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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청목소>의 四生을 부정하는 논증에서 自生을 부정할 때,
1) 어떤 사물도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한다.
2) 생겨난 것이 또다시 생겨나는 무한 소급의 오류.
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드는데, 이 중 1)은 타당한 논증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한다면 반드시 자생, 타생, 자타생, 무인생 중 한 유형의 발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목소>의 논증에 따라 티벳불교 논리학인 <뒤다>식으로 근본논리를 세운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사물은 자생하지 않는다.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하기 때문에.'
논증인인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면 귀결문인 '자생하지 않는다'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변충(충족, 포섭, ...)하지 않는다[캽빠마중]'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한하여 <청목소>의 논증은, 연기법을 통해 사물의 자성을 부정하려는 <근본중송>의 의도에는 충실하였지만 논리적 엄밀성은 부족한 듯 합니다. 만약 '사물의 발생에 단수(單數)의 인연이 아닌 복수(複數)의 인연이 필요하다'는 뜻이라면 自生의 부정에는 유효할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四生 모두가 부정되니 자가 당착에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일듯 합니다. 어설프게 반론을 제기해보았는데 교수님께서 한 번 살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입니다.
질문에서 거론하신 '<청목소>의 四生을 부정하는 논증'이 실려 있는 <중론> 제1 관인연품의 첫 게송과 그에 대한 주석을 우리말 번역문과 함께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모든 법은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양자에서 함께 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원인 없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생임을 알아라.
3)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āṃ nāpyahetutaḥ/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cana//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느 곳에서든 자체로부터건, 남(他)으로부터건, 그 양자에서건, 무인(無因)으로건 사물[= 존재]들의 발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不自生者。萬物無有從自體生。必待衆因(緣)。復次若從自體生。則一法有二體。一謂生。二謂生者。若離餘因從自體生者。則無因無緣。又生更有生生則無窮。自無故他亦無。何以故。有自故有他。若不從自生。亦不從他生。共生則有二過。自生他生故。若無因而有萬物者。是則為常。是事不然。無因則無果。若無因有果者。布施持戒等應墮地獄。十惡五逆應當生天。以無因故。
자체로부터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어떤 사물도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1)어떤 사물도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한다.] [둘째,] 만일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한다면 한 가지 존재에 두 개의 자체가 있는 꼴이 된다. 하나는 ‘생기게 하는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체’이다. 다른 인연 없이 자기 자체로부터 생긴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는 꼴이 된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또다시 생겨나게 되어 생기는 일이 끝이 없게 된다.[2)생겨난 것이 또다시 생겨나는 무한 소급의 오류.]
이렇듯이 자체가 없으니 남[他]도 없다. 왜 그런가? 자기가 있어야 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체로부터 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남[他]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역시 아니다.
[자체와 남] 양자 모두에서 생한다는 것[共生]은 [하나가] 두 군데서 생하게 되는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자체에서도 생하고 남에서도 생하기 때문이다.
원인 없이[無因] 만물이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영원[常住]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원인 없이 결과가 있는 것이라면 보시를 행하거나 계율을 지켜도 지옥에 떨어져야 하고 십악오역(十惡五逆)의 죄를 지어도 천상에 태어나야 하리라. 왜냐하면 무인론(無因論)이[옳다면 원인 없이 과보가 생길 테]니까.
위에 인용한 <중론>, 청목소 경문에서 밑줄 친 부분 가운데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는 청목의 주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질문하셨습니다.
<중론>에서 구사되는 '중관논리'는 '반(反)논리'라고 부를 수 있으며, '개념의 실체성 비판, 판단의 사실성 비판, 추론의 타당성 비판'의 3가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를 일반논리학의 개념론, 판단론, 추리론에 대응시켜서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중관논리의 '판단의 사실성 비판'은 다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제1구 비판: 증익견 비판 - 의미중복의 오류를 범하기에 비판된다.
제2구 비판: 손감견 비판 - 사실위배의 오류를 범하기에 비판된다.
제3구 비판: 상위견 비판 - 상호모순의 오류를 범하기에 비판된다.
제4구 비판: 희론견 비판 - 언어유희의 오류를 범하기에 비판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제2구 비판의 경우 '사실위배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교학적 전제를 위배하는 오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 가운데 하나가 <중론> 제7 관삼상품의 다음과 같은 게송입니다.
1) 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만일 생이 유위라면 응당 삼상을 가지리라. 만일 생이 무위(無爲)라면 어떻게 유위의 상(相)이라고 부르겠는가?
1) yadi saṃskṛta utpādastatra yuktā trilakṣaṇī/
athāsaṃskṛta utpādaḥ kathaṃ saṃskṛtalakṣaṇaṃ//
만일 생이 유위라면, 거기에 세 가지 특징[이 있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생이 무위라면 어떻게 유위의 특징이겠는가?
3) 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만일 생, 주, 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궁하게 [계속]되고, 없다면 [생, 주, 멸은] 유위법이 아니다.
3) utpādasthitibhaṅgānāmanyatsaṃskṛtalakṣaṇaṃ/
asti cedanavasthaivaṃ nāsti cette na saṃskṛtāḥ//
생, 주, 멸에 있어서 또 다른 유위[법]의 상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한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없다면 그것들[= 생, 주, 멸]은 유위의 것이 아니다.
이 게송에서는 중관논리의 제1구 비판과 제2구 비판이 구사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제1구 비판: '생, 주, 멸'이 유위법이라면 '생, 주, 멸' 각각이 다시 '생, 주, 멸'해야 하고, 그렇게 '생, 주, 멸'한 것이 또 다시 '생, 주, 멸'하게 되기에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진다. (의미중복의 오류)
제2구 비판: 생주멸이 무위법이라면, "생주멸은 유위법의 세 가지 상(특징)이다."라고 했던 교학적 전제에 위배된다. (사실위배위 오류)
여기서 말하는 '교학적 전제'는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일체법을 분류하는 방식인 5위 75법 이론과 같은 것입니다. 5위 75법 이론에서는 일체법을 75가지로 정리한 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
여기서 보듯이 '생, 주, 이, 멸'은 4.심불상응행법에 속하며, 심불상응행법은 유위법에 속하는데, 유위법은 모두 무상한 것이기에 '생, 주, 이, 멸'의 4가지 특징(相)을 갖습니다.
위에 인용한 <중론> 제7 관삼상품의 제1게 및 제3게에서 '사실위배(손감견)의 오류'를 지적할 때, '사실'에 해당하는 것은 '생, 주, 이, 멸'이 유위법에 속한다는 '교학적 전제'입니다.
'보리심'님께서는 <중론> 제1 관인연품의 첫 게송을 소재로 삼아 질문하시면서, "1) 어떤 사물도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한다."는 "1)은 타당한 논증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쓰셨는데, "어떤 사물도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한다."는 문장은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 必待衆因(緣))."는 청목소의 문장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교학적 전제에 위배됨'을 지적하는 제2구 비판의 논리가 구사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이때의 교학적 전제는 '연기법(緣起法)'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론>은 총 27장(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마라습 스님의 청목소 한역문에서는 서두의 귀경게가 제1 관인연품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를 별도의 게송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귀경게는 아래와 같습니다.
1)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2)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발생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이어진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진멸(鎭滅)시키시도다. 내가 이제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
1) anirodhamanutpādamanucchedamaśāśvataṃ/
anekārthamanānārthamanāgamamanirgamaṃ//
2) yaḥ pratītyasamutpādaṃ prapañcopaśamaṃ śivaṃ/
deśayāmāsa saṃbuddhastaṃ vande vadatāṃ varaṃ//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이어지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연기(緣起)],
희론이 적멸하며 상서(祥瑞)로운 연기를 가르쳐 주신 정각자(正覺者), 설법자들 중 제일인 그분께 예배합니다.
범어 번역으로 이 게송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이어지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팔불(八不)과 ' 희론이 적멸함', 그리고 ' 상서(祥瑞)로움'까지 총 10가지 용어가 '연기(緣起)'라는 용어를 수식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연기법'의 진정한 의미인 팔불과, 희론을 적멸해주는 그 효용과, 참으로 상서롭다는 찬탄을 담은 게송이 '귀경게'입니다.
그리고 제1 관인연품과 제2 관거래품으로 이어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제1 관인연품에서는 '불생(不生, anutpāda)인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 또는 '불기(不起, anutpāda)인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를 논증하고, 제2 관거래품에서는 '불거(不去)인 연기'를 논증합니다. 불생은, 귀경게에서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의 팔불 가운데 첫 용어이고, 불거는 마지막 용어입니다. 따라서 <중론> 귀경게 팔불에 대한 해석을 제1 관인연품과 제2 관거래품에서 모두 마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제1 관인연품에서 '불생인 연기(또는 불생인 연생)'를 논증한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연기(緣起)라고 하면, '조건(緣)에서 결과가 발생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원인에서 결과가 발생함'이라고 풀어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제1 관인연품에서는 그렇게 "조건 또는 원인에서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는 이론이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를 위해서 결과가 발생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사유가 구성할 수 있는 이론 4가지를 제시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생(自生) - 결과에서 결과가 생한다.
타생(他生) - 결과가 아닌 것에서 결과가 생한다.
공생(共生) - 결과와 결과 아닌 것이 힘을 합하여 결과가 생한다.
무인생(無因生) - 아무 원인 없기 결과가 생한다.
예를 들어서 씨앗을 심어서 싹이 생할 때, 씨앗은 원인 또는 조건에 해당하고 싹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위의 4가지 이론 가운데 "결과에서 결과가 생한다."는 자생(自生) 이론은 "싹에서 싹이 생한다."는 이론입니다. 즉, "씨앗 속에 원래 싹이 있어서 나중에 그것이 싹으로 생한다."는 이론입니다. 중관논리에서는 이런 이론에 내재하는 증익견에 대해 먼저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습니다.
제1구 비판(증익견 비판) - 만일 싹에서 싹이 생한다면, 그렇게 생한 싹에서 다시 싹이 생하게 되고, 다시 그렇게 생한 싹이 또다시 싹을 생하게 되어 ...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진다.
그리고 제2구 비판인 손감견 비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2구 비판(손감견 비판) - "조건에서 결과가 생한다."는 연기법 이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서 '자생, 타생, 공생, 무인생'의 4가지 이론을 구성해 보았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이론인 '자생 이론'이 옳다면, 애초에 전제로 삼았던 '연기법 이론'에 위배된다. 즉, '교학적 전제(연기법 이론)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며, 앞에서 예로 들었던 제7 관삼상품의 제1, 제3 게송과 마찬가지로 이는 중관논리에서 제2구 비판의 논리인 '사실위배의 오류'에 다름 아니다.
이런 분석 하에 위에 인용한 청목소(우리말 번역문)의 내용을 '제1구 비판'과 '제2구 비판'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체로부터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2구 비판(손감견 비판, 사실위배의 오류 지적, 교학적 전제에 위배)]
[첫째,] 어떤 사물도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必待衆因(緣)].[1)어떤 사물도 반드시 여러 인연이 모여 발생한다.]
[제1구 비판(증익견 비판, 의미중복의 오류 지적)]
[둘째,] 만일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한다면 한 가지 존재에 두 개의 자체가 있는 꼴이 된다. 하나는 ‘생기게 하는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체’이다.
[제2구 비판(손감견 비판, 사실위배의 오류 지적, 교학적 전제에 위배)]
다른 인연 없이 자기 자체로부터 생긴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는 꼴이 된다.
[제1구 비판(증익견 비판, 의미중복의 오류 지적)]
그리고 생겨난 것이 또다시 생겨나게 되어 생기는 일이 끝이 없게 된다.[2)생겨난 것이 또다시 생겨나는 무한 소급의 오류.]
그리고 청목소에서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는 구절의 한역문(漢譯文)이 "必待衆因(緣)"인데, 구마라습 스님의 번역문을 보면 과감한 의역(意譯)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중론> 제24장 관사제품의 제18게의 경우 구마라습 스님은 다음과 같이 의역합니다.
18)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여러 가지 인연(因緣)으로 생한 존재를 나는 무(無)라고 말한다. 또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또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18)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upādāya pratipatsaiva madhyamā//
연기(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 공성]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 공성]은 실로 중(中)의 실천이다.
여기서 보듯이 범어 원문은 'yaḥ pratītyasamutpādaḥ'로 우리말로 ' 연기(緣起)인 것'이라고 번역되는데, 구마라습 스님은 이를 '衆因緣生法'이라고 한역합니다. 즉 '여러 가지 인연(因緣)으로 생한 존재'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지금 논의의 소재가 되는 청목소 한역문인 '必待衆因(緣)(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에서는 복수(複數)를 사용하지만, 원래의 범어 원문은 단순히 "연기해야 한다."는 의미의 문장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론>의 제1장 관인연품에서는 '연기'에 대한 분별적 이해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첫 게송인 '4종 불생게'에서는 '연기(緣起)의 기(起)' 혹은 '연생(緣生)의 생(生)'을 자생, 타생, 공생, 무인생의 4가지 가운데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청목소에서 이 가운데 자생 이론을 비판하면서 중관논리의 4구 비판 논법 가운데 '사실위배의 오류'와 '의미 중복의 오류'를 지적하는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상세하고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중론> 제1 관인연품과 제2 관거래품이 연기(緣起)의 진정한 의미인 팔불(八不)에 대한 해석이라는 구조적 통찰이나, 구마라습 스님의 한역과 범어 원문의 대조를 통한 의미 해석은 중관학에 오랫동안 천착하신 교수님이 아니시면 알기 힘든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탄하고 감사드립니다.
다만 <청목소>의 "어떤 사물도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必待衆因(緣)]"라는 구절이 불생(不生) 혹은 불기(不起)의 의미를 가진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사실의 위배 혹은 교학적 전제의 위배를 지적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조금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도 잘 아시다시피 사생(四生) 비판은 상키야, 베단타, 바이셰시카 학파 등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유위법, 무위법 같은 아비달마교학을 설한 소승학파와 달리 불설(佛說)인 연기법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 비불교도들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이라는 사실 혹은 교학적 전제 위배의 오류라고 지적할 경우, 외도들은 "자종(自宗)에선 불설인 연기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제에 대한 양자(兩者) 간의 동의가 없는 한, 사실 위배 혹은 교학적 전제 위배에 대한 지적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보리심 제 부족한 생각엔 다른 불교 논서에서 상키야 학파의 이론을 논박할 때와 마찬가지로 <청목소> 또한 자체 외에 다른 여러 원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체로부터의 발생은 불가능하다고 논증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는 他生이나 自他生은 인정할 수도 있는 여지를 주므로 제가 질문에서 말씀드렸듯 사생을 부정하는 주장의 근거로 사생의 예를 드는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어떤 사물도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야 한다[必待衆因(緣)]"라는 청목소의 해당 구절이 매우 짧고 함축적이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또한 반야중관 경론들의 의도와도 부합하므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답변을 바탕으로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보리심 <중론> 제1장 관인연품의 첫 게송인 '4종 불생게'를 상캬 등 외도의 이론과 연관시킨 분은 월칭(짠드라끼르띠) 스님입니다. 월칭 스님의 <중론> 주석서인 <쁘라산나빠다>에서, '불생'과 관련하여 상캬 등의 외도는 물론이고, 불호와 청변의 <중론> 주석을 거론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이와 달리 구마라습 스님이 번역한 <중론> 청목소의 경우 4종 불생게에 대한 주석이 소략합니다. 앞에서 제가 답글을 쓰면서 갈색 글씨로 인용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구마라습 스님이 <중론> 청목소를 번역한 연대가 서력기원 후 409년인데, 월칭(600-650년 경)은 그 후 근 200년이 지나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따라서 '4종 불생게'의 비판 대상을 상캬 등의 외도로 간주한 것은 월칭이나 청변과 같은 후대의 주석가들이었고, <중론>의 저자인 용수 스님이나 이른 시기의 주석자인 청목은 4종 불생게의 비판 대상으로 특정한 학파의 이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보리심 여러 얘기 할 수 있겠지만 이만 마치겠습니다.
불전의 그 어떤 구절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미심쩍을 때, 집요하게 추구하여 주석자나 번역자나 저자의 잘잘못을 가려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보리심'님의 공부 수준은 본 카페의 <불교문답게시판>의 차원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본 게시판에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제가 길게 답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문답을 읽으실 다른 여러 분들 역시 질문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긴 답글을 쓰는 것'이 시간이나 체력 소모의 모든 면에서 너무나 힘듭니다. 따라서 너무 고급스러운 질문이 올라올 경우, 참으로 난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서 상세한 설명을 해 가면서 긴 답글을 달았습니다.
학위논문을 심사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교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정밀하게 찾아보아 답을 줄 수 있고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과 같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기에는 힘에 부칩니다.
이곳 게시판이 불자 분들의 실질적 신행을 위한 불교교리문답 게시판이 되기 바랍니다. 무기명으로, 무작위로 질문을 올리는 인터넷 게시판이기에 그 정도의 역할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리자 교수님께 본의 아니게 폐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불교는 초기부터 비불교도들과 끊임없이 교섭해왔고, 중관사상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도간경> 등의 경전에서도 四生과 함께 自在天으로부터의 生을 거론하는 등 비불교도들의 사상을 의식한 대목들이 눈에 띄어 저도 역시 四生을 비불교도들의 사상과 연계해서 해석한 것 같습니다..
@보리심 교수님께 길게 폐 끼칠 생각은 전연 없었지만 일반 불자가 이런 질문 올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 또 신세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일전에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셨지만 제 개인적 여건이 허락치 않고, 또 제가 관심있어하는 불교학 분야들이 상아탑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도 소외받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접었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경로 통해 의문을 해소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불광미디어 강의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강의장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고 다른 기회 통해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지금은 천상의 세계로 떠나신 교수님께서 이런 답변까지 일일이 해주시느라 너무 힘드셨을 거 같네요. 교묘하게 자신의 지식을과시하느라 작은 부분을 물고 늘어지며 교수님깨 언쟁하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아예 결론 내며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는 건지…
질문자처럼 공부 많이 한 분일수록 더 공부 하셔야 겠지요….나에게 교만함이 있는가?
꼭 성찰해야 할 깨달음의 필수요소라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며칠 전 교수님 영전에 조문하고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깨닫지 못한 사람이고 교만함 뿐 아니라 다른 번뇌도 무수히 많습니다. 본의 아니게 교수님을 힘들게 해드린 점도 참회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논쟁적이라면 논쟁적이고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건방지다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게시판 다시 여신 20년도부터 카페에 수십차례 질문 올리고 그 외 방식으로도 교수님과 소통하며 가르침 받았던 과정 중의 한 편린일 뿐 교수님과의 관계나 교수님과 있었던 지난 일들을 다 담을 수 있는 글은 아닙니다.
이해 못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교수님과의 마지막 질문글이 이런 글이라 한스럽습니다. 내심 힘드셨단 말씀에 송구스러워 건강하시란 인사를 올리고 떠나려 했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교수님께 받은 학은을 다 갚지 못하고 부담만 드려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