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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4기 – 주제로 살펴보는 요한복음>
제3과 배경 이야기: 서론(The Backstory: The Prologue)
<10월 12일/안>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선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무수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신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당시 유대인들이 듣고 있던 그 음성은 하나님과 더불어 배우셨던 분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실한 기품과 확증과 힘이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슴에 확신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온 기별이 능력이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초청을 애타게 기다리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무한하시며 전능하시다. 또한 그분은 영원하시며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께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 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2)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재림 때를 내다보신다. (높임, 17)
◎ “그[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에 명기된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인 영생을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신 말씀께서 이 생명을 갖고 계셨다. 육적인 생명은 누구나 받는 것이다.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취하시기 때문에 그 생명은 영원하거나 불멸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지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빌려 온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이 생명을 그분에게서 취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생명)를…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라고 말씀하셨다. 그분 안에는 독창적이고, 빌려 오지 않고, 다른 데서 기원하지 않은 생명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이 생명이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분[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동안 그분의 생명을 전지전능하신 분께 의존하셨다. 인성을 취하신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신성을 붙잡으셨다. 그러므로 인간 가족의 각 사람도 그렇게 할 특권이 있다. (마라나타, 302)
◎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가 반복하여 모든 설교에 분명하게 드러날 때 그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향유가 되며 그 진리의 광채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논쟁을 일삼고 그 계시의 권위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감화를 받지 못할 것이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 주제는 불신을 종식시킬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참으로 많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회자의 설교에서 예수가 빠져 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냐하면 이런 목회자들은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께서 거하시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과 노래에 관한 권면, 315)
<10월 13일/일, 태초에 – 하나님의 말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언급하는 한편, 그분의 선재성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말씀은 하나의 거룩한 존재로서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그 아버지와 연합되어 존재했다. 태초부터 그분은 언약의 중보자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민족이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축복을 주셨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인간과 천사들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배도가 시작될 것과 그 배도로 인한 기만적인 권세로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아셨다. 구원의 계획은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고 그들에게 또 다른 길을 주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때부터 중보자로 임명되었으며, 영세로부터 우리의 대리인이자 보증인으로 세움을 받으셨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으로 옷 입어야 한다는 결정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때가 찰 때까지 인간의 형상으로 오지 않고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베들레헴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다. (높임, 74)
◎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명확히 독립된 개체이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그분은 하늘의 뛰어난 영광이셨다. 그분은 하늘에 있는 지성적 존재자들의 사령관이셨으며 천사들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잠 8:22~27 인용)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일체라는 진리 속에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 진리는 어두운 곳을 하나님 본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므로 어두운 곳에 비추는 빛이다. 이 진리는 그 자체가 무한히 오묘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기에 불가능한 신비로운 진리들을 설명해 주지만, 그 진리 자체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불가해한 빛 가운데 숨겨져 있다. (화잇주석, 요 1:1-3)
◎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6). 이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주님께서 우리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이 영원한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빛의 광선처럼 증거되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미 5:1~2). (1기별, 248)
<10월 14일/월, 말씀이 육신이 됨>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그리스도]는 자원해서 인성을 취하셨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행위이고, 그분의 직접적 동의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분은 그분의 신성에 인성의 옷을 입으셨다. 그분은 항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 세계의 충성을 명하고, 칭송을 불러일으키는 신성을 가리우셨다.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도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 버리시고 그 대신 사람의 모양과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다. 그분은 한 인간으로 땅 위를 걸어 다니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는데 이는 그분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셨다. 그분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을 버리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잠시 동안 하나님 영광의 형상을 포기하셨다. 그분은 궁핍한 가운데서도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축복을 뿌리며 다니셨지만, 그분의 말 한마디면 여러 군단의 천사들이 그분을 호위하고 그분께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분이셨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지상에서 그분은 인정받지 못하셨고, 그분을 믿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화잇주석, 요 1:1~3,14)
◎ 사도는 그의 형제들 앞에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높였다. 그는 공간에서 세계들을 붙드시고 온 우주의 만물들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시고 끊임없는 활동을 주관하시는 손이 바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이라고 선언하였다. …
하나님의 아들은 타락한 인류를 들어 올리려고 자신을 낮추셨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을 사랑한 아흔아홉 양인 하늘에 있는 무죄한 세계를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받으셨다(사 53:5). 그분은 범사에 그분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 그분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다. 그분은 음식으로 원기를 얻으시고 수면으로 피로를 푸셨다. 그분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 되셨으며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오늘날의 남녀들처럼 유혹과 시련을 당하셨지만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부드럽고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사려 깊은 그분은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행적, 472)
◎ 아버지 영광의 광채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에 대하여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행 10:38),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었다. 그분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 하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실물, 416-417)
<10월 15일/화, 말씀을 듣거나 듣지 않음>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분은 초막절 예식과 특별히 관련된 성전 마당에 계셨다. 이 마당의 중앙에는 큰 등대들을 받쳐 주는 두 개의 높은 기둥이 솟아 있었다. 저녁 제사 후에는 모든 등에 불을 켜서 그 빛으로 온 예루살렘을 비추게 하였다. 이 예식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기둥을 기념하였으며 또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저녁에 불이 켜지면 마당은 큰 쁨의 장소가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사람들과 성전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악기 소리와 레위인들의 찬송에 맞추어 흥겨운 춤을 추었다.
예루살렘을 밝게 비추는 일로 백성은 그분의 빛을 이스라엘에 비추러 오실 메시아의 강림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 장면이 더 넓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성전의 밝게 빛나는 등불들이 저희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처럼 영적인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신다. 그러나 상징은 불완전하였다. 예수께서 손수 하늘에 두신 저 큰 빛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사명에 대한 보다 참된 상징이었다. (소망, 463)
◎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죄인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게 되며,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를 힘입을 때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며, 그 능력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품성에 역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어 받음으로써만 죄의 가증한 정체를 분별하게 되며, 마침내 죄를 영혼의 성전에서 쫓아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귀고 구원의 사업을 위하여 주님과 더불어 연합하게 되는 것도 오직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유하심을 약속할 만한지를 다루어 보시는 조건이다. 그것은 믿음 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치유제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의 믿음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의 범죄와 결함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회개한 영혼은 자신의 대치물이며 담보물인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그의 의가 됨으로 자신의 의롭다 하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기별, 366-367)
<10월 16일/수, 다시 나타나는 주제들 – 믿음과 불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가?” 그대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할 만큼 연약하고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영혼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가?” 추측에 의한 믿음은 의미가 없다. 그대는 그대의 개인적 구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있는가?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 안에 그 영혼이 거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그대가 믿음 위에 설만큼 현명한가 어떤가를 알아보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그대를 통하여 일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분은 믿음 위에 선 자에게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분의 고귀한 생명을 주셨고 그분의 유업을 바라는 이들의 언행과 행위 속에서 그분의 품성을 나타내시고 그분 자신을 표현하신다. (높임, 148)
◎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멸망하는 이유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그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모르기 때문에 정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였다. 그들의 영혼은 빛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태만하거나 거절한 것이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빛을 얻지 못하여 거절하지 못한 자들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위해서 행한 것 이상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으랴? 빛, 귀한 빛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비친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빛에 의해 구원받기를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빛에 맞게 살며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전달하지 않는다면, 그 빛은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필요한 것은 죄를 고백하고, 죄를 버리고, 주께로 돌아가는 개인적인 일이다. 이 일은 남을 위해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인 지식이 축적되었다면 이것은 그에 따르는 의무를 증가시킨 것이다. 큰 빛이 교회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안에서 행하기를 거절함으로 그들은 그 빛에 의하여 정죄를 받는다. 그들이 눈멀었다면 죄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빛을 보았고 진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슬기롭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다. 여러 해 동안 지식과 참 경건의 생활에서 진보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영적 난장이다. 그들은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대신에 애굽의 흑암과 속박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은 경건과 참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쓰지 않았다. (2증언, 123~124)
◎ 우리가 하늘의 빛과 함께 서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에녹도 이와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였다. 에녹이 의로운 생애를 산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로운 생애를 사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은혜와 거룩함으로 자라나기에 그 당시의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도 더 낫지 않았다.
에녹이 정욕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썩어짐을 능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한 근원에서 우리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우리가 충실한 에녹의 모본을 따르지 않는 한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까닭이다. (하늘에, 70)
<10월 17일/목, 다시 나타나는 주제들 - 영광>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본성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선재 속에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이셨을 때 가졌던 영광에 관해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의 기도는 중보 기도이다. 그분이 구하고 탄원하는 은혜는 그분이 하나님과 하나이셨을 때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휘장을 걷어버리라 그리고 나의 영광 곧 창세 전에 너와 함께 가졌던 영광의 빛이 비치게 하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모든 천사여, 그에게 경배할지어다”하고 선포하신다. 천군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기쁨의 노래, 승리의 노래를 소리높여 부른다. 영광이 하늘 왕을 두르고 하늘의 모든 지적 존재자가 그것을 본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실 때 자원해서 떠나셨던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하나님 아들로서 공적으로 복귀하실 때 있었던 그 광경을 말로는 묘사할 수가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중에 계시지만 그분은 우리의 형제요, 하늘 궁정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시다. (화잇주석, 요 17:5, 24)
◎ 오,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를 얼마나 갈망하셨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몸은 그분의 신성, 즉 인간의 희생을 통해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은 그분을 개인적인 구속자로 믿는 믿음을 통해 범죄자의 죄책감을 신성한 대속자의 죄책감으로 옮기셨다. 상징적으로 "진홍색과 같이 붉다"고 표현된 죄 많은 세상의 죄는 신성한 보증인에게 전가되었다. …
신성은 인성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증오와 복수로 고통받는 동안 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 달린 불쌍한 도둑의 기도에는 사방에서 들리는 기도와는 다른 어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믿음의 어조였고 그리스도께 도달했다. 그분에 대한 죽어가는 사람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귀에 가장 감미로운 음악과 같았다. 그분의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구속과 구원의 기쁜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This Day With God, 236).
◎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하도록 주어진 사업을 마치셨다. 그분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사업을 계승할 자들을 모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와 같이 신적인 권위를 지닌 자의 언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선택된 교회를 아버지의 팔에 위탁하셨다. 성별된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중재하신다. 충실한 목자로서 그분은 강하고도 확실한 피난처로, 곧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로 그분의 양 무리를 모으신다. 그분에게는 사탄과의 마지막 투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분은 이 투쟁을 맞으려고 나아가신다. (소망, 680)
<10월 18일/금, 더 깊은 연구>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보훈, 38–44).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들 주변에 있는 천연계에서 실례를 자주 듦으로 그분의 교훈을 흥미롭게 만들고 청중들의 주의를 이끄셨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창공으로 점점 높이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은 산골짝과 산의 협곡들 사이에 숨어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동녘 하늘의 노을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태양 빛이 그 찬란한 광채를 대지 위에 쏟아 놓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은 황금빛을 반사하고 장미빛 아침 구름을 잠그고 있었다. 꽃봉오리, 꽃,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이 모든 것이 이슬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천연계는 새 날의 축복으로 미소 짓고, 새들은 나무 사이에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구주께서는 앞에 있는 무리와 떠오르는 태양을 차례로 바라보신 다음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태양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줌으로 사랑의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아가 오류와 죄의 암흑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빛을 널리 비추어 주어야 한다.
주변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성읍들과 마을들이 찬란한 아침 빛을 받아 아주 보기 좋은 모습으로 단정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분은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라고 부언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와 어부였다. 그들의 초라한 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 방에 있는 등도 하나로 등경 위에 얹힌 채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었다. 예수께서는 이와 똑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일찍이 타락한 인류에게 비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구주 예수님이 죄로 죽어 가는 세상의 암흑을 비춰 줄 수 있는 유일한 빛이시다.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으로 이런 것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빛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생명을 받음으로써였다. 영혼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품성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이 그들을 세상의 빛이 되게하였다.
인간 자체에는 아무런 빛도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우리는 불붙지 않은 심지와 같고 태양을 등진 달과 같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흑암을 비출 수 있는 빛이 한 줄기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의 태양을 향하고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될 때, 온 심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빛으로 작열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단순한 빛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는 자신을 나에게 바쳤고 나는 너희를 나의 대표자로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요 17:18)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통로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광명의 대근원이시지만 인간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말라. 하나님의 복은 인간을 방편으로 하여 주어진다. 그리스도께서도 인자로서 세상에 오셨다. 신성과 연합한 인간이 인간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곧 주님의 제자 각 개인은 모두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하늘이 택한 통로이다. 영광의 천사들은 그대를 통해 멸망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과 능력을 전달하고자 기다리고 있다. 인간 대리자가 맡은 사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아, 그때는 세상이 그만큼 허락된 성령의 감화를 강탈당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빛을 비추기 위하여 분투하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단지 “빛이 비취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면 그분의 임재의 빛을 감출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능력이 그들에게서 떠나갔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비출 빛이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빛의 근원 이신 분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벧전 1:11)은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빛이 되게 하셨다. 요셉은 애굽에서 빛을 전달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순결과 박애와 효도를 통해 우상 숭배자들의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허락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들 가운데 진실한 마음을 지닌 자들은 주변 국가들에게 빛이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알려졌다. 바벨론에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하여 그리고 바사에서는 모르드개를 통하여 밝은 빛이 왕궁의 흑암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와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늘 가는 길에 빛을 비추는 자들로 세움을 받았다. 그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이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흑암에 둘러싸인 세상에 밝히 드러난다. 그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찬송을 받고 본이 되기에 합당한 품성을 지닌 하나님께서 우주의 보좌 위에 계신 것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불타는 거룩한 사랑과 생애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융화의 태도는 세상 사람들이 하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그곳의 탁월함을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 알고 믿”(요일 4:16)게 된다. 그리고 한때 죄와 타락에 빠졌던 사람들도 순결해지고 변화되어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 24절)로 나타나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는 구주의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범세계적인 사명을 맡기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이기심과 교만과 편견이 거룩한 말씀의 수호자로 임명받은 백성과 지상에 있는 다른 모든 민족 사이에 견고하고 높은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놓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이 구주의 입술에서 들은 말씀은 그들이 지금껏 제사장이나 랍비에게서 들은 말과 같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벽과 이기심과 민족 차별의 편견을 헐어 버리시고, 모든 인간 가족을 위한 사랑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이기심 때문에 달라붙어 있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모든 경계선과 사회의 모든 인위적 차이를 철폐하신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웃,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세상을 우리의 일터로 여기도록 가르치신다.
태양 광선이 지구의 가장 먼 구석까지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계획하신다.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리 주님의 목적을 성취할 것 같으면, 흑암과 죽음의 음침한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이 비치게 될 것이다. 한곳에 모여서 책임과 십자가 지기를 회피하는 대신, 교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천국 복음”은 곧 온 세상에 신속히 전해질 것이다.
메소보타미아 평원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 시대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부르시는 목적이 성취되려면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분께서는 “네게 복을 주니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라고 말씀하신다. 산상 설교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는 복음 선지자를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만일, 주님의 영광이 그대의 심령에 비치고, 그대가 “만 사람에게 뛰어나고” “온전히 아름다운” 분의 미를 쳐다보고, 그대의 마음이 그분의 영광의 임재 안에서 빛나기만 하면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말씀은 그대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된다.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산에서 본 일이 있는가? 그 아래 평지에는 사탄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믿음과 기도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명상할 뿐 아니라 그분의 탁월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다윗은 명상하는 동안 불이 타올라 자신의 혀로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명상하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음으로 놀라운 구원의 계획 곧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도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누가 상상할 수 있으며 또 이것을 보고 구주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시 29:9). 이스라엘의 종교 시인은 거문고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시 145:5~6)라고 말한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사람들 위에 높이 들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모든 영적 기능은 하나님께 직접 받는 거룩한 능력으로 충전될 것이다. 또한, 주님을 위한 진실한 사업에 힘을 집중시키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일꾼들은 이 땅을 밝히는 산 대리자로서 세상을 향해 광선을 내뿜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 헌신하는 모든 인간 대리자를 참으로 기쁘게 받으신다. 그분께서는 성육신(成肉身)의 사랑의 신비를 이 세상에 알려주기 위하여 인간이 하늘과 연합하게 하신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노래하라. 그분의 영광의 기별을 널리 선포하고, 지경 저편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라.
꾸준히 참아 낸 시련,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은 축복, 용감하게 물리친 유혹, 온유, 친절, 자비, 늘 나타나는 사랑, 이 모든 것은 생명의 빛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이기적인 마음의 흑암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품성에서 비치는 빛들이다. (보훈, 38-44)
◎ “자아 방종하는 자가 신실한 자를 경멸함” (3기별, 398~400).
자신을 방종하여 왔으며 자만과 유행과 과시에 쉽게 굴복할 자들이 양심적이며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을 조소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조소하게 될 것이다. …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미래의 어떤 비상사태에 대한 쉬운 입장을 찾기 위하여 지금 그 준비를 시작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비상사태에 대비하시도록 할 것을 충고한다. …
우리의 날 수대로 우리가 강건할 것임 ―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고백함으로 그에게 이르러 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의무와 혹독한 시련을 생각할 때, 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하고 그 전망에 대하여 움츠러드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이는 우리가 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결정적으로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안전한 인도자로서 시련의 때에 그분의 백성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신실성에 의해 격려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사탄의 압제하는 힘 아래 있었던 사람들의 진실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의 은혜가 그들의 날 동안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사 우리가 감당할 그 이상의 시험을 받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동시에 이 땅의 계명을 무시하지 않는 일에는 큰 산맥과 같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신자)는 시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많은 준비를 하지 말아야만 한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며 그의 온전함의 한 원칙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자랑하거나 위협하거나 ‘무엇을 할 것이다’ ‘하지 않을 것이다’를 말하지 않도록 그의 마음과 영혼에 한 목적을 품고 하루하루를 방비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받기까지는 그가 어떻게 행할 것인지 자신도 모른다. …
우리는 일요일을 지키는 이웃의 성질을 자극하지 말아야 함 ― 항상 최대의 겸손 가운데 행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해 우리 원수가 우리에게 법을 무시하거나 법을 따르지 않는 자라는 비난을 가할 정당한 기회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독립성을 보여주려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날에 고의적으로 일을 하는 단호한 노력을 함으로 일요일을 우상화한 우리 이웃의 성질을 자극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우리 자매들은 세탁하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날로 일요일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시끄러운 과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포로로 잡고 있는 기만이 얼마나 두렵고 비참하게 슬픈가를 생각하고 우리의 능력껏 모든 방법을 다해 우리의 가장 신랄한 대적인 자들을 계몽하기 위해 노력하자. 만약 하늘에 적합하게 되기 위하여 그(그리스도인)가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속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의 원칙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절대로 성급하게 혹은 주제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진노와 신성모독을 발생시키는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의 시기가 마쳐진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죽음이 없을 것임 ― 예수께서 중보의 보좌에서 일어나신 후에는 모든 사건은 결정이 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르러 오는 압박과 죽음은 더 이상 진리를 위한 증언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그대가 이 위험을 생각하기를 촉구한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여야 할 것은 명목상의 기독교 신앙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으로 정복당할, 진리를 공언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그분의 음성과 낯선 자의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 주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산 경험을 가진 자는 널리 퍼진 배도 가운데서라도 압도당할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 속에서 소망과 영광이신 예수가 형성된다면 교육을 받은 자와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도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논쟁을 통해서는 그들의 대적의 잘못된 점을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며 다른 이들이 가졌던 유리한 점을 전혀 가지지 못할 것이나 이들은 배도에 의하여 압도당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그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사탄의 가장 교묘한 논리나 공격도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지식으로부터 그들을 움직일 수 없으며, 그들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의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방탕과 이단과 배반이 세상에 채워질 때 진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 드리는 기도, 진지한 통회의 기도가 겸손한 가정들에게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 자행된 불명예의 누르는 무게를 느끼는 많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각이 너무 좁으며, 판단이 어설픈데 이는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비춰진 모든 빛줄기를 마음에 품었으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3기별, 398-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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