 산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리산 이야길 뻬고는 할 수가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순창 회문산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그 길고 긴 산능선과 골짜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서리서리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산에 소나무 이야길 따라 걷기로 작정했습니다. 새로 닦아놓은 광주대구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2시간여에 남원군 주천면 고기리 대성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고 이곳에서 정령치에 올라갔습니다.
정령치는 남원쪽에서 지리산 뱀사골로 넘어가는 고갯길입니다. 이 고개는 진한의 왕이 마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도록 하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수에게 지키게 했다고 하여 정령치(鄭嶺峙)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발 1,172m로 지리산 자동차 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노고단, 세석평전, 천왕봉, 북서쪽으로 남원시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바래봉, 뱀사골을 조망할 수가 있습니다. 산림청에서는 백두대간의 맥을 연결하기 위해 고개 마루 위에는 흙을 이어 굴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화령이나 죽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회색빛 구름의 천왕봉을 휘감고 있어 웅장한 모습을 카메라로 잡아 볼 수 없었습니다마는 이 높은 산자락을 넘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대프리카의 더위를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산 능선에는 백두대간을 연결하는 내력과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자상한 설명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오늘의 목표로 정한 뱀사골 안쪽에 있는 천년송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권영호 윤영희 박용구 허봉조 조성자 정재화 조용길 주경숙 강구익 백영란 박건애 윤채영 박두흥 권금홍
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구불구불 수십 번을 180도가 될 만큼 가파르게 내려와 달궁을 지나 뱀사골에 도착하였을 때가 2시가 넘었습니다.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뱀사골 골짜기로 2.1km을 걸어 올라가면 천년송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구름은 끼었으나 비가 올 것 같지 않아서 우산도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나무데크로 길을 편하게 만들어 놓은 계곡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 언제나 맑고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흘러 내리는 골짜기입니다.
데크 아래 계곡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흐르는 물에 씻기어 반들거리는 모양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흐르다가 웅덩이에 고이기도 하고 작은 폭포처럼 바위길을 타고 내려오다가 시원한 물굽이를 만들어 놓은 자연 계곡은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폭포처럼 쏟아지다가 큰 물웅덩이를 만들어 맑고 깨끗한 하늘과 푸르고 짙은 떡갈나무의 초록색을 담고 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걸어 올라가면 양쪽 가파른 언덕위에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려앉을 것만 같은 나무의 모습이 정다운 풍광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3시가 다 넘은 시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천년송이 있는 와운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이름이 와운(臥雲), 구름이 누어서 넘어간다는 높은 산위에 있는 마을이름으로는 품새가 이쁩니다. 가파른 경사가 진 마을 비탈길 안쪽으로 민박집이 연이어 있고 그 뒤쪽으로 새로 만들어 놓은 목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옆에 아주 크고 우람한 장수를 닮은 소나무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가 와운천년송이라 이름 붙여진 나무입니다.
와운천년송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이 마을에서는 솔가지는 액운을 막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소나무 바람소리를 태교에 이용했다고도 쓰여 있었습니다. 솔가지를 액운을 막는데 사용한 것은 우리나라의 오랜 풍(?)속이지만 소나무 바람소리를 태교로 이용해 왔다고 하는 와운 마을에는 차 솥에 끓는 물소리가 송풍성을 닮았다고 포은선생 같은 시인이 나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늘엔 회색구름이 떠있었고 시원한 산바람이 비탈진 산길에 솟아난 땀방울을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천년송의 위쪽에는 할아버지 소나무가 있고 그곳에는 돌로 된 재단이 놓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모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이 두 소나무를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면서 우람한 둥치와 굳건한 가지의 모양에 감탄을 연발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멀리 바라보이는 서편 노고단 쪽에서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마을 앞으로 빠져 나오기 무섭게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산도 우비도 차안에 두고 가져오지 않은 미숙함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찌 할 수 없어 바로 길옆에 창고가 있어 그곳으로 갔으나 문이 잠겨져 있어 그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심한 바람에 옆으로 들어치는 빗줄기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속옷까지 홀랑 젖었습니다. 그칠 것 같지 않았던 빗줄기가 30여분 후부터 조금씩 줄어들어 뱀사골 골짜기 길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계곡의 물은 급격하게 불어나 올라갈 때 보았던 맑고 푸른 물은 사라지고 흙탕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신발 안에도 물이 가득 옷도 다 젖었으나 산속에서 맞아본 시원한 소나기는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천연기념물 424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수고 20m, 가슴높이 둘래 6m, 수관폭 12m. 와운 마을 당산목
빗발이 잦아들어 뱀사골 주차장을 출발하여 오늘 저녁에 묵을 민박집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남원시 산내면 중기2길 18 지리산 둘레길 노송나무집입니다. 방 3개 그리고 거실까지 15명이 충분히 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주 반장이 이미 점검을 한 장소여서 하루 밤을 불편 없이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저녁과 아침은 집에서 해주는 맛있는 집밥이었습니다. 모두 음식이 맛있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것을 보니 모두 만족한 것 같았습니다.
좀 많이 걷고 비까지 맞은 몸이 피곤하였으나 저녁을 먹기 전에 700m윗쪽에 있는 길섶갤러리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서울에서 살다가 지리산이 좋아 이곳으로 이사를 하여 지리산 사진작가가 된 강병규씨가 살고 있는 갤러리라고 했습니다. 갤러리를 구경하고 전망대에 올라 지리산 스카이라인을 둘러 보았습니다.
뱀사골 천년송을 빗속에 다녀왔고 다시 젓은 몸을 이끌고 갤러리를 둘러 보니 몸이 피곤하긴 했으나 비내린 뒤의 지리산 계곡의 산뜻한 공기는 마음과 머리를 맑게 해주었습니다. 갤러리 안에 한지에 인화해 놓은 사진들이 마치 동양화같은 질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고사목 그리고 운해 속에 비춰진 천왕봉 등 지리산의 진면목을 사진으로 보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강 작가가 화단에서 화초를 손질하고 있어 짧은 인사를 주고 받고 내려왔습니다. 해발 700m가 넘는 지리산 높은 곳에 자리잡은 곳, 뒷산에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들이 방금 내린 소나기에 신이 나 푸른 솔잎 끝에 진주알 같이 맑은 물방울을 대롱대롱 달고 있었습니다. 산과 나무가 만들어 내는 대자연의 풍광 속에서 그는 오늘도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숙소로 내려왔습니다.
맛있는 저녁 그리고 한 순배 돌아간 맥주캔 다들 지쳐있었으나 그래도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화가 가득했습니다. 거기에 주 반장이 찻자리를 차리고 동방미인이라는 대만 명차를 우리 회원 모두에게 맛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방미인이라는 차는 대만의 유명한 녹차인데 원래 벌래가 먹은 찻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이 마을에서 차농사를 지었는데 벌레가 먹어 상품화 하지 못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버렸으나 그것을 아까워하는 한사람이 팔려고 그 찻잎을 가지고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 영국 차 바이어가 그 차의 향기를 맡아 보고 이런 차가 있으면 전부 사겠다고 하여 팔리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그 마을의 차는 일부러 벌레가 먹게 하여 특이한 향이 나는 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동방미인이라고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알아주는 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사장되고 말지만 어느 순간 그 참 능력을 알아준 자를 만나게 된다면 대박이 터지게 되는 것이지요. 백아절현이라는 사자성어도 그래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차를 마시고 맛이 부드럽고 향이 특이하다고 하는 차인이 계셨습니다.
술과 차를 마시고 자연스럽게 스마트폰 노래방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리 많이 잘 먹었는데도 마지막으로 수박을 잘라 포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텐트까지 가지고 와서 바깥에서 자기로 한 산행 대장이 비가 내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거실에 자기로 하고 각각 정해진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모두 명산 지리의 정기를 듬뿍 받기를 원하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내일 아침 6시에 바로 내 건너에 있는 실상사를 가기로 약속하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
아침 6시 주반장의 신호로 다들 일어나 주변의 웅장한 산자락에 흰 구름이 띠처럼 걸쳐져 있고 어제 내린 비로 작은 개울에는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렸습니다. 마을을 나서 개천다리를 지나 잘 닦여진 길 옆으로는 재래종 벼의 시험 단지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신품종이 나오면 재래종 종자는 쉽게 잃어버리게 되어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는데 매우 큰 지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아주 옛날 우리의 재래종 볍씨 키가작은 졸장벼와 쌀알이 흑색의 흑갱벼의 종자를 보존하기 위해 재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가에 돌장승이 서있고 커-브 길을 돌자마자 다른 절과 달리 꽤 넓은 평야지에 세워진 실상사가 보였습니다. 실상사 입구 바로 앞 큰 연못에는 분홍 연꽃과 흰 연꽃이 살랑이는 아침 바람에 수집어 하듯 피어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의 연밭에서 논고동(우렁)이 빨간 알을 연 대에 군대 군대 산란해 놓은 것을 절에 가는 단원 모두가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실상사는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져 있으며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고 합니다.
실상사 3층석탑과 보광전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입니다. 증각대사의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고 합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습니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입구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으며 다른 절과는 다르게 주련이 한글로 씌여 있었습니다. “가득함도 빛나고” 그리고 다른 기둥에는 “비움도 빛나라“ 그것도 아주 특이한 한글체로 쓰여 있었습니다. 실상사는 지금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으며 고찰의 정신을 현대화 해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넓은 마당 안에는 두 개의 삼층석탑이 서있고 석탑 한 쪽에는 하얀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꽤 나이든 배롱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석탑 뒤에는 큰 석등이 있고 그 뒤에 보광전이라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당, 이 불당의 왼쪽에는 아주 큰 반송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한 비구니 스님이 손에 커피가 들어있는 큰 머그잔을 들고 서서 실상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직선으로 보이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이고 그 천왕봉을 넘어 일직선으로 나아가면 일본 후지산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상사는 일본과 여러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말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상사 범종에는 일본 지도가 그려져 있으며 그 범종을 어찌나 많이 두들겼든지 가운데 일본 본토지도는 거의 달아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극락전 안에서는 한 여인이 심신을 다한 기도 삼매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목탁이라고 쓴 방안에서는 민중교화에 이름이 알려진 도법스님이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갔던 윤채영선생이 대구에 왔을 때 안면이 있다고 문지방 너머로 눈인사를 하고 돌아 나왔습니다. 생태뒷간이라 쓰여진 해우소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남자의 화장실에는 대변과 소변이 분리되도록 장치를 만들어 비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생태학습을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4년 전에는 여기에 있는 부처님 머릿속에서 비파괴 3D 스캔장치를 이용해 고려시대 불경이 뽕나무로 만든 종이에 은가루로 쓴 불경이 있어서 그것을 개봉하여 국보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철불이 유명한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바깥에 있었던 것을 작은 집을 지어 집안에 모셔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으나 난개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를 살리며 천천히 살펴가면서 일을 하고 있는 신중함이 눈에 보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집주인 양판용씨와 인사를 나누고 벽송사를 향했습니다. 함양 마천쪽으로 꼬부랑 산길을 지나 벽송사에 도착하였습니다. 벽송사는 1520년 조선 중종때 백송지엄 선사가 지은 절로 한국전쟁 때 지리산 빨치산부대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곳으로 토벌대가 불을 질러 소실되었는데 최근에 다시 지은 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문에서 두 단쯤 올라간 곳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왼편 위쪽에 거대한 도인송이 있었습니다. 아래 줄기에는 보호수 (수령 300여년, 수고 35m, 가슴높이 둘레 1.2m, 지정일자 2011년)간판이 달려 있었습니다. 미끈하게 올라간 나무줄기와 하늘 높은 곳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와 미로처럼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수관을 감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자리 잡은 미인송을 보러 올라갔습니다. 미인송이라 표찰이 적힌 나무는 비스듬히 자라나 지주목을 받쳐놓았습니다. 그러나 미인송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줄기의 윗부분은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길 소원하는 것이 이름을 지은 뜻이라고 한다지만 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소나무같이 보였습니다.
도인송(수령 300여년,수고35m,가슴높이둘레1.2m, 2011년 지정) 미인송
벽송사를 나와 바로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암정사로 올라갔습니다. 이곳은 최근 대만에 있는 사찰과 제휴하여 새로 사찰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바위가 많았으며 일주문 대신 사천왕상을 바위에 새겨 놓았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20-25m 높이를 자랑하는 일본목련이 어른 주먹 만한 붉은색 열매를 세워 달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대웅전은 우리나라 의 절의 채색과 매우 달랐습니다. 스님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절은 대만의 사찰과 같이 만들어 대만식 단청을 하여 황금색이 많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서암정사가 유명한 것이 석굴불전이였습니다. 큰 바위 안에 부처님을 깎아 모시고 사면 벽이 조각이 되어 현란한 부처의 세계를 새겨 놓았습니다. 조각가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석굴 바깥에도 작은 석상들이 많았습니다.
서암정사 대웅전
대충 돌아보고 10시가 조금 지나 이제 함양 상림으로 향했습니다. 남원에서 함안쪽으로 함안 마천을 지나 오도재를 넘어 함양읍으로 가는 길입니다. 최근에 ‘지리산제일문’이라는 아주 큰 문을 만들고 그 주변을 정리하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선생의 시비도 세워 놓았습니다. 지리산 천하제일문에 올라가 아름다운 지리의 풍광을 보았습니다. 구름에 싸여있었으나 천왕봉을 찾아보고 노고단, 성삼재, 정령치를 찾아 보았습니다.
주변 여기 저기 세워진 시비 사진을 찍으며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리산천하제일문 앞에 잘 가꾸어진 조경에 돌로 된 시비가 있었습니다. 성종 20년 (1489년) 4월 20대 후반 김일손과 40대 정여창이 지리산을 둘러보고 악양에서 섬진강에 배를 띄우고 탁영이 시를 지으니 일두가 화답을 했습니다.
<정여창과 같이 지리산에서 놀고 악양에 배 띄우다> 凔波萬頃櫓聲柔(창파만경로성유) 푸른 물결 가득하고 노젖는 소리 고요한데 滿裕淸風却似秋(만유청풍각사추) 소매가득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回首更看眞面好(회수경간진면호) 고개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그모습 아름다워라 閒雲無跡過頭流(한운무적과두류) 한가히 흐르는 저 구름 두류봉 지나 자취감추네
<일두의 화답시 악양> 風蒲獵獵弄輕柔(풍포렵렵롱경유) 창포를 휘감는 바람 가볍고 부드럽네 四月花開麥已秋(사월화개맥이추) 사월 화개는 이미 보리가 익어가고 看盡頭流千萬疊(간진두류천만첩) 두류산을 둘러보니 온통 첩첩하네 孤舟又下大江流(고주우하대강류) 외딴 배 내려 내려 큰 강으로 흘러 간다 |
일두의 시비 첫련에 風薄泛泛弄輕柔라고 되어 있어 다시 확인해 봐야 할 것같습니다
상림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곳 현감으로 있을 때 수해 방지를 위해 숲을 만들었으며 그때에는 큰 숲이였으나 하림은 개발이 되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위쪽에 있던 상림 숲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한 사방사업지였습니다. 몇 번 와 본 곳이긴 하지만 오늘은 숲보다는 그 옆에 군청에서 조성해 놓은 다양한 연꽃 밭을 구경하는데 신경을 빼앗겼습니다. 연꽃 구경을 하고 상림 숲길을 걸으면서 ‘思雲亭’이라는 정자 앞에서 고운선생의 깊은 뜻을 기렸습니다. 12시 30분이 넘은 시각에 상림을 나와 늘봄식당에서 산채 비빕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사운정
이번에 운전을 하고 수고하신 박두흥 교장선생님이 추천한 일두 정여창 생가를 가보기로 했습니다. 함양에서 16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곳 일두선생 생가 마당에 아름다운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었습니다. 일두 선생의 집을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마루 벽에는 대원군이 썼다는 “충효사표“ 라는 아주 큰 한자글씨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일두 정여창 선생 정원 소나무
이곳을 나와 거창 안의를 거쳐 위천면 당산리에 있는 소나무 천연기념물 410호를 보기로 했습니다. 점심 식사후 권영호, 강구익 선생은 다른 바쁜 일 때문에 대구로 돌아가고 나머지 13명만 당산리 소나무 천연기념물을 구경하였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웅 운다고 하는 소나무입니다. 그 옆에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소나무라는 근심통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 천연기념물 410호
위천면 소나무를 볼 때 까지 점심을 먹자마자 출발하여 자동차 봉사를 해준 선생님들이 졸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곳을 출발 거창 휴게소에 다들 모여 간식을 먹고 다시 차량을 배정하여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1박2일의 지리산 소나무 답사 일정을 무사히 잘 마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지리산 와운 천년송 천연기물 424호, 벽송사 보호수 도인송과 미인송, 그리고 일두 선생 생가에 있는 소나무와 거창 위천면 당산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410호를 보았습니다. 특별하게 서암정사에 있는 우람하게 키가 큰 황목련(일본목련)도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지리산의 높고 웅장한 능선, 골짜기마다 바위와 청류가 만들어 놓은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풍경 그 사이마다 천년의 불심이 담긴 실상사, 벽송사, 서암정사, 그리고 다정다감한 같이 간 사람들의 사랑스런 마음이 함께한 즐겁고 의미있는 1박 2일 이었습니다.
무더운 한여름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라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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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께서 올리신 긴글을 읽으니 그날의
그림들이 고스란이 떠오릅니다. 한곳도
빠짐없이 그유래와 설명까지 붙여주셔서
다시한번 그여행속을 죽다녀오는 느낌을
느끼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연일 35도를 넘나더는 이 무더운계절을
선생님 !무탈하게 잘넘기시기 바랍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