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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상
‘지도적 사상가’의 시대에서 ‘공동연구자’의 시대로
2004년 데리다가 사망하고, 2009년에는 천수를 누린 레비-스트로스도 서거했다.
이제 지도적 사상가들은 모두 사라졌다.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는 프랑스 현대사상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현재 프랑스 현대사상은 어떠한가?
들뢰즈와 데리다 이후 주목할 만한 사상가는 누구인가? 데리다의 죽음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를 궁금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전도유망한 사상가’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구조주의의 역사』를 쓴 프랑소와 도스는 그 속편으로 1990년대 이후의 사상을 고찰한 『의미의 지배』
(1995년)를 간행했는데, 이 책을 보면 현 상황의 복잡함을 잘 알 수 있다.
많은 사상가들이 언급되고는 있지만 그 이름들은 이내 잊혀진다.
그러나 문제의 복잡함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 스타일 그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데리다가 아직 살아있을 때 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주류의 동향을 보면, 프랑스 지성의 무대는 두 개의 계열로 확실히 나뉜다.
한편에는 진지하게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마이너리티를 통해 활발히 발언하는 몇몇 철학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연구의 기술적 측면에 천착하여 폐쇄적으로 미립자화하는 인문과학연구자의 공동체가 있다.
후자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공공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
지도적 사상가들의 소실과 거대 패러다임의 종언은 공허함이 아닌 풍부하고 강렬하며 복합적인 활동을 이끌어
내었는데, 이 부흥은 일반시민에까지 파급되지 않고 있다.
이 부흥은 공동연구라는 형태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기능하고 있다. (『의미의 지배』「들어가며」)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프랑스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연구자들은 좁은 분야에
처박혀 공동 작업을 추진하는 전문적 연구자들이고, 그들은 이전의 지도적 사상가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구는 엄밀함을 획득했지만, 그 대신 시민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연구는 점점 더 좁은 영역을 고찰하는 논문을 순회하며 심포지엄 혹은 전문학술지의 범위 내에서
주해로서 보완되고 검토되며 다듬어질 뿐이다”.
이러한 연구자들 중에서 도스는 전도유망한 그룹을 네 개로 분류하여 그 속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가
들을 뽑아낸다.
도스의 이 논의는 여러 방면에 걸쳐있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여기서는 또 다른 측면에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80년대와 90년대의 프랑스 사상이라고 하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무렵의 프랑스에서는 그들 사상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적었다.
그 점에서 지도적 사상가들의 죽음 이전에 이미 그들의 영향력은 약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 무렵의 사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또 하나는 지도적 사상가들에게서 사사받은 후계자들의 사상적 전개이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제기했고 후세의 숙제로 담겨진 문제에 대해 신세대의 사상가들은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작업을 전개해왔다. 이 작업이야말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에 가장 적합할는지 모르겠다.
Ⅰ. 프랑스에서 “French Theory”의 퇴조
“French Theory”의 종언의 시작
파리 제10대학 교수인 프랑소와 큐세(Francois Cusset)가 2003년에 출간한 『프랑스 이론(French
Theory)』은 프랑스 현대사상이 미국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의 프랑스 현대사상(“French Theory”)은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만, 프랑스의 상황은 그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프랑스는 이른바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계속해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로 지(知)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라캉=데리다적 혹은 푸코=들뢰즈적인 견해를 혈육화해가는 동안, 나아가 그들의 이론적 가능성 그
자체를 탐색해가는 동안, 그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
프랑스 이론(“French Theory”)의 정치적・철학적 쟁점이 미국 대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할 때, 프랑스에서는
이중의 의미에서 부당하게 취급되었다. […]
프랑스의 대학에서는 화려했던 프랑스 이론(“French Theory”)의 지위가 최종적으로 주변적인 위치를 할당받았다.
(『프랑스 이론(French Theory)』 14장)
위의 글은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일본에서의 인상을 말하자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은 소위 스타급의 사상가이고, 그들이 본국에서도
계속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에서 프랑스 현대사상의 붐(“뉴 아카데미즘”)이 일어난 것은 80년대 전반이며,
그때 프랑스에서 이 이론들은 이미 ‘주변적’인 것으로 ‘추방’되었다.
이 간극은 매우 크다. 즉 ‘포스트구조주의’의 종언은 지도적 사상가들의 죽음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경위를 밟아간 것일까?
그 계기는 이른바 ‘솔제니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 1973년
말에 프랑스 파리에서 『수용소군도』1권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책에서 솔제니친은 엄청난 증언과 편지에 기초하여 사회주의체제의 소련 내부의 잔학성(강제수용소
투옥, 밀고・감시・고문, 강제노동, 처형 등)을 명백하게 폭로했다.
사회주의체제의 문제는 이미 스탈린 비판으로 행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소상하게 알려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솔제니친은 스탈린체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혁명 초기부터 잔학한 폭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제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게다가 『수용소군도』를 프랑스에서 초판 발행한 그 이듬해(1974년) 그는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이 ‘솔제니친 사건’이 프랑스의 지식 세계에 준 충격은 엄청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환멸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에 대한 신뢰도
점차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아가 결정적으로 ‘68년 이후 사람들의 혁명에 대한 모티브’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68년 5월’과 그 뒤를 이었던 ‘포스트구조주의’도 점차 공감을 잃어갔다.
신철학파(Nouveau Philosophie)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충격을 받고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개시한 젊은 사상
가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신철학파’이다.
이들 대부분은 68년 무렵에 ‘모택동파’였고 70년대 들어 사상적 전향을 한다.
그들은 종래의 사상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매스미디어를 이용하는 등 잡지나 신문뿐만 아니라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에 출현하여 단숨에 일군의 집단으로 부상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37년생의 앙드레 글뤽스만(André Glucksmann)과 그보다 11살 연하의 베르
나르 앙리 레비(Bernard Henri Levy)이다.
글뤽스만은 ‘국가, 마르크스주의, 강제수용소에 대한 시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요리사와 식인종』
(1975년)이라는 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강제수용소의 연관성을 파고들었다.
또 1977년에는 더 넒은 시야에서 피히테, 헤겔, 마르크스, 니체를 논한 저작 『사상의 수령들』을
출판하여 세간의 평판에 오르내린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1948년생으로 68년 5월 당시 스무살이었다.
그는 1976년에 어느 잡지로부터 “Nouveau Philisophie”(새로운 철학)에 대한 특집을 의뢰받아,
“어느새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1977년)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신철학파’
의 기수로 등극한다. 여기서는 레비의 책을 통해 ‘신철학파’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그는 『강제수용소』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전체주의적 언어활동에 관한 수많은 학문적인 해설서 중에서 오직 『수용소군도』를 읽고 많은 것을 배웠다.
30년 전부터 서구의 운명에 대해 성찰한 수많은 사회학자, 역사가, 철학자보다 솔제니친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수용소군도』는 쓰이고 출판된 우리들의 풍경과 우리들의 이데올로기적 표식을 단번에 뒤집은
수수께끼와 같은 책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레비에 의하면,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사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솔제니친과 함께 그리고 앙드레 글뤽스만 덕분에 또 다른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다면 『수용소군도』가 말한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소비에트연방의 ‘수용소’가 단지 스탈린시대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에 근간하며 나아가 마르크스 본인과 그의 책(『자본론』)에 유래한다는 것이다.
솔제니친이 처음으로 고발한 것, 즉 아버지로서 창설자인 <칼 캐피탈>과 그의 성스러운 책은 모든 의혹에
싸여있다. […] 입언저리를 맴돌면서도 말할 용기가 없어 예감만 하다가 혹은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었던 것
들을 말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단지 말할 수 있기까지는 그의 책이 필요했다.
즉—열매 속에 벌레는 없고 죄는 그 후에도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벌레란 열매 그 자체이며 죄란 마르크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레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새로운 극좌주의의 유행’으로 비판했다.
레비에 따르면, 『안티 오이디푸스』는 ‘68년 5월’의 운동을 계승하지만, 그 기본적인 발상은 마르크
스주의에 의거한다.
따라서 『안티 오이디푸스』의 사상 역시 ‘새로운 전체주의’로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신철학파’의 캠페인은 주효했다. 그 결과 70년대 후반이 되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68년 5월’에 대한 공감도, 나아가 혁명적 좌익에 대한 희망도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
그것을 추격하듯이 발표된 것이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의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년)이다.
리오타르는 당시 아메리카에서 유행하는 문화개념인 ‘포스트모던’을 가져와서 거기에 철학적인 정의를
부여한다.
이 개념은 본래 다양성과 이종혼합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건축’에서 사용된 것인데,
리오타르는 선진사회의 지적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한다.
이 연구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고도로 발전된 선진사회의 지(知)의 현재상황이다.
우리는 그것을 《포스트모던》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사회학자와 비평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
우리의 작업가설은 사회가 모든 포스트인더스트리[탈산업] 시대에 접어들어 문화가 포스트모던 시대로 진입함
과 동시에 지(知)의 위상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을 특징지으면서 “모던의 대서사시가 끝났다”라고 한 말은 유명한 문구가 되
었다. 이때 모던의 ‘대서사시’는 마르크스주의의 원리(‘노동자로서의 주체의 해방’)도 포함한다.
따라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혁명사상에 보내는 장송곡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 포스트모던론을 발표하기 이전 리오타르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져 있었고, 68년 5월에도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또 1973년에 『표류의 사상—마르크스와 프로이트로부터의 표류』, 74년에 『리비도
경제학』을 출간한다.
일반적으로 그는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가까운 입장으로 여겨졌고,
실제로도 그와 들뢰즈는 당시 같은 대학에 있었고, 사이가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발표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차가워진다.
도스가 쓴 『들뢰즈와 가타리, 교차적 평전』에는 그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뱅센(파리8대학)의 철학자로, 들뢰즈와 가까운 또 한사람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잡지를 통해 들뢰즈와
연결된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이다. […]
리오타르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간을 열광적으로 상찬했다. […]
그러나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출간하면서 들뢰즈와 그와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들뢰즈는 리오타르가 근원적으로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들뢰즈와 가타리, 교차적 평전』)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친화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신철학파’의 흐름 속에 있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론은 ‘솔제니친 사건’ 이래 계속되었던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나아가 혁명적 좌익사상에 대한 비난의 일환으로 수용되었다.
‘68년의 사상’ 비판—‘반인간주의’에서 ‘인간’의 부활로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은 뤽 페리(Luc Ferry)와 알랭 르노(Alain Renault)가 1985년에 출간한
『68년의 사상』에서 거의 확정지은 것처럼 보인다.
페리가 1951년생이고 르노는 1948년생으로 둘 다 젊은 세대에 속하는데, 그들은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의 지도적 사상가들을 ‘68년의 사상’으로서 한칼에 잘라버린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지적세계의 흐름은 고비를 맞는다.
페리와 르노의 『68년의 사상』은 대체 무엇을 제시했을까? 기본적으로는 두 개의 테마가 문제시된다.
하나는 ‘68년 5월’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또 하나는 ‘68년의 사상’이라 불리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가 무엇을 주장하는지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68년의 사상’은 ‘68년 5월’을 사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그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 두 문제는 정합적이지 않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68년의 사상은 68년의 사건을 사상적으로 충분히 파악하기 못했다”.
논의의 순서를 거슬러서 후자의 문제부터 확인해두자.
페리와 르노에 따르면,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가들은 ‘반-인간주의’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반-인간주의’는 독일의 사상가들(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의 사상에 약간의 손질을
가하여 고친 것에 불과하다.
68년의 사상은 순수하게 프랑스 독자의 것이기는커녕 독일철학자들, 특히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로부터 주제와 이론을 차용하여 그것에 복잡함을 더해 다양하게 조합한 결과의 산물이다. […]
독일철학에서 다룬 주제를 프랑스철학이 고쳐서 조금 세련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세련화로부터 프랑스철학의 특수사정이 가해져 반-인간주의가 탄생했다. (『68년의 사상』제1장)
프랑스의 어떤 사상가가 독일의 어떤 사상가들에 손질을 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영향관계에 대해서는 사상가들 자신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특이한 논점은 아니다.
페리와 르노가 강조한 것은 프랑스 사상가들이 총체적으로 ‘반-인간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단지 사상가들의 논의를 추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68년 5월’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맨 처음의 테마와 관련된다.
페리와 르노에 따르면, ‘68년 5월’은 ‘인간이 사회시스템에 의해 관리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 때문에 그들은 “68년 <5월>은 개인주의의 오랜 발전사 속에 새겨 넣어야 하는 실로 풍부한 방책”
이라고 말한다.
‘68년 5월’은 ‘<시스템>에 대립하여 <자아>를 긍정한다’는 것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즉 ‘68년 5월’은 인간과 그 주체 및 개인이라는 측면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따라서 ‘68년의 사상’이 ‘반-인간주의’를 제창한다면, 그것은 ‘68년 5월의 사건’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페리와 르노에게 ‘68년 5월’은 바로 인간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 ‘인간주의’는 80년대에 이르러 주류의 사유로 자리 잡는다.
다음의 인용문은 시대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에, 주의해서 읽어보도록 하자.
68년 <5월>의 사건을 인간주의의 도래로 보는 데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
지금에서는 모두가 아는 것이지만, 시대의 정신은 (즉 ‘80년대’의 정신은) 기꺼이 ‘주관성’의 효력을 재검토한다.
예를 들어 인권의 윤리에 관한 의견일치(컨센서스), 또 좌익진영에서조차 개인 혹은 사회가 국가에 대한 자율을
희구하는 경향은 모두 얼핏 보면 ‘68년의 정신’의 대치점에 있는 가치들의 복권을 증언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5월>의 라이트스피치의 하나는 ‘제도’(시스템)에서 인간을 지키는 것이었다.
(앞의 책, 「머리말」)
이 인용문에서 확실한 것은 ‘80년대의 정신’이 이미 ‘인간주의’, ‘주체’, ‘개인’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반-인간주의’를 제창한 ‘68년의 사상’은 70년대의 전체주의체제 비판과 ‘신철학파’의 맹공격 속에서
80년대에 이르러 시대의 중심에서 추방된다.
Ⅱ. 정치사상의 재구축을 향하여
푸코, 들뢰즈, 데리다의 유언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점차 힘을 얻으면서 ‘68년
5월’의 청산이 시도될 무렵, 푸코와 들뢰즈, 데리다는 무엇을 했을까?
각각의 시기와 방법은 다르지만 그들은 각자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 조류를 관찰하고 그에 대항하는
사상을 형성하고자 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에게 ‘정치사상’은 극히 중요한 과제였으며, 이러한 반동적인 상황과 떼어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 푸코에 대해 이야기하면, 1971년에 ‘감옥정보그룹’(GIP)에 참가하여 실천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한편, 75년에는 『감시와 처벌』을 출간하고 사회분석을 위한 새로운 이론(‘권력론’)을
제출한다. 또 ‘권력론’은 그 이듬해에 출간한 『성의 역사Ⅰ 앎의 의지』에서 ‘성 현상(섹슈얼리티)’까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생명)’을 포괄하는 ‘생(생명) 정치’의 구상에 이른다.
푸코에 의하면, 근대의 인간의 ‘생(생명)’은 권력에 의해 관리되는 대상이다.
생과 그 메카니즘을 미리 계산의 영역에 등장시키고 <지의 권력>을 인간의 생의 변형의 담당자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생-정치학’을 말해야 한다. […]
근대의 인간이란 그 스스로가 정치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의 살아있는 생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그러한 동물이다.
(『성의 역사Ⅰ 앎의 의지』제5장)
그러나 푸코가 ‘생-정치학’을 구상했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충분히 전개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전에 급사해버렸다.
그 때문에 ‘생-정치학’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전개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후의 과제로 남았다.
다음으로 들뢰즈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972년에 그가 가타리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는
‘68년 5월’을 사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되며 ‘신철학파’의 대표자인 레비에 의해 ‘극좌사상’으로
비판받았다.
실제로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원리에 기초하여 억압적인 사회질서를 폭파하고자 했다.
이 책이 어디로 이끌리는지는 푸코가 쓴 영문판 서문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유머와 농담뿐인데도 그 속에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 한없이 진지한 것이 일렁인다.
때문에 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파시즘의 모든 형태를 몰아내는 작업이다—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우리를 억누르는 거대한 것에서 시작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압제에 의해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형태를. (『미셸 푸코 사상집성Ⅵ』)
이 파시즘의 문제는 『천의 고원』(1980년)에서도 문제시되는데, 덧붙이자면 이 문제는 들뢰즈 만년의
‘관리사회론’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들뢰즈는 그에 대항하는 운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파시즘’과 ‘관리사회’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는 후세에 남겨진 숙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데리다는 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정치적인 발언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데리다는 세계적으로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사망선언이 내려진 시기에 일부러 ‘마르크스의 유산을
계승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올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론과 ‘환대의 윤리’라는 사유를 제창한다.
이러한 정치사상을 전개할 때에 데리다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의해 발생되는 ‘이민문제’에 직면했음은
분명하다.
1996년에 개최된 ‘세계피난도시회의’에 기고한 글(「만국의 세계시민이여, 또 한번의 노력이다!」)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러 피난도시에서 우리의 경험은 단지 그것이 대기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즉 긴급의 응답, 정의를 지닌,
그것은 아무래도 현행의 법보다 정의에 의한 응답, 범죄에 대한, 폭력에 대한, 박해에 대한 즉좌의 응답에 머물
러서는 안됩니다.
피난도시의 경험, 그것을 저는 법=권리(droit)와 올 수밖에 없는 데모크라시의 실험의 장소(=기연(機緣)[lieu])를,
사유의 장소(=기연)를 제공한다—여기서도 그것은 비호가 아닌 환대입니다—는 것으로서 구상하고 있습니다.
(『세계』 1996년 11월호)
그러나 데리다가 자신의 정치사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공산주의’라 해도, ‘민주주의’라 해도, ‘환대’라고 해도, 그것들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는 것을 이해
한다 해도, 그것들이 어떤 실천을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것들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상가들의 과제의 하나는 분명해졌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 이후의 사상가들은 이 과제에 어떠한 정치사상을 전개했을까?
‘공산주의의 이념’을 높이 쳐들자!
우선 ‘공산주의’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미 확인한 것처럼, 70년대 이후는 시대의 조류로서 ‘반-인간주의’가 소리 높여 제창되어왔다.
이 상황에서 현대의 프랑스사상은 무엇을 말했을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비호의 사상이다.
바디우는 1937년생으로 이미 고령에 이르렀지만 현재에도 에너지 넘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샤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후, 알튀세르의 사사를 받고 68년 5월 당시에는 ‘모택동주의자’로서 혁명에
참가했다. 그 후 들뢰즈와 같은 대학에 있을 때 들뢰즈에게서 ‘볼셰비키’로 야유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여하간 그에 관해서는 무용담이 차고 넘친다.
그러한 그가 2009년 런던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이라는 타이틀로 기조강연을
행하였다.
이 심포지엄에는 지젝과 네그리을 비롯해서 현대를 대표하는 좌익사상가들이 대거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1000명을 넘는 많은 청중들도 모여, 실로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이 심포지엄의 발표원고를 포함하여 현 상황 인식을 위한 논문이 다수 수록된 『공산주의의 가설』이
200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바디우는 ‘공산주의’의 사유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서술해놓았다.
그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현 상황에 대한 바디우의 인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현상을 분석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붉은 시대’의 퇴조가 시작되었다. […] 이 퇴조는 프랑스에서는 ‘신철학파’라는 기묘한 이름
의 흐름에서 찾아낼 수 있다. […]
30년에 걸쳐 우리를 조명하고 우리의 눈을 어지럽혔던 ‘신철학파’들의 작업은 무엇을 남겼는가?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그리고 서양세계와 그 가치들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장치가 고물로 변할 때,
그 최후의 잔해는 무엇인가? (『공산주의의 가설』「인간은 무엇을 패배라 부르는가」)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공산주의의 시대’의 퇴조는, 프랑스에서는 ‘신철학파’에 의해 유포되었고
전세계적으로는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사회와 거대화된 금융자본에 의한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새로운 새로운
자본주의의 흐름이 형성되었고 서양적인 ‘자유민주주의의’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그런데 이 동향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 큰 전환점을 맞는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면서 바디우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소리 높여 제창한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공산주의’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바디우는 그의 주저인 『존재와 사건』(1988년)과 『세계의 이론』(2006년)의 참조를 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어느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한다. 혹은 어느 특정한 세계에 나타나는 물체와 언어의 통상의 배치 내에서
생기는 ‘단절’을 ‘사건’이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란 상황에 내재하는 혹은 세계의 초월론적 법칙에 의존하는 가능성의 실현이 아니다,
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란 새로운 가능성의 창조이다. […]
어떤 상황이나 어떤 세계에 비쳐보면, 하나의 ‘사건’은 그 상황의 구성과 그 세계의 합리성이라는 엄밀한 시야
에서 보면, 참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공산주의의 가설』「공산주의의 이념」)
이 인용부분만으로는 바디우의 ‘공산주의의 이념’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 수 없지만,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스텐스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런던의 심포지엄의 기록은 『공산주의의 이념』으로 출간되었는데, 그 속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바디우의 ‘공산주의의 이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바디우 사상을 알고 싶다면 그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민주주의’는 유효한가?
바디우가 제창한 ‘공산주의의 이념’에 관한 심포지엄에는 자크 랑시에르도 참가했다.
그는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이라는 발표에서 ‘공산주의의 가설은 해방의 가설’이라는
바디우의 발언에 공명한다.
1940년생의 랑시에르는 젊은 시절 알튀세르의 『자본론을 읽다』(1965년)에 논문을 싣는 등 일찍이
그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 후 알튀세르와 결별하고 독자의 길을 걸어왔다.
여기서는 랑시에르의 사상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론’을 다루고자 한다.
주목할 부분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이 데리다의 ‘올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응답이라는
점이다.
이는 데리다의 추모강연집인 『올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2007년)에 랑시에르의 강연 「민주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랑시에르는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현 상황에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를 모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현대의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확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통해 개인은 무엇이든지간에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방자한 욕망을 정당화
한다, 라고 종종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본의 상황에도 통용된다.
즉 ‘민주주의의 과도함’으로 인해 소중한 사회질서가 해체된다고 사람들은 비난한다.
이러한 민주주의 비판에 대해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고발을 특이한 것으로 간주하려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어야 한다.
확실히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같을 뿐으로 그 낡은 이유는 간단
하다. 민주주의라는 말 그 자체가 하나의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당초, 군중의 비열한 통치와 온갖 정통한 질서의 파괴를 간파한 고대그리스의 사람들에 의해, 모멸을
표하기 위해 창출한 말이다. 권력은 출신에 의해 정해진 자 혹은 그 능력에 의해 요청되는 자가 당연히 장악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말은 혐오되고 경멸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머리말」)
랑시에르에 의하면, 민주주의(데모크라시)라는 말은 본래 통치할 자격이 없는 민중(데모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즉 본래는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민중이 통치하는 것(데모스・크라시아)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원리(아나키)한 통치이며, 모든 통치자격의
부재 이외의 그 무엇의 근거도 없는 통치이다”.
이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가 안정된 정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과 ‘불화’를
일으킨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론에 기반한 ‘민주주의’론을 비판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컨센선스(합의)를 형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그러한 합의형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통치에서 배제되고
발언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정치참여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민주주의론은 공산주의론과 연결될 수 있다.
그는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과 같은 이론도 있을 것이다. 나 랑시에르가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데에 적합한 표현과 같은 어휘로 공산
주의를 정의한다, 라고. […]
해방의 미래는, 평등의 원칙을 실행하는 남녀의 자유로운 연합체(어소시에이션)가 창출하는 영역의 자율적
발전에서만,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미래를 ‘민주주의’라고만 부르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이
미래를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관계에 대해 랑시에르는 구체적
으로 어떻게 답했을까?
‘공동성’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장-뤽 낭시(Jean Luc Nancy)는 2009년 ‘공산주의’에 관한 심포지엄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원고모음집에 발표원고(「공산주의, 말」)를 실었다.
낭시는 1940년생으로 랑시에르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들뢰즈와 데리다의 뒤를 잇는 세대로 간주
된다. 그는 1989년에 출간한 『주체 이후에 누가 오는가?』라는 논문집을 편집했는데, 이 책에는
데리다와 들뢰즈를 비롯해서 많은 현대사상가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권두논문에서 낭시는 헤겔의 ‘주체’ 개념과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에 의거하여 ‘주체 이후’를 구상
한다.
낭시에 의하면, 헤겔적인 ‘주체’는 ‘자기 안에서 자기모순을 남겨두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변증법’이라
불리는 특질을 예비한다.
예를 들어, 그는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자기 고유의 것’이라는 표현으로 말한다.
또 그는 하이데거에 의거하여 ‘실존하는 자’에 관해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누구인가’라는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주체 이후에 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적인 존재방식의 ‘실존’이 된다.
낭시는 이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한 ‘공존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도 있지만, 낭시의 글을 옮겨보겠다.
현전(現前)이 자기를 표현하지 하고 현전에 대한 현전이 된다면, 그것은 현전이 그때마다 공동에 (en commun)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전으로의 도래는 복수이며, ‘그때마다’ 그것은 ‘나의 것’과 동일하게 나뉠 뿐인 ‘우리의 것’이다.
누가 공동에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본질 없이, 공동존재 없이, 이 공동체는, ……로의 현전으로서 실존의 존재
론적 조건이다.
복수의 도래는 단수의 [=특이한] 도래(venue singuliére)인 […] 주체 없는 공동체에서, 복수적인 것이 단수적인
것을 해방하는 (libérer) (혹은 분유(分有)하는) 단수적인 것이 복수적인 것을 분유(分有)한다 (혹은 해방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누가 사용하는가, 공동체가 아니라면? (『주체 이후에 누가 오는가?』「제기」)
위의 글이 표현하는 것이, 개인이 현전하는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개인주의가 아니라면, 공동
체가 개인으로부터 떨어져 초월적으로 독립한다는 공동체주의도 아니라는 것이다.
『복수로 하는 단수의 존재』(1996년)에 따르면, “실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실존하기
때문에 공-실존한다.
실존하는 것의 공-합의란 하나의 세계의 분유(分有)이다.
하나의 세계란 실존에 외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제 실존의 밖에서 부가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란 그것들의 실존을 함께 배치하는 공-실존이다”.
이 관점에서 낭시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수록된 논문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다음
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기묘하게 비쳐진다고 할까, 이 말[공산주의]의 역사에 대한 조사와 주석이,
어떤 틀에서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공산주의자의 전통 그 자체에서는 극히 희박하다.
마치 이 말의 의미와 유래가 자명한 것처럼”. 그렇다면 낭시는 ‘공산주의’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공산주의는 따라서 정치에 속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어느 하나의 절대요건을 정치에 부여한다.
즉 공(共)의 공간을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로 연다는 절대요건을.
그것을 바꿔 말하면, 사적인 것이나 집단적인 것이나 분리나 전체성에 대해 열어놓는다는 것이 아니다.
또 그와 같이 ‘공(共)’인 것 그 자체에 완성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공(共)’인 것을 실체화한다거나
그것을 주체로 삼는 무언가의 방식도 아니다.
연다라는 절대요건이다. 공산주의란 정치의 능동화와 한정의 원리이다. (「공산주의, 말」)
그러나 이러한 낭시의 언명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침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점은 최근 낭시가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탈폐역(脫閉域) 기독교의 탈구축Ⅰ』(2005년)에 수록된 「일신교의 탈구축」에서 ‘서양의
세계화’, 곧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진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일신교’를 ‘탈구축’하기 위해 ‘글로벌라이제이션’에 어떻게 의거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그 무엇도 해명하지 않고 있다.
낭시의 착안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의 특유의 용어법 때문에 도대체 그가 어떤 정치사상을 구상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그의 논의는 약간 불만스럽다.
Ⅲ. 포스트 ‘포트스구조주의’와 미디어론의 구상
‘미디어론적 전회’를 향하여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론으로 전개할 때에 출발점이 된 것은 언어론이다.
리차드 로티가 ‘언어론적 전회’를 말할 때, 이것은 ‘분석철학’의 시작을 가리켰다.
그러나 ‘구조주의’ 이후의 전개에서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언어론적 전회’를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푸코와 들뢰즈, 가타리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면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인 변화가 전세계적으로 진전되어 사람들의 생활과
사회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근대사회의 시작에서 쿠덴베르크의 인쇄술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디지털통신기술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충격적인 변화를 사상가로서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중심으로 해서 사상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원격
통신’의 이해에 따라 사상을 새롭게 직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언어론에서 미디어론으로’의 방향에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상’을 위치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나 ‘텔레(원격)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발상이 푸코와 들뢰즈, 데리다에게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발상의 선구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의 징조를 감지하고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해 귀중한 힌트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푸코의 ‘권력론’에서 그 기본적인 모델이 벤덤이 고안한 ‘팬옵티콘(일망감시시설)’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모델에서 감시는 직접적으로 ‘보는 것’에 기반하며, 기록은 아날로그적인 문서에
의해 행해진다. 이 때문에 푸코의 사유에서 새로운 미디어론의 사고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마크 포스터(Mark Foster)는 『정보양식론』(1990년)에서 푸코의 ‘팬옵티콘’을 현대의
정보환경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현재 ‘커뮤니케이션의 유통’이나 그것이 만들어낸 데이터베이스는 일종의 《초팬옵티콘》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벽, 창, 담, 간수가 없는 감시 시스템이다. 감시의 테크노그라시의 양적인 변화는 권력의 마이크로정치
학의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었다. […]
사회보증카드,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도서관출입증과 같은 것을 데이터베이스에 코드화되어 부가한다. […]
그것들은 정보의 원천임과 동시에 정보의 기록자이기도 하다. (『정보양식론』제3장)
또 들뢰즈의 ‘관리사회론’이 정보환경의 새로운 변화를 자각하고 이론을 구축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들뢰즈는 ‘옛 군주제사회’에서 ‘근대의 규율형사회’를 거쳐 ‘현대의 관리사회’에 이르는 역사적인
전개를 ‘기계 타입’의 차이로 설명해놓았다.
이에 따르면, 현대의 ‘관리사회’는 바로 디지털 통신기계의 시대이다.
관리사회는 제3의 기계를 구사한다. 그것은 정보처리기계나 컴퓨터이다.
그것의 수동면에서의 위험은 혼신(混信)이고, 능동면에서의 위험은 해킹과 바이러스 침입이다.
이것은 단지 테크노그라시의 진보가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현재의 자본주의는 […] 이윽고 생산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제품을, 즉 판매와 시작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가 되었다. […] 이제는 마케팅이 사회관리의 도구가 되었으며 파렴치한 지배자층을 산출한다.
(『기호와 사건』「추신—관리사회에 대하여」)
덧붙이자면, 데리다가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다양한 기호로 정보통신기술의 새로운 변화를 환기시켰
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그가 ‘텔레(원격)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할 때, 현대의 정보통신기술을 염두에 두었음은
분명하다. 1999년의 <시드니 세미나>에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망령들』을 언급하며 미디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디어의 엄청난 테크노그라시의 발전이 망령성의 전대미문의 가능성과 관계있다는 것, 그리고 원격통신의
테크노그라시가 어떤 종류의 망령성을 산출하고 처리하고 조직화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방법이라는
것, 이것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의 구조나 컴퓨터화의 구조는 망령성과 실로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공공공간을 근저에서부터 변용해왔습니다. 즉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글로벌라이제이션, 세계화
(mondialisation)라 불리는 것을 통해 정치적인 공간을 변용해온 것입니다.
이 측면에서 미디어의 힘은 거대하며 그 때문에 그 책임은 매우 중대합니다.
미디어에 의거하지 않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미디어에 의거하지 않는 정치권력과 경제력도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것은 매우 자명합니다. (『데리다, 탈구축을 말하다』)
이와 같이 푸코, 들뢰즈, 데리다의 사상이 미디어와 정보의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을 무엇인가로
표현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주제화해서 거기에서 무엇인가의 사상을 형성한 것은 아
니다. 그러나 현재 시작되는 변화는 매우 영역이 광범위하고 사상 그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다시 만들
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과제에 몰두하는 이들이 바로 차세대의 사상가들이다.
그것을 여기서는 ‘미디어론적 전회’로 부르기로 한다. 구조주의가 ‘언어론적 전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사상은 ‘미디어론적 전회’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디올로지의 구상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미디어론적 전회’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의 ‘미디올로지’의 구상일 것이다.
1940년생의 드브레는 60년대 쿠바를 방문하고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전투에 참가하는 등 이미
‘미디올로지’ 이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날렸다. 본래는 ‘에콜 노르망’(고등사범학교)에서 알튀세르의
지도를 받아 철학을 연구한 유망주였다.
드브레는 1973년에 프랑스로 귀국한 후 80년경에 ‘미디올로지’라는 새로운 학문을 구상한다.
그는 ‘1979년에 출간된 『프랑스의 지적권력』의 첫줄에서 “미디올로지”라 하는 특수한 개념장치에
이끌렸다’. 드브레가 이 개념장치를 착안한 것은 종래의 언어학과 기호학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미디올로지 선언』(1994년)에서 그는 ‘미디올로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나는 즉, 고도로 발전한 사회적 기능과 전달작용의 기술적 구조와의 관련을 다루는 학문을 ‘미디올로지’라
부른다. 인간집단(종교, 이데올로기, 문학, 예술 등)의 상징활동과 그 조직형태, 그리고 흔적을 파악하고 보관
하며 유통시키는 그 기능 사이에서 검증 가능한 상관관계를 케이스 스터디로 논증하는 것,
그것을 나는 ‘미디올로지적 방법’이라 부른다. (『미디올로지 선언』제1장)
이와 같이, 드브레는 지금까지의 언어학・언어론이 무시해왔던 ‘전달작용’과 ‘매개작용’에 착안하여
그로부터 ‘미디올로지’를 구상한다.
이것은 ‘매개작용이야말로 메시지의 성질을 결정하고 관계가 존재보다도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드브레가 ‘미디올로지’를 구상하면서 ‘미디어권’이라는 개념을 제창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디어권’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구체적인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미디어권’의 역사적인 변화를 추출함으로써 각각의 ‘미디어
권’의 특징을 제시한다.
이 일람표를 보면, 드브레의 ‘미디올로지’ 구상은 현대의 정보통신기술의 격변에 기인한다.
텔레비전, 라디오, 그리고 현대의 인터넷 등의 정보기술의 변화 등으로 ‘영상권’(映像圈)이 성립하고,
예전의 인쇄술에 기반한 ‘문자권’(文子圈)과는 다른 상황이 발생한다.
드브레의 ‘미디올로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와는 별개로, 확실히 현대는 새로운 정보환경의 시대
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표. 미디어권의 역사적 변화
| 문자 (언어권) | 인쇄술 (문자권) | 오디오비주얼 (영상권) |
집단의 이상 | 하나 | 전체 | 각 사람 |
표준이 되는 세대 | 연장자 | 성인 | 청년 |
유혹의 패러다임 | 미토스 | 로고스 | 이마고(imago)[원상] |
지적단계 | 교회 | 지식인 | 미디어 |
개인의 지위 | 신민 | 시민 | 소비자 |
동일화의 신화 | 성자 | 영웅 | 스타 |
권위의 원천 | ‘신이 말했다’ | ‘책을 읽었다’ | ‘텔레비전에서 봤다’ |
미디올로지에서 메타미디올로지로
드브레의 ‘미디올로지’의 아이디어를 계승하면서, 나아가 독자적인 미디어 철학을 구상한 이가 바로
베르나르 스티글레(Bernard Stiegler)이다.
스티글레는 1952년생으로 들뢰즈=가타리에 이어 신세대의 사상가로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푸코와 들뢰즈, 데리다의 사상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문제야말로 미디올로지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스티글레의 이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미디올로지’와의 관련성을 확인해두자.
1995년에 발표한 논문 「레지스 드브레의 믿음」(『현대사상』1996년 4월호)에서 스티글레는
‘미디올로지’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선 그 의의에 대해 스티글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81년 국가로의 회귀는 그[드브레]가 곧잘 미디올로지적인 전회로 부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의 전회이기도 함과 동시에 막 시작하려는 시대의 전회이기도 하다.
‘60년대의 기호학적인 전회’를 잇는 이 정신의 새로운 조류는 기술의 존엄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든 간접적으로든 기술을 사고의 대상으로 삼고 모든 사고의 지지매체(support)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철학, 미래의 사고이다. (「레지스 드브레의 믿음」)
스티글레는 위에서와 같이 ‘미디올로지’를 위치 짓고 그 조류를 계승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언어와 기호를 문제로 삼을 때 메시지와 의미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그것을 전달하는
미디어(매체)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상이든 종교적인 교의이든 그것을 전하는 매개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기술매체 없이는 사유는 공기라는 에센스(원소)를 잃어버리고 날지 못하는 비둘기와 같은
것이 된다’.
드브레에 의하면 “아마도 지지매체란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스티글레도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발상 속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스티글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드브레의 풍부함과 더불어 래디컬하고 오리지널한 사고를 칭찬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거기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첨단적인 사고가 쉽게 빠지는 위험을 본다.
실증주의라는 위험을. (앞의 책)
그렇다면, 그 위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미디올로지’의 사고를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면,
인간의 ‘믿음’(사고에서는 ‘신념’, 종교에서는 ‘신앙’, 집단에서는 ‘신뢰’ 등)이 미디어(매개장치)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미디어에 결정된 ‘믿음’ 이외에 인간의 ‘믿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또 인간의 ‘믿음’이 미디어를 지탱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미디올로지’는 단순한 기술절정론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미디올로지’ 그 자체는 어떤 지지매체에 의해 결정되는가? 이렇게 되면 ‘미디올로지’의
성립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금 되물어야 한다. ‘미디올로지 그 자체의 미디올로지적인 조건을 문제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다. 즉 ‘미디올로지’는 ‘메타미디올로지’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둔 채로 유지함으로써 동요를 경합
하고 끊임없이 그 동요 옆에 몸을 뉘이면서 그것과 궁극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티글레의 기술・미디어의 사상
그렇다면 ‘미디올로지’를 넘어서 스티글레는 어떠한 사상을 구상한 것일까? 우선 확인해두어야 하는
것은, 스티글레가 푸코, 들뢰즈, 데리다의 사상을 자각적으로 계승하고 그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전개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본래 그는 데리다에게서 박사논문의 지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와의 공저(『텔레비전의
에코그라피』1996년)도 출간했다.
또 두 권에 나누어 출간한 『상징의 빈곤』은 ‘질 들뢰즈의 「컨트롤(관리) 사회에 관한 추신」에
대한 논평’이다. 예를 들어, 그 1권의 일본어판의 서문에서 스티글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 들뢰즈가 말한 ‘컨트롤[관리] 사회’에서 의식의 시간과 신체의 행동은 감각과 인식에 관한 테크노그라시(
텔레비전, 그리고 현재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기기)를 계속해서 사용한다.
그 컨트롤에 자발적으로 예속하여 의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심은 점차 피폐해져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개인은 자신을 상실한다. 즉 푸코가 말한 ‘자기에의 배려 souci de soi’를 잃어간다.
이와 같은 자기상실, 개체화의 퇴조는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이제는 비참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상징의 빈곤』「일본의 독자들을 위한 서문」)
들뢰즈의 ‘컨트롤[관리]사회’에 대한 문장은 극히 짧고, 겨우 아이디어만을 논했다.
이 들뢰즈의 착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개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후속세대의 과제이다.
스티글레는 이 과제를 받아서 ‘기술과 미디어’를 분석함으로써 현대적인 상황을 상세하게 폭로한다.
그는 ‘상징의 빈곤’이라고 이름 짓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징의 빈곤이라는 말에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심볼(상징)의 생산에 참가할 수 없는 것에 유래하는 개체화의
퇴조이다. 여기서 심볼은 지적인 삶의 성과(개념, 사상, 정리, 지식)와 감각적인 삶의 성과(예술, 숙련, 풍속)의
쌍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개체화의 퇴조가 확산되는 현 상황은 상징적인 것의 와해, 즉 욕망의 와해로 이어진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적인 것의 붕괴, 즉 전면적인 전쟁상태이다. (앞의 책, 제1장)
이러한 스티글레의 논의는 어떤 의미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문화
산업론’이 논한 것을 현대의 상황에서 새롭게 파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티글레는 그들과는 다른 시야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우유(偶有)로부터의 철학』(2004년)에서 스티글레는 자신의 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관심은 기술문제의 기반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철학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한에서
완전히 그러합니다. […]
기술은 내게 국소적인 대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철학적인 대상입니다.
나는 기술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로 제기하며, 그 점에서 나는 일종의 초철학에 몸을 던졌습니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철학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것,
따라서 철학적 사색 전체를 성립시키는 제 개념을 빠짐없이 모조리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기술의 문제—모든 문제의 잊혀진 기원으로서의, 또 내가 기원의 결여/근원적 결여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하는 문제로서의—를 근저에서부터 파악하는 일입니다. (『우유(偶有)로부터의 철학』)
여기서 ‘기원의 결여/근원적 결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기원할 때부터 결손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의
외부에 인공보정기구적인 성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기술’은 인간에게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 그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 프랑스의 선사학자・사회문화인류
학자)에서 가져온 것인데, 스티글레는 그것을 기억의 문제와 연결짓고, 나아가서는 ‘기술과 시간’의
문제로서 그 근본부터 이해하고자 했다.
그의 본 논의는 전5권으로 구상된 『기술과 시간』(현재 3권까지 출간)에서 전개된다.
그의 사상에서 무엇이 해명되었을까?
스티글레의 사상에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일까?
岡本裕一朗, 2015, 『フランス現代思想史:構造主義からデリダ以後へ』[프랑스 현대사상사: 구조주의
에서 데리다 이후까지], 中公新書, 제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