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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권성훈씨는 '유영철 글쓰기에 나타난 사이코패스 성격 연구'라는 글을 '한국범죄심리연구'에 게재했다. 월간조선 이은영 객원기자가 2004년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수감 중인 유영철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 출간한 '살인중독'(2005)에 나온 편지글을 통해 살인마의 성장과 좌절, 그리고 살인동기를 추적했다고 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자료의 문제다. 유영철이 범행이 발각되어 검경 조사와 법원의 최종 판결까지 나온 이후에 쓴 글을 자료로 분석한 것은 한계와 문제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결과론에 끼워 맞추기 식이 될 우려가 있다. 20여명이나 되는 불특정 다수를 살인한 사람을 제정신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범행 적발 이전의 언행과 글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아래는 권씨의 분석에 대해서 주석을 다는 형식으로 한다.
유영철은 유년시절 자신의 외할머니가 "생활고에 못 이겨 옹알이를 하고 있는 유영철을 죽여버릴 생각을 했으며, 평생 딸(유영철의 어머니)에게 짐이었다"고 회고한 것을 편지에 옮겼다. 권씨는 유영철 어머니의 이같은 무의식이 유영철의 무의식에 투영되면서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는 등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사람은 축복 받은 태생이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서 심리적인 문제 뿐 아니라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같은 분석은 이미 심리학에서 이견이 없는 고전으로 통한다.
유영철은 자신의 살인에 대해 "학창시절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한 제가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기도 한다.
하지만 유영철의 중학교 동창생들은 그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깡패조직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발견하면 선배라도 무릎을 꿇렸다는 증언을 한다.
유영철은 청소년시절 자신의 첫 범죄로 기록된 절도사실을 부인하는 등, 스스로 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또 혁명가 체 게바라의 혁명여행을 본떠 제주도 일대를 여행하는 등 영웅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한다.
권씨는 이로 미뤄볼 때 "유영철의 행동발달 심리를 보면 '피상적 매력'과 '과도한 자존감'이 충만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했다는 유영철이 중학생 때 고등학교 깡패조직과 싸움을 마다 않고, 담배를 피웠다고 선배까지 무릎을 꿇게 하여 모욕을 주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증언을 한 사람이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유영철이나 다른 사람 말을 전해 들었을 정황이 크다. 그 이유는 유영철 친구들은 그가 유약했고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살인 대상이 거의가 고령자나 여성과 같이 약자만을 한 것은 그가 싸움에 능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고, 체게바라와 제주도 여행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굳이 연관을 시키자면 체게바라는 ‘방랑’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며 그를 동경하여 여행을 한 것을 두고 ‘피상적 매력’과 ‘과도한 자존감’이라고 했는데 그것으로 잔혹한 연쇄살인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유영철에게 파탄의 조짐이 인 것은 아내와의 이혼이었다. 강간 등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영철은 이렇게 토로한다.
"2000년 10월 강제이혼을 당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의 말처럼 저도 죽었다고 마음먹었고 만물을 창조했다는 유일신을 부정하며…(중략)… 하나님에게 저의 희망을 구걸하지 않았고 진리를 찾아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중략)…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점점 분노로 가득차면서 저는 부자들에게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이혼 전에 수차례 교도소를 들락 거렸으니 이미 인생은 파탄은 난 상황이고 따라서 이혼은 파탄의 조짐이 아니라 파탄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철학적 배경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앙은 구걸행위가 아니며 진리는 믿음으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신에 대한 관념은 그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함을 보여 줄 뿐이며 그는 자기 바람과는 다르게 신체적 약자 뿐 아니라 대부분 경제적 약자를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유영철은 동시에 예술고 진학을 희망했으나 색맹테스트에서 탈락하면서 학업의 꿈을 접기도 했다. 유영철은 "색맹 면접에서 굴욕을 경험한 후 화려한 물감이 아닌 데생연필만 만지작거리는 시간들을 보내며 스스로 외골수 성격을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권씨는 이 같은 유영철의 말을 종합할 때 "억압으로 인해 생긴 증오와 분노와 같은 비의식이 자신의 억압을 적절히 통화하지 못하고 극복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유영철의 억압의 기제는 억눌린 본능적인 욕구나 금지된 욕망이 정상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되지 못함을) 방어하지 못함으로써 대인관계의 고립양상으로 천착됐고, 세계와의 기피와 단절을 경험하면서 살인범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권씨가 유영철이 저지른 살인행각에서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발견했다는 대목은, 사체를 토막 내는 와중에 아들에게 전화를 받고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인데, 극도로 긴장되었을 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스스로 사이코페스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서 유영철의 정서는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전환할 수 없는 '공감의 무능력자'라는 사실과 '후회 혹은 죄책감 결여', '얕은 감정' 이라며 이는 반사회적이며 살인마로써의 절정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라고 했다.
권씨의 진단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회 전체는 예비 살인마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잘못을 인정한 경우는 전혀 없었고 분명한 사실을 인지시켜도 기억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했다. 과연 우리사회에서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며, 후회와 죄책감이 충만한 사람과 얕은 감정을 지니지 않는 사람이 얼마냐 있냐고 묻고 싶다.
사체 정리 도중에 라면대신 밥을 해먹은 것은 극도의 긴장감과 심신의 피곤함이 허기로 나타난 것뿐이지 다른 유추를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불우한 환경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이혼을 했다고 살인마의 기질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 중에 살인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사이코페스가 곧바로 흉악한 살인마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코페스 진단은 규명할 수 없거나,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아주 적절하고 간단한 방법으로 써먹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끝을 보았다./ 눈물을 보았고/ 슬픔을 보았고/ 공포를 보았고/ 이별을 보았고/ 운명을 보았다./ 그들의 마지막을 보았다"
권씨는 시인답게 유영철의 시를 분석했는데
'눈물', '슬픔', '공포' '운명' 등 연차적인 확장 시어를 통해 '마지막'과 '끝'을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살인을 극화하고 미화시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희대의 살인마에게 용서는 아직 먼 얘기라고는 소리다.
위 시가 살인을 미화했다고 분석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살인자 입장에서 본 피해자와 자신의 운명을 결합 시켰다면 모르나, 살인행위 자체를 미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 문구가 유영철이 썼기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만일 다른 사람이 썼다면 그런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앞에서 우려를 언급했지만 결과론에 끼워 맞추기가 된 일이다.
*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유영철의 문제는 한 개인만이 아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유씨 말고도 흉악한 살인마는 더 많이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70년대 생들에게 희대 살인마들이 집중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들 세대만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있다.
동화작가인 권정생은 산문 저서 ‘우리들의 하나님’에서 70년대 생들은 풍기는 삭막한 정서 분위기는 그들이 산업화사회가 시작된 70년대에 태어나 자란 탓이 라고 하며 끔찍한 살인 범죄를 저지른 ‘지존파’ 청년들이 모두 7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했다. 또한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는 막연하지만 산업화 시대에 태어난 70년대 생들에게서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었다.
영화 ‘공공의 적’(1편)은 제목처럼 공공의 적을 다룬 것이 아니라 잔혹한 존속살인으로 시작한다. 자기 부모를 무참히 죽이고 그 이후는 그저 살인마가 관성에 의해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70년생 들은 20대에 들어서면서 존속살인을 저질렀다, 여론과 법원의 정상참작을 받은 계부의 강간에 살인으로 대응한 김보은, 김진관 사건(92년 당시 21세, 71년생)을 시작으로 거액의 재산을 노려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불에 태운 박한상(94년 당시 23세, 71년생), 2000년 부모를 토막 살해한 이은석(당시 25세 ,75년생)등등 이다.
그 이후 70년생 들은 더욱 끔직한 살인을 저지른다. 엽기 살인의 장을 연 지존파 중 사형에 처한 6명은 당시에 20대로 68년생~ 74년생 들이다. 이어서 막가파는 총 8명으로 두목 김기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70년생이다. 피해자의 사체의 일부를 나누어 먹은 영웅파 정덕수(1999년 당시 29세 70년생)외 8명도 전원 70년대 생이다.
이들이 30대에 들어서면서는 더욱 끔찍한 살인마가 되었다. 13명을 살해해 했지만 더 엽기적으로 21명을 살해 한 유영철(70년생) 때문에 관심에서 밀린 정남규(69년생),
용인지역에서 여성 5명을 살해한 허재필(77년생), 초병을 살해하고 총기를 탈취한 조영국(72년생), 논현동 고시원 살해 방화사건의 정모씨(77년생), 천안중학교 행정실장을 칼로 찔러 죽인 이모씨(70년생), 경기 군포 여대생 살해사건 피의자 강호순(71년생)는 9명을 연쇄 살인했다고 자백했다.
길에 버려진 자신을 친자식으로 길러준 양어머니의 재산을 노려 살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이모(35세 2010년 75년생), 13살 소녀를 납치 강간 살해한 김길태(33세, 2010년, 77년생) 사건이 채 가시기 전에 발생한 부산 단조망치 사건의 조모씨와 안양초등학생을 포함하여 3명을 토막 살해한 정성현은 70년대 생과 불과 한 살 차이인 69년생이다.
2010년8월27일 아버지(68세)를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존속상해치사)로 K(33세 77년생)씨,
2010년8월1일 아버지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존속살해)로 김모(36.74년생, 무직)씨,
가족끼리 단란하게 TV를 시청하던 한 가정에 침입해 가장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윤모(33, 77년생), 아버지(63세)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숨긴 이모(79년생.무직)씨, 경기 이천에서 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한 김모씨(39세 71년생),
그와 반대되는 사건도 있었다. 아들을 살해 후 자살로 위장한 아버지가 자수했다. 아버지L씨 (67세, 43년생) 아들 (37세, 74년생), 아버지를 살인하고 19개월 동안 시신을 숨겨 온 고양시에 사는 이모(2011년, 31세). 부부싸움 끝에 아내를 살해하고 이를 목격한 아들(7게)까지 죽인 아버지 이모씨(39세 2011년) 아버지(67)로부터 머리를 염색했다는 꾸지람을 듣고 뺨을 맞은 데 격분, 방안에 있던 둔기로 아버지 머리를 내려쳐 살해한 양모(2011년, 35세), 술을 마셨다는 핀잔에 70대 노부(2011년 73세)를 13층 아파트 밖으로 집어 던져 숨지게 한 아들 김모씨(38),
이상의 사건은 정신 병력이나 사회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기 어머니를 볼링공으로 내리쳐 사망하게 한 경찰대학 출신 엘리트의 이모씨(40세 2011년 1971년생)의 살인과 만삭의 부인을 살해한 용의자 의사 백모씨(31세 2011년 1980년생)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해야 할지 의문이다.
우울증과 정신 병력이 있다고 해도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살인마들을 단순히 사이코페스라고 진단함에 동의하기 어렵다. 어려서는 부모와 단절,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여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아버지 세대의 트라우마가 전위된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 자신들은 모르지만 70년대 생들과 그들의 아버지 세대인 40년대 생들은 가장 단절이 심하다.
60년생 중, 후반부터 시작한 본드와 부탄가스가 70년생에서 창궐했었다. 그래서 전두엽 이상이 아니라, 아애 뇌의 일부분이 녹아 있을 수도 있다.
서른의 나이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며 사회적으로는 허리 격으로 생산성을 최고로 올리는 나이다. 그런데 교육과 경제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사회적 낙오자는 상대적으로 더 심한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신적으로 병리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희대의 살인마들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70년대 생 이전 세대는 가정과 학교, 사회 전체가 나름의 규율과 정서가 있는 병영사회였지만 70년대 생은 세상과 사회가 바뀐 이후에도 학교에서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한 것이다. 사회의 압력은 급격히 떨어졌는데 개인 속에 잠재된 압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서 터지는 원리와 같은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 문제는 70년대 생들이 그 아래 세대와 확연한 차이가 나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부분이다.
70년생들의 경제 상황을 살피면, 부모세대의 엄청나게 고충어린 삶에 비하면 어릴 적에 아버지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1997년 12월 IMF라는 국가부도사태를 18살과 26살 사이에 맞이했다. 대학에 입학하거나 대학에 다니고, 이제 막 사회에 진출했을 때 경제 대재앙이 들이닥쳤다. 어려워진 경제 사정으로 등록금을 대출 받아서 사회에 진출도 하기 전에 빚쟁이가 되었고, 큰돈을 드려서 대학교육까지 시켰지만 직장도 변변히 잡지 못하고 늙은 아버지께 용돈이나 받아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못 배운 아버지는 잘 배운 자식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넌! 뭐하는 놈이냐?”
남자는 인성형성과정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정체성에 상당한 문제를 불러 올 수 있다. 어렸을 적에 기성세가 모른다는 X세대, 성인되어서도 까지 부모로부터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진정한 어른으로 서기 어렵다. 70년대 태생 세대들이 집단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그들 스스로도 ‘저주 받은 세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