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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번제
번제란 모든 제사의 기본으로 항상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타미드)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속죄와 함께 이스라엘의 전인격적 헌신과 감사를 나타내는 제사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을 위한 계속적인 속죄와 전 민족의 주님께 대한 중단되지 않는 헌신과 충성 및 감사를 나타내는 제사였다. 중요한 것은 온 백성을 위해 매일 드리는 제사로서 항상 조석으로 드려졌기 때문에 상번제라고 불렀고 또한 개인도 수시로 자원하여 드릴 수 있었다.
번제는 가장 오래된 제사 형태이다. 노아가 홍수 후에 드렸고(창 8:20), 아브라함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다(창 22:2). 욥도 자녀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저주할 까봐 번제를 드렸다(욥 1:5). 출애굽 이후 성소제도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전 민족을 위하여 조석으로 드리는 상번제가 있었고, 임의로 아무 때나 개인이 드릴 수 있는 일반적 제사도 되었다. 이것은 성결 의식(출 29:15-18), 출산(레 12)과 문둥병(레 14) 그리고 유출병(레 15:13-15) 등의 정결의식을 위해서 드렸다. 각종 특별한 날과 축제일에도 드렸다: 안식일(민 28:9-10), 월삭(민28:11-14), 무교절(민 28:17-25), 오순절(레 23:17-21), 초실절(레 23:10-14), 나팔절(민 29:1- 6), 대속죄 일(레 16), 초막절(민29:12- 34), 초막절의 제 팔일(민 29:35-38) 에 드렸다. 또한 나실‘인의 서약 때(민 6),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했을 때 드리는 속죄제와 함께 드렸고, 가난한 자의 속죄제와 함께 드렸다(레 5:7-10).
번제를 드릴 때는 소금, 유향이 첨가되고 소제와 함께 드려졌다. 규정된 제물로는 홈 없는 수컷인데, 수소, 수양 및 어린 양이 드려졌고, 정결을 위해서는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등도 사용되었다. 매일 드리는 번제는 조석으로 두 마리의 어린 양올 드렸고, 안식일에는 두 마리의 어린 양이 추가되었다.
부산물로 피는 제단 주위에 뿌리고 역통과 비둘기 깃털은 단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버렸으며 기름과 기타 것은 불살랐다. 번제의 절차가 레위기 1장에 자세히 설명되었다.
레위기 서명
1-2: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셰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애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 지니라 레위기의 서두가 신명인 여호와로 시작된다. 히브리어로는 야훼로 부르는데(영어의 Jehovah), 이것은 하나님의 개인적 이름으로, 레위기 전체에 사용되고 있다. 이 명칭은 "존재하다, 존재하게 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은 사물이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뭇이다. 사람이나 일이 이루어지고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이 그 유명한 언약의 하나님 또는 구속의 하나님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주님은 우리 인간이 존재하게 하시는 동인이요 삶의 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좋은 인연과 사건을 일으키시고 역사와 우주의 주가 되신다.
여기서 죄인을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이것은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자비의 부르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매 장면마다 주의를 환기해야 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사명, 은총 그리고 대명에 대한 부르심이다. 주님은 부르시는 하나님인데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고 계신다.아담의 범죄 이후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황량한 시나이 반도의 바싹 마른 떨기나무에서, 마치 그 나무처럼 사람들에서 잊혀지고, 무용지물로 여겨지며 삶이 끝났던 것처럼 보이던 모세를 “모세야 모세야!” 라고 부르시면서 새 출발의 출애굽 대명을 부여하셨다. 이 역사의 하나님이 이제 인간 가운데 함께 거하시려고 장막을 치시고(tabernacled among us, 요1:14) 죄인을 부르신다.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 (출 25:8)도록 명하신다. 여기서는 그 지어진 성소의 회막(tent of meeting) 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회막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인데, 이것이 장막, 성막(tabernacle), 법막 또는 증거막(tent of testimony) (출 38:21; 민 9:15; 대 하 24:6) 등으로도 불리 어졌다. 나중에는 성소로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으로 발전되었다.
이방 세계에서는 신전으로 불리어 진다. 이미 성막이 완성되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영광의 광채로 나타나셨다. 회막에서 거하시며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인간 장막 가운데서 거하시며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신 주님의 모형이다(요 1:1-3, 14).
(요 1:1-3,14). 또한 제사에 관한 것은 하나님 의 뜻에 따라 주어졌으며, 구원의 방법과 제도가 다 신적 기원에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 공동체와 그 개인들을 의미한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이 언약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려 하는 자는 제물을 가지고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예물이란 말은 코르반(Corban) 인데, 그 의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하는 뜻의 “제물” 또는 “드려지는 선물"(LXX) 이란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물 중에서 가장 값진 선물인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간다. 제단에 받쳐지는 제물들이나, 첫열매, 십일조 및 기타 예물을 등이 물론 다 포함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코르반 사상을 책망하신 적이 있다(막 7:11). 생축 중에서란 야생 동물이나 사냥한 것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소, 양, 그리고 염소 등의 네 발 가진 짐승을 주로 말한다. 이는 소유물 중 최선의 것 제일 좋은 것을 드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소유물 중 눈 먼 것이나, 저는 것, 병든 것 등을 드려서는 안 된다(말 1:8). 이러한 짐승들은 피가 있고, 그
피는 구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은 희생을 당하신 제물이셨고 그분의 삶은 우리 죄인을 위한 대속의 생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죄로 속하는 희생 제물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탄생도 바로 이러한 짐승들이 거하는 외양간에서 출생하셨다(눅 2:7).
번제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번제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의 “올라가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제물을 불태울 때 그 연기와 향기가 위로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뭇이다. 70인역 구약 성경 (LXX)에는 “전체” 또한 “전부를 다 태운다” 라는 의미의 호로카우토마 이다.
고대 세계에서 짐승들 중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제의용으로 우선시 되었고 이들은 우유 식육 및 가죽 등의 용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었다(TDOT. 2:209-216). 제물 선택에 있어서 주의점은 흠 없는 수컷을 지정한다. 제물은 출생이나, 질병 혹은 사고 등 어떤 것에 의해서든지, 흠이나 결정이 없어야 하며, 짐승의 외형이나 모습이 정상적이어야 하고, 그 신체 부위의 기능이 건전한 제물을 말한단. 전형적 결함들은 눈먼 것, 종기나 괴혈병이 있는 것, 지체가 더하거나 덜한 것, 불구된 것,
및 불알이 상한 것 등이었다. 이런 원칙은 약한 것, 몰골 사나운 것이나 저는 것 등 짐승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은 이에 해당되었다. 여하한 결함이 없는 짐승의 자유는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조화되었다.
수컷은 힘의 상징이었고, 고대 세계에서는 수컷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정성의 상징으로 이것이 쓰였다. 이것은 대표성을 내포한다. 마치 아담이 사람으로서 남자와 여자를 말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남자가 사람의 대표성으로 불리어 졌던 것과 같다. 이는 성적 차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대한 수컷의 대표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암컷은 번식과 젖의 생산용도로 활용되었기에 많은 숫자가 필요했다.
흠없는 짐승은 하나님의 인격의 완전성과 거룩성에 부합되는 성격의 제물을 바친다는 뜻이다.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흠없고 점없는 완전한 희생제물이셨다(히 9:14; 12:12-24). 그래서 제사에 쓰이는 모든 짐승은 완전한 것이 되어야 했다. 고대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에게 가져오는 희생 제물들은 심장이 건강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 짐승을 잘라서 등뼈 있는데 까지 열어 보아 제물의 완전성을 확인하였다(Mss 42, 1901). 완전하신 희생 제물의 원형(antetype) 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올 상징하도록 제물의 무흠 여부를 가리는데 극도의 주의를 기울였다.
열납하다는 말은 “좋아하다” “기쁘게 여기다” 는 의미로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기뻐하는 하는 데 이 말이 사용되었다(잠 3:12). 하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의 희생을 받으시고 헌제자는 죄용서를 받고 정결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는 자가 전심전력으로 정성을 다하여 드린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죄악의 성향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기꺼이 받으시는 산제사로 드려지도록 권고한다(롬12:1 -2).
안수와 속죄
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지니라
제물로 드려지는 제사의 순서가 시작된다. 안수한다는 말은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신과 희생제물을 동일시하고 그 제물의 머리에 전 체중을 기대듯이 하면서 죄를 제물에 전가(impute)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제물에 의지한다는 의미이고 그 제물의 희생을 통한 속죄의 은총을 받아들인다는 대속의 뜻이 있다. 안수에는 반드시 제물을 드리는 자의 손을 얹는 것과 또한 죄용서와 회개에 대한 기도가 있었다. 인간성의 악성과 무가치성을 고백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했다. “오 주님, 저가 그릇 행하였습니다. 저는 ... 로 범죄하였습니다. 저는 회개합니다. 이것이 저의 속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식으로 자백하면서 속죄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문이나 시편을 읊으면서 드렸다(시 40,51, 60편 등). 이는 전심으로, 전 체중으로 의지하듯이, 또한 일편단심으로 주님의 자비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었다(THAT, 2:160-62).
여기에는 자신과 동일시 된 제물의 죽음을 통해 범죄의 심각한 결과와 속죄의 은총을 깨닫는 과정이 되었다. 범죄한 사람이 불살라져 죄 값으로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 대신 속전으로 자신을 대신해서 제물이 대신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개와 죄 용서에 대한 믿음으로 죄와 부정 및 불결을 희생 제물로 옮기는 것이었다. 고대 히타이트(Hittite) 문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전가의식이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는 이러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바라보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어 있었다. 본 레위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주로 그 절차와 방법에 관해서만 기록해 놓았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피흘림 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히 9:22), 안수받은 짐승이 피를 흘림으로 안수한 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 그리하면 경납되어 속죄가 된다고 했다.
속죄라는 말은 카파르인데 “덮다” 혹은 “(생명에)대해 속전을 지불하다”라는 의미가 였다 또 의식적 의미에서 ‘정결하게 하다“란 뜻도 있다 죄용서란 짐승의 죽은 피와 제육이 불타면서 그 연기가 올라가고, 향이 올라가서-하나님의 면전을 가리고, 죄를 덮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 대신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덮어지고 가리움을 받고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죄인을 위하여 속죄가 된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진리이다. 모든 제사마다 이러한 대속의 진리가 내재되어 있다.
제물은 죄인을 위한 대속의 희생으로 하나님께 열납되었고, 죄인은 그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냐님께 열납됨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속죄는 그 효능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반면, 모든 제물들의 실체가 되는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10:1-3).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을 죽음을 그분께서 대신 당하셨다. 제사의 요체는 제물이 죽음으로 인한 피와 그것이 상징하는 속죄에 있다.
피뿌림과 제사장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판에 뿌릴 것이며
여호와 앞에서란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장소인 번제단 곁을 의미하고, 수송아지 짐승을 잡는 다는 것은 죄에 대한 속죄는 피흘림이 있어야 하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결심을 촉구하는 의미가 있다. 민족을 위한 매 아침과 저녁의 희생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죄의 결과는 죽음인 것을 감명시키는 것이었다. 안수 후 희생제물을 잡는다. 여기서 짐승을 잡는다는 말은 종교 의식적으로 짐승의 목을 잘라 피를 받아 제물로 쓴다는 뭇이다. 여기서는 제물을 잘라 죽여 그 피를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제사장이 가져다가 회막문 앞 제단 사면에 뿌리라고 했다(m. Tamid 4.11; b. Zebah. 5.3b). 속죄 란 말의 뜻처럼 탈무드에는 피가 제단에 닿을 때에는 언제든지 제물을 드리는 자의 죄가 속하여 졌었다고 했다.
피는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오직 제사장만이 다룰 수 있었고, 그는 사발에 담아서 응고되지 않도록 저으면서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의 사면에 뿌렸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제 2성전 시대에 제사장은 제단의 북동쪽의 모퉁이에 가서 피를 제단의 두 면에 뿌렸다. 그리고는 남서쪽 코너에 가서 제단의 다른 양면에 뿌림으로서 단 사면을 피로 뿌렸다.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부었는데, 이 피 의식(blood rite)은 제물의 생명이 하나님께 부어졌다는 뭇이다(m Tamid 4.1).
제사장이란 말도 원래 셈 (Semitic) 언어에서 "남의 일을 대신해 주는 자. 중보하는 자, 도와주는 자” 이다. 이 말은 신약에서 우리의 죄와 죄값을 대신 지시고 지불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히 7:11-18). 구약에서 하나님과 죄인들 간의 모든 문제를 도와주었던 분이 제사장이다.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용서와 은총을 구했던 직분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 사역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려야 한다. 이제 성도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벧전 2:9). 제사장들처럼 성도들은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윈화연 제사장적 중보 사역을 감당할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제단이라는 말에는 짐승을 도살하는 장소라는 뜻이 담겨 있다(mizbeab).
이 말 자체가 바로 죄용서를 위해서는 짐승의 죽음을 전제로 한 말이다. 제사장이 죄인의 죄가 전가된 피를 가지고 제단에 뿌림으로써 속죄가 이루어진다.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만이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림으로써 피를 통한 생명의 죽음이 속전으로 드려졌음을 보였다(출 12:13). 탈무드에 의하면 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제단의 북동쪽과 남서쪽 두 모서리 안쪽에 뿌려서 단 사면에 닿게 했다.
가죽 벗김과 각 뜨기
6: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것이요
희생제물의 가죽을 냉기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오직 번제에서만 나타나 있고 이것은 예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7:8). 후에 이 일은 레위인들의 도움을 받아 제사장들이 이 일을 했다(대하 29:34; 35:11).
짐승의 내장을 꺼내고 제물의 가죽을 벗긴 뒤 뼈마디와 부위 별로 조각을 내어 다 태울 수 있도록 했다. 제물을 여러조각으로 잘라서 가지런히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했으며, 고기가 빠짐없이 잘 타도록 했다. 이것은 온전한 희생과 전적인 헌신을 상징했다. 미슈나(Tamid 3:1; 4:2-3; Yoma 2:3-7)에는 제물의 신체 부위를 절단한다는 언급이 있는데, 부분별로 골고루 절단했다.
이 말의 뜻은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이다(딤후 2:15). 제물의 몸을 각을 내었던 것처럼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해서 이해가 되도록 해야한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리라" (마 13:52)고 하시면서 진리를 잘 분별하도록 권고하신다. 조각조각 내어서 죽어가며 고통 중에서 산화되는 제물의 모습에서 죄를 위해서 대속하는 제물의 희생을 느끼고 죄의 악함을 절감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가죽은 번제 희생물의 각 부위 중 유일하게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이었다(레 7:8).
제단의 불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단 위의 불은 한나님께서 친히 점화하신 불이었고 그 불씨는 절대로 소멸되지 않고 계속 타야만 했다(6:12,13). 이것은 불씨는 거룩한 목적만을 위해 성별되어 있었다. 일상적 용도에 이 불이 사용될 수 없었고, 또한 보통 불이 성소 봉사에 사용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성소의 향단이나 등대에는 항상 번제단의 불로 점화되어야 했다. 후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으로부터 점화된 불이 아닌 다른 불로서 분향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레 10:1,2).
이 불은 계속 타도록 아침과 저녁에 제단의 노에 주로 무화과나무 장작이 첨가되고 제물이 불사르어 졌다 유대 전승 에든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는 금지되었다고 했다 벌레 먹은 나무나 곤충에 의해 상한 나무는 거부되었고, 제사장들은 일 년에 수 차례에 걸쳐 나무를 모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일부 제사장들은 나무들을 면밀히 검사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성과 완전성을 백성들이 교훈받았다. 광야에서 점화된 이 불은 솔로몬 성전의 멸망시까지 1,000여 년간 계속 유지되었었다. 계시록에서는 한 천사가 제단에서 불을 다스리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계 14:18).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 행위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에 근거해야 되고 위에서 온 성령의 불에 의한 감화와 은혜가 있어야 함을 볼 수 있다. 신앙 행위의 모든 기초는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에 의지해야 됨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RH. 1896. 9. 26). 이 문제에서 인간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앞서갈 때 즉 자신의 행위나 행함의 의를 강조할 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 먼저된다(마 19:30). 이것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신 5:32;
28:14; 수 1:7; 23:6) 건전한 신앙의 도이다.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서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레 6:13).
제단 위의 불태움
8: 아론의 자흔 제사장들은 그 픈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윗 불 위에 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여기서도 짐승의 모든 부분들이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단윗 불 위에 올려놓아졌다. 모든 일은 “적당하게 질서대로” 행하여야 함을 볼 수 있다(고전 14:40). 단 위에 불사르는(카타르) 것은 보통 불에 태워 없애는, 또는 진 밖에서 불사르는 의미(사라프)가 아니라 태워서 향기를 올린다는 속죄적 불태움의 제의 전문용어이다. 즉 제물의 타는 냄새와 향기가 하나님의 면전을 가리워 죄를 가린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의 공로, 곧 보혈의 공로가 우리 죄인의 죄와 허물을 덮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머리와 기름이 특히 언급된 것은 머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했기 때문이다. 머리는 가죽을 벗길 때 절단되었고, 짐승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은 단 위 머리 상처를 덮도록 놓아졌다고 말해진다(m Tamid 4.2ff). 제물의 각 부분들은 그 짐승이 살아 있을 때 서 있는 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배열되었다고 한다.
화제: 불사름
9: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채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째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제 의상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먼지와 배설물은 제단을 더럽히기 때문에 제물을 정결하게 했다. 내장의 소화되지 않는 내용물을 비워서 제단을 더럽히지 않도록 했다. 그래서 먼저 내장과 다리는 물로 씻은 다음에(출 29:17) 번제로 제단에 올려졌다. 이것은 제물의 청결과 순결을 나타내고 있고, 하나님의 거룩성과 조화되며, 무질서와 불결한 것은 거부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일은 제물을 드리는 평신도가 한 것처럼 보인다.
짐승이 타는 것, 심지어 내장이 타는 것은 결코 좋은 냄새가 아니지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구속의 도리를 가르치고,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제물이 타서 연기와 냄새를 진동시킴으로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의 면전을 가리울 때, 그 제물은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향기로운 대속으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그것을 드리는 자를 대신하여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냄새는 사람의 기억을 회상시키고 개인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준다. 이런 식으로 제물의 냄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언약을 회상시키고 제물을 드린 자를 가납하신 다는 것이다. 화제라는 것은 불로 태우는 제사라는 것인데 제사의 한 방법을 가리킨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것은 정해진 규례에 따라서 믿음과 순종 그리고 헌신의 자세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뜻이다(고후 2:15; 빌 4:18). 이로써 죄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졌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에는 화목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죄인들의 죄에 대한 죽음의 값을 지불하신 완전하신 제물로서 자신을 드리신 주님의 공로를 나타낸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 섰다(엡 5:2).
양과 염소의 제사
10-12: 10 만일 그 예물이 때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 그가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변에 뿌릴 것이며 12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 머리와 그 기름을 베어 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윗불 위얘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속죄제의 제물 중 두 번째의 것은 양이나 염소의 경우이다. 제물을 드리는 자의 형편이 소에 미치지 못하거나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에는 양이나 염소로 대신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컷이며 흠 없는 짐승이어야 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모든 사람이 어떠한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데, 개인의 형편과 처지 (4:22-28; 12:8)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구약에는 양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다. 종종 어린양으로 나타나 있다(레 12:6; 23: 12; 민 6:14; 28:3). 염소도 허용되었지만, 번제로 언급된 경우가 거의 없다. 이것은 속죄제의 제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4:23,28).
양이나 염소의 제사는 소와 마찬가지로 제의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비록 안수, 피를 옮기는 것, 제육의 가죽을 벗기는 것, 불을 지피는 것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것들이 암시되어 있고, 속죄의 개념이 여기에서도 나타나 있다고 본다.
안수하고 죄를 고백하며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받아서 제단에 뿌리고 제육을 태움으로써 번제로 드렸다. 희생을 잡는 장소는 북면이었다.
헌제자가 짐승을 북편에서 잡으라고 언급되는데, 성소의 입구가 동쪽이고 제물을 씻는 곳은 서쪽에 대야가 있었다. 남쪽은 제단에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래서 북쪽이 도살장소가 된다. 큰 짐승의 도살 장소로는 제단에 오르는 계단 옆(남쪽)이라는 제 안도 었다(Noth).
새의 번제
14-17: 14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15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그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고 피는 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 멱통과 그 더러운 것은 제하여 단 동편 채 버리는 곳에 던지고 17 또 그 날개자리에서 그 옴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단윗불 위의 나무 위에 살라 번제를 삼을지나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만약 제물을 드리는 자의 형편이 양이나 염소에도 미치지 못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새로 제물을 대신하도록 자비로운 규정을 마련해 주셨다. 유대 전승에는 비둘기는 다 자란 것이고, 집비둘기는 어린것이었다고 한다. 이 짐승들은 히브리인들이 집에서 기른 새였고(왕하 6:25; 아 2:12) 누구나 잡을 수 있는 가장 흔한 새였다. 이것들만이 번제로 규정되어 있다. 짐승의 암 . 수 구분이나 무흠의 언급이 없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권고하시는, 인자의 형편을 고려하시는 자비로운 주님의 관심을 볼 수 있다.
새들은 작기 때문에 안수하지 않고 머리를 비틀어 피를 제단에 뿌렸다. 벽통과 더러운 것들은 제사장이 제거하여 성소 입구에서 떨어진 동편의 제단의 재버리는 곳에 버렸다. 제단의 재는 제단의 제육이 탄 후에는 두껍게 밑으로 싸였고. 후대에는 이것이 진 밖의 이곳으로 옮겨졌다가 기드론 골짜기로 다시 버려졌다.
새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의 효험은 헌제자들이 소나 양, 그리고 염소를 드리는 것과 동일하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 로 여겨졌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다짐하고 번제의 요구를 이행하는 부담에서 동일한 기회를 향유했다. 하나님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한 모습이다.
신약시대에서는 가난한 처지의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셨다. 그분께서 가난한 과부의 두 랩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 (눅 21:3) 다고 칭찬하셨는데, 가난한 자의 처지를 고려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구속 사관
번제는 신약에서 주님의 십자가 상에서 죄인을 위한 죽으심이 바로 이 제사의 성취이다. 구약의 제물이 완전했던 것처럼 그분께서도 완전하셨다(벧전 1:18-19).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있어서도 그분께서는 무흠하셨다. 이 면에서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구약의 죄 용서를 위한 언약제도에서 드려진 어떠한 짐승보다도 더 탁월한 제물이 된다(히 9:23- 26). 십자가의 제단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다(롬 8:32). 번제물의 제육과 기름이 타서 하나님께 대한 향기로운 냄새를 올렸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대한 향기로운 제물이었지만(엡 5:2), 구약에서처럼 제물을 자주 드리는 것과는 달리 그분의 죽으심은 단 한번으로 영원히 드려졌다. 즉 죄인을 위한 충분하고도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물로서 대표성을 지닌 단 한번의 죽으심이다(히 9:11- 14).
그분의 십자가에서 죄를 위한 대속적 죽으심으로 인한 율법의 완성은 구약 희생제도의 제물의 죽음을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상의 대속적 죽으심의 공로로써 죄인들은 더 이상 구약 시대에 매일 드려졌던 바 손으로 만든 성소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게 된다(히 7: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들을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1-14). 비록 짐승 제물을 매일 드릴 필요는 없지만, 신자들은 구약에서처럼 매일 속죄의 은총을 누려야 한다. 구약에서는 자신이 기른 가축이나 새(비둘기)를 제물로 드렸지만, 신약의 신자들은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드린다. 제물 대신에 자신을 영적 제물로 바친다(벧전 2:5). 감사, 선행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소유물을 나누는 헌신의 삶을 살 때, 그것은 바로 구약적 의미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의미가 된다(히 13:15-16). 이러한 희생을 전심으로 드릴 때, 그의 희생은 하나님께 가납된다. 이러한 가납은 신 . 구약에서 동일하다.
바울은 이러한 번제 희생을 신자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 적용한다(롬 12:1, 2).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제물은 번제이다. 마치 구약에서 제물이 제단에 온전히 바쳐졌던 것처럼, 신약에서 신자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물이 완전했던 것처럼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산 제물로서의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계속적인 기쁨이 되는 것이다.
교훈과 적용:
1. 번제는 예수님의 죄인을 위한 속죄와 그분에 대한 허신과 충성을 상징하는 제사이다. 이 제사는 민족을 위하여 조석으로 늘 드린 제사인 상번제였던 것처럼 구원과 속죄의 기회가
인간에게 항상 열려 있음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인가!
번제단의 불이 항상 타고 꺼지지 않도록 극도의 주의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제사는 한 시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속죄의 공로와 대속의 은총을 누릴 기회를 항상 열어 놓고 계심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2 하나님의 계획에는 항상 개인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하신다. 사정이 어려워 제물을 드릴 처지가 되지 않는 경우나, 제물을 드릴 시간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도,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3. 죄인이 전 체중을 제물 위에 기대듯이 안수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 오직 주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여야 한다.
4. 희생 제물로 상징된 주님의 피흘림과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가려지고, 하나님의 죄에 대한 형벌을 가리우게 된다. 여기서 오직 십자가의 보혈이 신앙 행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5 죄인을 대신하여 짐승의 뼈가 잘라지고 살이 조각나며, 불길에 사르어 지는 것; 절망의 가련한 모습, 고투, 슬픔의 전율 등 ... 삶의 기쁨, 희망, 평화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길 속에 태워 없어져 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희생을 보여 준다. 희생의 칼에 죽은 짐승처럼 온 몸이 상하고, 전신이 피로 뒤덮이며, 찢어지고 또 심장이 파열되어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영원한 형별의 불길 속에 사라지셨던 주님을 나타내어 준다.
6. 죄인을 대신하여 죄값을 지불하신 제물로서 보혈을 흘리시고 돌아가신 주님은 피흘리심의 공로로 부활 승천하셔서 대제사장으로 지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7. 우리 각자를 위하여 주님이 치르신 구원의 값을 헤아려 보고 하늘이 기울이고 있는 무한한 관심과 돌보심, 그 다함이 없는 은혜를 잊지 말자.
8. 번제물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고 전 생애가 지속적 사랑의 제사가 되도록 하자.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번제단의 제물처럼 온전히 주님께 복종시키고 전적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자. 그리고 더욱 교회를 희생적으로 영흔 구원에 전 삶을 드리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몽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