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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믿음
빌립보서 4:10~ 13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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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최초로 유럽에 세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교회 교인들과 바울 사도는 아주 좋은 관계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빌립보 성경을 쓰는 장소는 로마 감옥입니다. 그래서 왜 쓰게 되었는지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과거 자신들의 담임 목사 바울 사도가 고난당할 것을 생각하고 헌금을 했습니다. 위로금을 가지고 그 멀고도 먼 로마까지 찾아가서 바울 사도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불편스러운 면을 정성껏 돌봐드리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빌립보 성경은 거기에 대한 보답편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이 편지 내용을 보면 바울 사도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감사하면서도 혹시나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를 많이 신경 쓰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나는 배고픈 일, 배부른 일,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내 형편이 좀 곤란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나는 넉넉히 잘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도와 약속을 했습니다.
“비록 우리와 헤어질지라도 이곳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목회해 주시던 바울 선교사님을 우리가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그렇게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좋은 약속을 교회가 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감옥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옛날의 약속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돕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 편지 내용입니다.
여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이 있노라.”
아무 걱정 없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기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말을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살피면 우리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희망이 있습니다.
성취 의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얻고 싶은 어떤 목표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얻어질 때까지 헌신의 노력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름답고 발전적인 여러 가지 동기를 부여하면서 누구나 그렇게 살라고 권고하고 나 자신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교육은 진리 탐구의 인간 노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교육이 있는 나라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을 창조했고, 교육이 뒤떨어진 나라는 삶의 질이 떨어졌습니다.
과학이 아닌 것은 다 미신으로 취급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만이 인간 향상의 도움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목표가 항상 두 가지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이고 하나는 육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영적인 목표를 어떻게 가르치셨느냐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내 신앙을 곧 하나님화하라.” 이렇게 가르치셨고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푯대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다.” “그래서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화 할 때까지 그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노라.”
하나의 영적 능력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나름대로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목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피카소같이 되려는 미술가도 있고 링컨 같이 되려는 정치가도 있고 테레사 수녀같이 되려는 종교인도 있고 록펠러같이 되려는 사업가도 있습니다.
다 아름다운 목표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이나 육신적인 것이나 이 세상의 어떤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공개된 도움의 몇 가지 자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결과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긍정적 사고라고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됩니다.
나쁜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인류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파멸과 죄도 사람 생각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결정되도록 되어 있으니까 항상 나에게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를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사고의 방법입니다.
둘째로, 그렇게 생각했으면 말을 긍정적으로 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얼마든지 나옵니다. 입에 불평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200만의 인구가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갑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민족 이동을 시키라고 해서 모세가 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성경에 끊임없이 나오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여 가로되”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원망이 입에 붙은 그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다 죽을 때까지 4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다 죽은 다음에 광야에서 출생된 신세대만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고 계십니다. 단 예외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부정적 감정에서의 탈피! 안될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 문제의 치료 방법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축구 선수들도 명상하는 것을 보면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정성껏 정자세로 앉아서 생각하라는 겁니다. 무슨 생각? 승리할 생각만 하라는 겁니다.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부정적 감정에서 탈피해야만 성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명상을 통해서 정신집중력을 키우는 치료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요즘 이런 것도 나왔습니다.
웃음치료!
안 웃는 것을 보니까 모르시는가 보네요.
이런 모든 일들이 다 마인드컨트롤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겁니다. 날마다 안 될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안 됩니다. 말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이 성취합니다. 예수님도 보세요. 항상 하신 말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를 계속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정신통일입니다. 다른 생각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잡념입니다. 잡념을 버리고 집념을 가져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럭저럭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자기가 사역하는 한 가지 역사를 위해서 집중적인 생각을 하고 집중적인 투자를 합니다. 성취하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은 다 그렇게 삽니다. 쓸데도 없는 이것저것 동네 참견 다 하고 돌아다니고 괜히 이것저것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잡념을 버리세요.
그 다음에는, 타인을 볼 때 좋은 점을 보면 그것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멘토링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어떤 사람의 장점을 내가 닮으려고 노력하면 결과적으로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효과가 있어서 하는 겁니다. 멘토링을 두고 또 나에게도 멘토링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화 하라! 어떤 사람의 좋은 점을 보고 ‘아! 저 사람에게 저런 장점이 있구나. 나도 저래야지.’라고 좋은 점을 바라보고 흠모하면 나도 모르게 내가 그 사람화하는 영적 능력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결론은 뭐냐?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준비된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성경에 조명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약속의 가나안 땅 정착은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들이 있었지만 마침내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정착이 완성되었잖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약속하시더니 온 세상이 지금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네 왕권이 영원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왕국의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이미 계획한 것이 있습니다.
그 계획은 절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 쓰임을 받게 되는데 한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하신 그 일과 내가 나에 대해서 계획한 일과의 차이에서 생기는 갈등입니다.
요나를 보세요.
하나님이 계획하셨잖아요? 니느웨로 보내서 “12만 명의 영혼을 구하라.” 요나가 “내 계획과 정 반대입니다.”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런 문제가 우리들에게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예수님과 열두 제자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가 가려는 길이 예수님이 가라는 길과 정 반대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기대에 어긋났습니다.
무엇이 기대에 어긋났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 사건에 모든 신비로움을 보고 놀라서 예수님을 따라나서길 참 잘했다는 자기 판단을 했는데 예수님이 하셨던 일의 내용은 언제나 최선과 차선의 길이 있었는데 제자들은 최선의 길을 모르고 차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또, 본질과 비본질이 있는데 제자들은 언제나 비본질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 차이가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세요. 어느 날 예수님이 부흥집회를 인도하시니까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 하면 남자만 5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자들, 아이들 다 합치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기분이 좋으셨는지 하루 종일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좀 짜증스러워졌습니다.
“이제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어가나이다. 하루 종일 설교만 하시면 어떡하나이까? 사람들이 배가 고프나이다.”
“그러면 먹을 것을 주면 될 거 아니냐?”
“이 많은 사람이 먹으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한데 돈도 없거니와 있다 하여도 어느 음식점에 가서 1만 명의 음식을 주문해서 나눠 먹이겠습니까? 해결 방법은 빨리 해산시켜 집으로 보내소서.”라고 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 아닙니까?
식량이라고는 어린아이가 자기 한 끼 식량밖에 가지고 온 게 없는데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아서 12바구니나 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제자들은 뭘 봐야 합니까?
본질을 봐야 합니다.
“이 분이 누구야? 하나님이잖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나사렛 예수가 했잖아? 메시야여!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본질을 못보고 “어? 먹었잖아? 그러면 우리가 배고플 때 항상 먹여줄 수 있잖아?”
비본질적인 것을 보고 그래서 차선을 선택하죠?
성경에 보세요.
이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는 목적이 “이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요 영생의 구원자”라는 것이 아니라 “떡 먹기를 바라고”입니다.
사실 2천 년 전 유대 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서 다 굶어죽는 판이었습니다.
그러한 판에 예수님은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시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예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차선책, 예수가 행하신 먹는 것을 만들어주는데 관심이 있어져서 “어? 경제발전? 간단하다! 금방 되었잖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기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먹는 것은 해결이다. 오늘 우리가 실제로 경험했잖아? 잘됐다.”
그 다음으로 인간은 아무리 배부르게 먹어도 또 고난이 따라옵니다.
병나는 겁니다. 이것을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종류는 지금 21세기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들입니다.
문둥병 고칩니까?
제가 소록도에 5번이나 가서 집회했습니다. 거기서 15년 동안 목회하신 목사님을 보고 내가 “당신이 있는 15년 동안 이 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문둥병이 치료가 되어서 나간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말로는 난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간질병, 앉은뱅이,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중풍병…. 지금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현장에서 이 사람들을 다 치료해주셨잖아요?
그 자리에서 다 나았습니다.
그러면 그 현장에 있는 제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예수의 본질이 뭐냐? 메시야! 하나님의 창조성에서만 가능한 일이 지금 이 현장에서 이루어졌으니 이가 누구냐?”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이거 봐라! 고쳐주었잖느냐? 우리도 병 나을 거 아니냐? 예수님을 따라다니자. 배부르게 먹고 건강하게 살고 일차적 요구가 다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 다음에 인간은 배부르게 먹고 건강하게 살아도 또 고난이 따라옵니다.
천재지변은 어떡합니까?
1월 17일(January Seventeen)이라고 하면 LA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압니다. 그 날 새벽에 지진이 났거든요.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건축 공법을 자랑하는 LA의 고속도로나 건물들이 털석털석 다 무너졌습니다. 불과 10초 흔들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새벽기도를 인도하러 나갔는데 교회가 흔들리니까 양쪽의 화분이 덜커덩 넘어가서 데굴데굴 구르고 깨지고 강대상이 흔들리고 교인들이 저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무리 배부르게 먹고 경제 발전하고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땅이 꺼지는데 어떡할 겁니까?
옐로스톤에 불났을 때 담뱃불 하나 던진 것이 세상에서 제일 큰 아름다운 공원을 불태워 가는데 경기도만 한 크기의 공원이 회복되려면 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불이 나서 다 타들어가니까 미국 사람들이 막 항의를 하는데 “달나라를 정복한 미국이 불하나 못 끄느냐?” 막 야단치고 그러는데 수천 명의 소방대원, 수백 대의 헬기가 동원되어도 안 됩니다. 두 달 동안 탔습니다. 결국 9월이 되어 하늘에서 눈이 한번 내리니까 싹 꺼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천재지변은 일어났습니다.
광풍이 불었잖아요? 갈릴리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는데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아열대 기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상이변입니다. 이것이 지나간 자리는 남아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광풍을 텍사스에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여, 이렇게 위급한데 주무시나이까?”
예수님이 깨서 보니까 정말이거든요?
“야! 정말이구나.” “죽게 되었나이다.” “바다여, 잔잔하라.”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봐야 됩니까?
“이가 뉘기에, 하나님이시잖아.”
거기서 그들은 살아계신 메시야성의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발견해야 되는데 못 봅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천재지변도 괜찮아. 예수님이 이렇게 다 조용하게 하니까 아무것도 걱정 없어.” 그리고 자기들의 살아갈 길에 대해서만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공통적 민족 고난이 있습니다.
식민지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 예수님은 날 때부터 왕 개념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또,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예수님, 빨리 왕이 되소서. 저 꼴 보기 싫은 빌라도 빨리 치워버리고 왕권의 자리에 앉으소서. 그리고 이 나라를 다스리소서. 언제 왕이 되시나이까?”
제자들은 그때를 기다리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나?’
살로메라고 하는 여자는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왕이 되실 때 나의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
그랬더니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히 여겨서 “아니, 저것은 내가 맡아놓은 자리인데 저 놈들이….” 막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한심해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가 가는 길은 정 반대의 길이니 크고자 하는 자는 작아지고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그 길은 정 반대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조금만 있으면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올라가시고 우리는 그 주변에서 국무위원이 되고 예수의 말 한마디로 빵이 다 생기니까 경제 발전된 나라에서 건강하게 살고 천재지변까지 해결하는 이 지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삶을 우리가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날 그들은 최후의 희망도 가집니다.
인간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도 마지막 고난이 있습니다.
죽는 겁니다. 살아있어야 경제발전이 나한테 소용이 있는 것이지 내가 죽은 다음에 경제 발전하면 뭐합니까?
이 죽음의 문제는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이것마저도 제자들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들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납골당에 장례해서 시체가 부패해서 썩어가고 있는 “냄새가 나나이다.”
그런 현장에 주님이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니까 나왔잖아요?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잖아요?
그때 제자들은 예수에 대해서 본질을 바라봐야 되지요?
“아니, 이가 누구야? 하나님은 부활을 주신다고 하더니 정말 부활이 가능한 거구나! 이야!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예수님 따라다니면 안 죽을 수도 있어 죽을 사람을 살려내잖아!”
제자들의 희망이 하늘까지 올라갔습니다.
“예수여! 빨리 선언하시고 왕위에 오르소서.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예수님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살겠습니다.”
그 찰나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선언하셨잖아요?
“나는 죽을 것이다.”
“네?”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마지막 길이다. 다시 오지 못한다. 많은 고난을 받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것이다.”
“아니, 뭐라고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 말 직후에 뭐라고 합니까?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다.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떡하란 말입니까? 지난 3년 동안 우린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이 되었다고 판단하는데 이제 죽을 것이라고 하시면 우리도 죽어야 됩니까?”
“그렇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 너희도 죽어야 돼. 그 길을 가게 하려고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교육시킨 거였어.”
“뭐라고요?”
제자들이 어떻게 했어요?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갑니다.
“틀렸어. 끝난 거야. 속은 거야. 얻을 것 아무것도 없어.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다는데 까딱하면 우리도 죽을 수 있어.” 다 도망가 버립니다.
바로 이 문제가 우리들에게도 옵니다.
“예수여!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내 목표는 이겁니다.”
“지금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시겠습니까?
우리 목회자들은 가끔가다 갈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여! 예수님의 사역은 초능력적 기적을 발하시면서 하셔서 사역을 그렇게 잘 하셨는데 그래도 반대파가 생겨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는데 오늘날 주님의 종 되고 사도된 자들에게 초능력을 안주시고 맨 탕으로 목회를 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기적을 베푸시던 능력을 주셔야지요?
그냥 손을 들어서 신종 플루여, 다 물러가라! 하면 싹 물러가야지 감기도 안 나으면 어떡합니까?
가난한 집에 가서 목사가 축복기도를 하면 그날로 복권에 당첨이 되어야 그것이 능력이지 주님은 다 능력 사역을 하시고 오늘날 사역자들은 그 능력을 안주실 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여러분, 목사가 되어보세요.
그런 생각이 나나, 안나나, 오늘 당장 “목사님! 내가 30대 중반인데 사형 선고입니다. 어떡하지요?” “그래요? 이리 오세요.” 기도해주면 “낫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갈등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문제를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여기 바울을 보세요.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감옥에 들어앉아서 지금 두드려 맞으면서 굶주리고 감옥을 나가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할 수 있으면 그 감옥을 때려 부수고 예수 복음을 핍박하는 로마를 명령으로 쓸어버려야 할 수 있는 것이지 잡혀서 감옥에 갇혀서 굶주리며 앉아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뭘 하겠다는 겁니까?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따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왜 감옥에 있느냐?”
“이때는 내가 감옥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이 시간까지 평생 주님을 잘 믿고 살았는데 왜 이 모양입니까?”
“그 모양이어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우리 마음속에 정착할 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화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적 능력을 인정할 때 믿음이 기쁘고 나의 현실이 자랑스럽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무당 종교만도 못하게 이것저것 나의 뜻대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야만 내가 하나님을 믿는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는 것은 무당 종교만도 못합니다.
교회 나오는 것보다 그럴 때는 무당 집에 가는 것이 훨씬 편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공이냐, 실패인가? 33살에 죄수라고 잡혔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세요.
매를 어떻게 얼마나 맞는지 피가 온 몸에서 그칠 줄 모르고 피 바다가 되는 예수의 모습을 봤잖아요? 성공인가, 실패인가?
십자가에 매달려 벌거벗겨 공개 처형당하고 가시관을 쓰고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 거기서 쓰러져 죽는 예수는 성공인가, 실패인가?
인간 편에서 보면 너무나도 불쌍한 실패자죠?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류 구원의 완성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성공했나, 실패했나? 인간적으로 감옥에 들어간 것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유럽의 저 찬란한 서구 문명은 기독교가 기초로 해서 바울이 시작한 겁니다.
지금 우리들도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성공했나, 실패했나?
인간 편에서 보면 실패자 같이 보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으로 돌아가면 나의 삶을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 진행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바로 우리 신앙은 이 수준에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가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게 있다면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뜻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모두 바울의 신앙을 본받으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