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독자 여러분!
새해 건강하시고 ,
만사형통하시길 바랍니다. - 원보. ]
13. 을지 소왕의 후계자.
그때, 걸걸추로 소왕의 알지 閼智, 발렬 부인이 바깥으로 나오더니 을지 미앙을 반갑게 맞는다.
“근오 어미, 어서와”
“예, 작은 이모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을지미앙의 어머니와 걸걸추로 소왕의 부인은 발렬가의 맏이. 막내로 자매지간이다.
그러니까, 고 故 을지 담열 소왕과 걸걸추로 소왕은 동서 同壻지간이다.
이중부와 우문청아의 관계와 중부의 아들 우문사로까지 그 내막을 다 알고 있는 걸걸추로 소왕이
이 참에 사실을 밝혀, 서로 간의 갈등을 해소 解消 시키고자 부부가 계획한 일이다.
그래서 을지미앙에게 선우의 막사로 오라고 한 것인데, 묘하게도 을지미앙의 도착시간이 소왕들이 바깥에서
바람을 쉬는 시간과 겹치게 되면서, 이중부와 우문청아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을지미앙 모자가 걸걸추로 소왕 부부의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것이다.
고원에 생활하는 유목민들은 약속에 대한 시간개념이 희박하다.
초원이 워낙 넓은 관계로 먼 길을 이동하려면, 도로나 날씨 등의 환경 조건이나 타고 다니는 말의 건강 상태,
늑대와 같은 맹수나 비적 匪賊 떼들 만날 수도 있는 등,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늘 잠재 潛在 되어있는 상태라 약속 시간을 함부로 정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몇 시까지?”라고 구체적인 장소와 약속 시간을 정하고자, 묻는다면 큰 실례 失禮가 된다.
그럼, 그들은 약속 시간을 어떻게 정하느냐?
단순하게 “어디쯤에서 오전까지” “어느 부근에서 저녁까지”라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장소와 시한을 정한다.
약속 시간이 오전과 오후 두 번뿐이다.
그러니, 하루에 두 번 이상 약속 시간을 정하기는 곤란하다.
그렇게 약속한 시간을 넘겨, 더 늦게 오더라도 서로가 미안한 감정을 느끼거나 불평불만 不平不滿도 없다.
으레 그러러니하고 예사로 여긴다.
그들은 지역이나 시간적인 제약 制約을 받는 것에 대하여, 태생 胎生적으로 거부 拒否감을 느끼고 있다.
공간과 시간, 그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속박 束縛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속세 俗世의 긴장감을 거부하며 획일화 劃一化 된 규범 規範을 벗어던지고,
드넓은 들판을 내키는 대로 마음껏 뛰어다니는 야생마 野生馬처럼
자연주의를 선호 選好하고 표방 標榜하고 있는 것이다.
우문 무특 선우는 겨우내 청아와 중부 간의 혼례식에 대하여 몇 차례 언급하였으나,
청아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계속 회피 回避하기만 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우문 소왕은 대인회의가 끝난 후, 청아와 중부를 불러 혼인 관계를 매듭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친구이자 동료인 걸걸추로 소왕에게 얼마 전, 함께 사냥할 때 넌지시 이를 이야기 해 두었다.
그러한 이유는 이중부가 어리고 소왕으로서는 막내지만, 같은 직급의 소왕으로서 함부로 하대 下待하기도 그렇고, 사안 事案 자체가 함부로 말하기에 껄끄러운 내용이므로 사전에 동료를 포섭 包攝하는 과정이다.
걸걸 추로 소왕이 이 말을 듣고는 예사로운 사항이 아니기에 알지 閼智와 의논하여,
이질녀 姨姪女인 을지미앙을 이곳으로 오라고 통보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걸걸추로 소왕은 이중부에게는 월하노인 月下老人(중신애비, 매파 媒婆)이자 ‘처 이모부’ 妻 姨母夫가 되는 관계다.
걸걸추로 소왕은 호도 선우에게 며칠 전에 미리 막사 한 개를 별도로 사용하겠다고 사전에 이야기해 두었다.
이중부와 을지미앙의 중매 中媒를 선 걸걸추로 소왕, 자신도 관계되는 일이므로 준비해 둔, 선우의 옆 막사로 세 사람을 안내하여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걸걸 추로 소왕의 알지가 이미, 따끈한 수태차와 간단하나마 정성껏 술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그렇게 천부장 한 명(우문청아)과 소왕 세 사람이 다 모이니, 대인 회의가 연장되는 분위기처럼 보였다.
걸걸 소왕이 우문 소왕에게 마유주를 권하면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우문 소왕야, 육 년전의 헨티산맥 전투를 기억하시죠?”
“험... 기억하다마다, 그 패배를 어찌 잊어버리겠소? 나도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겨우 건졌소.”
“그렇죠, 그 전투에서 크게 다친 을지 소왕야는 부상이 심하여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유언 遺言으로 자신의 딸 미앙을 부탁하였으며, 그때 묵황 소왕이 목숨을 내걸고 적 진영에 침투하여 을지미앙을 구출하였습니다”
“흠”
“당시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 후 제가 직접 중신애비
노릇하여 묵황 소왕과 을지 미앙과의 혼인이 성사되었고, 지금은 돌이 지난 아들까지 있습니다”
걸걸추로 소왕은 지난 사실을 모두 밝혔다.
그러자, 우문 소왕 자신도 울란바트로 제2차 전투가 벌어지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시, 아군이 전멸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문 소왕 자신의 근거지인 헨티산맥과 패잔병 이중부 일행이 와신상담 臥薪嘗膽, 재기 再起를 노리며 병력을 양성 養成하고 있었던, 항가이산맥 사이의 넓은 초원지대는 남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상황에서는 상호 간에 연락 자체가 힘들었고, 나중에 연락망이 어렵게 연결되었으나,
호도 선우와는 간략한 군세 軍勢 정보만 오고 갔을 뿐, 다른 소식은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청아가 혼례 이야기만 나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계속 회피하는 것을 보고는
그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터라, 소왕의 지위 地位에서는 본부인(閼智 알지)과
후처 後妻가 몇몇 있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임으로 이해한다는 관대 寬貸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무남독녀인 청아가 정실부인 正室婦人(알지)이 아니라는 점이 아쉬웠지만, 지금에 와서는 하는 수 없다.
그래도 거리가 먼 사로국으로 딸이 시집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눈치다.
이제 이중부가 흉노의 중추적 中樞的인 역할을 담당하는 소왕이 된 지위에서
함부로 이동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혼례식 婚禮式도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사생아 私生兒를 낳은, 자신의 딸 이야기를
무슨 대단한 무용담 武勇談처럼 대놓고 떠벌리기에는 낯 뜨거운 사안 事案이기도 하였다.
“그렇소, 당시 상황이 인력 人力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걸걸 소왕야,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이다.”하고는,
앞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어
“내 술이나 한잔 받으시오”라며 권주 勸酒를 따른다.
우문무특 소왕이 통 크게 너그럽게 이해한다고 하니, 전전긍긍 戰戰兢兢하던 청아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돈다.
걸걸추로 소왕의 알지 閼智는 게르 바깥에서 기다리던 을지 미앙을 불러, 우문 소왕에게 새삼스럽게 인사시켰다.
며칠 전, 이모로부터 우문 청아와 사로의 일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을지 미앙은 을지 근오를 안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우문 소왕야, 앞으로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우문 소왕은 얼굴에 멋쩍은 옅은 미소로 답한다.
을지미앙이 근오를 우문 소왕 면전 面前으로 슬쩍 밀면서 인사시킨다.
“근오도 할아버지께 인사 드려”
붙임성 좋은 을지 근오도 우문 소왕을 보고는 “하~아부지”하면서 두 팔을 벌린다.
귀여운 근오를 안아 들고 “너 이름이 뭐지?”하고 물으니.
“어지...”하고 아직은 제대로 말을 못하니, 성만 비슷하게 겨우 발음한다.
“어~ 성 姓이 을지 씨야?”
그러자 을지 미앙이 “네, 친정 성씨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라고 한다.
을지미앙은 우문소왕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왔던 터라, 대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우문 무특 소왕은 다시 옅은 미소를 띠며 답한다.
“그렇구나”
을지담열 소왕은 우문무특 소왕이 젊을 때부터 그 무예나 인품을 존경하며 따르던 대선배가 되는 분이다.
그러고 보니, 존경하던 분의 성씨를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인 외손자를 처음 보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문 소왕의 표정이 좀 더 누그러진 모습으로 변하더니, 을지 근오를 두 팔로 안고 막사 안을 한 바퀴 돌아 본 후,
을지근오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네 외조부님을 많이 닮았구나, 너도 외조부님처럼 훌륭한 흉노인이 되어야 한다.”
을지근오는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하고 힘차게 답한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을지 미앙이 우문청아를 보고 스스럼없이
“언니, 오랜만에 뵙네요”라고 호칭하며 뒤늦게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자, 청아도
“이쁜 아우 고생이 많았지”라며 정답게 두 손을 맞잡아 준다.
이를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이중부 하긴, 별 할 말도 없는 처지이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행동과 인사는 다만, 한가지 뿐이다.
"장, 장인어른,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더듬거리며 한쪽 무릎은 꿇어앉아, 새해 첫 술잔을 큰 잔에 따라서, 장인 丈人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권하는 이중부의 손과 팔이 정중 鄭重하면서도 떨린다.
그러나, 마음은 가벼워진다.
1년 이상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가슴 속이 홀가분해 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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