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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손미 /「양파 공동체」외 49편
▶ 심사위원: 김혜순, 서동욱, 김행숙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ㅡ김수영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시적 젊음과 전위적인 고민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한 권의 시집으로 응축시키는 힘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컵의 회화 ㅡ 손 미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양파 공동체』 첫 시.
‘컵의 회화’ 컵의 모양 보고 그림 그리듯이 쓴 시임을 짐작.
시집 초두에 컵이라는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컵에 자신을 투사시켜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내 피가”가 돈다고 진술. 왜 컵을 젓는데 자신의 피가 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컵에 자신을 투사시켜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컵에서 자신의 육체성을 발견해낸다. 시인은 그 순간 그만 정신이 아뜩해져서 순식간에 컵의 테두리는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문맥상으로 보면 테두리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컵이 투명한 컵이기 때문이지만,그 투명한 컵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이 되어 ‘씻어 엎으면’ 즉 사랑을 하게 되면 여성성의 상징인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달의 이빨’ 이라는 표현은 다르게 읽으면 여성 성기의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난간을 따라 걷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컵의 테두리에 입술을 대고 차를 마시는 행위로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농도 짙은 사랑의 행위로도 읽힌다. 따라서‘녹색 방울’이 튀어 오르는 것도 단순히 녹차 같은 액체가 컵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을 넘어, 사랑의 행위에 따른 황홀감을 표현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는 행위 역시 단순히 컵 속의 물이 컵을 받치고 있는 종이 위에 쏟아져서 문고리 모양의 무늬를 그린 것이라는 표면적 의미 이면에 농도 짙은 사랑의 행위가 읽혀진다. 시인은 참으로 교묘하게도 종이 위에 찍힌 둥근 컵 모양의 물그림에서 문고리를 발견해 내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 즉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는 오묘한 표현을 찾아낸다. 따지고 보면 사랑하는 행위야말로 몸을 통해 서로에게 가는 가장 깊은 소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시의 제목인 ’컵의 회화‘가 단순히 컵 그림이 아니라 회화(會話), 즉 사랑의 소통행위가 될 수 있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여성 시인이 농도 짙은 사랑을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넓게 보면 페미니즘의 범주에 속한다. 이 시는 이렇듯 시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시인의 관능적 상상력을 발견해내는 묘미가 있다.
박남희 (시인)
책상 ㅡ손 미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책상이 걸어와
내 귀퉁이를 핥는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나를 읽는
책상 이빨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맨 몸으로 뒤엉킨다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온 것
같다
ㅡㅡㅡㅡㅡㅡㅡ
도플갱어 ㅡ손 미
문을 닫자 이곳은 암전이다 우린 재채기로 서로를 알아봤다
새벽 네 시, 당신을 찾으려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데리러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알몸으로
한 칸씩 부서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움큼 집어 갔다
추락한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나 시계를 똑깥이 맞추고 헤어졌다
당신은 정전된 과일을 밟으며 갔다
당신이 조립한 마지막 칸
그 방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쌓인 사탕 더미에서
오렌지 주스가 흐르는 새벽 네 시
나는 야채 칸 모양으로
오랫동안 녹아 있었다
우리의 고향은 아주 먼 곳이지만
당신과 나는 딱 한 번 만나 발목에 찬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문을 닫으면 북반구의 어둠이 시작되고
이제 당신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양파 공동체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간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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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까도 까도 똑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양파.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마치 양파를 깔 때처럼 한 개의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무수한 미로들이 나타나기도 하고,한 개의 열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열쇠들이 무한 변용되고 증식하는 섬뜩하고 생경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작고 무시무시한 동요(動搖)가 내재되어 있는 불안한 세계가 양파 속에 꼭꼭 숨어있네요. 어쩌면 양파가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ㅡ 최형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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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양파입니다. 나도 양파입니다. 내 친구도 양파입니다. 모두 여러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방이 나오고 다시 열고 들어가면 또 나옵니다. 오, 맙소사 맨 마지막 방에 들어가니 뒷문이 또 나옵니다그려.
‘얼싸안고 울고 싶’고, ‘익기를 기다리’며, ‘양파’의 ‘흰 방에 내리는 비’를 지켜보기도 하니 양파의 변신도 볼만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이 또한 양파이니 매워서 그런 걸까요? 매운 슬픔 때문일까요?
나 같으면 맨 처음 한 겹으로는 사랑을 하고 그 다음 겹으로 음…… 다시 한번 사랑을 하고 그 다음 겹으로는 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또 사랑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뒷문을 열고 나가서 ‘첨벙첨벙’ ‘시냇물’을 건너서 도망을 가겠습니다. 나 같으면 그 모든 매운 방들을 사랑으로 채우겠습니다. 아무도 엿보지 못할 거예요. 너무 매운 방이라. ‘올바른지’ 아닌지도 모를 겁니다. 너무 매운 방이라.ㅡ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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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근 기차 ㅡ손 미
승객 여러분 뼈를 깨끗이 씻고 탑승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육류비빔밥을 먹을 것입니다
길이 없는데, 길이 끊겼는데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기차는 달리며 피부와 묶입니다
누군가 기차를 잡고 앞으로 밉니다
우리는 출발합니다
살러 갑니다
내 머리를 잡고, 꿈틀거리지 좀 마세요
너무 무겁습니다
숨을 참으면 연해질 수 있습니다
지퍼를 닫고 더욱 부드러워질 때까지
핏물이 빠질 때까지
썰기 좋은 고기가 될 때까지
한 끼의 밥이 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아침 출발하고 있습니다
기내식은 육류비빔밥
이 속에 흔들리는 이빨들
제발 움직이지 마세요
너무 무섭습니다
—《현대시학》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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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의 회화 ㅡ손 미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후박나무 토끼 ㅡ손 미
매일 커지는 무덤과
같은 방향으로 뻗은
후박나무를 끌고
이상한 나라로 가지 않는
후박나무 토끼야
숲에서 비석을 산책시키는
후박나무 토끼야
날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 사는
후박나무 토끼야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발신자 번호를 지운 전화가
가끔, 아주 가끔, 오는 것은
후박나무 뿌리가 전하는
잠깐의 기척
나무를 알몸으로 통과하는
빗물의 통증
깃털을 잃은 후박나무 토끼야
우린 오래전에 만난 적 있지?
후박나무가 미처
후박나무이기 전에
후박나무 토끼가
후박나무 토끼이기 전에
나의 머리가
너의 머리이기 전에
언젠가 본 적이 있지?
검게 뜯긴 후박나무
나를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는
시끄러운 피가 흐르고
—시집『양파 공동체』(2013)에서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몸 — 손미 시인의 「몇 온스의 숲」등의 시들 ㅡ신 진 숙
몇 온스의 숲 ㅡ손 미
올리브 병은 어디로 갔는가
피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떡을 구워먹으며 올리브 병과 단 둘이 있었어
나는 숲을 배반해서 긴 종이 되었고
여기 있는 누구든 나를 부릴 수 있었지
뺨을 쓸면 마른 떡이 한 가득 떨어져
이제 내 속에 너는 없는 것 같아
아침마다 병 속에 목을 집어넣고
출렁이는 올리브를 바라보았어
나무 의자는 밑동으로 올라갔고
여기에 있는 모두는
가장 친한 곳에서 투신하기로 했지
올리브 병을 흔들면
종소리가 나
머리가 부딪히며
숲 속이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
눈을 뜨면 붉은 비가 내려
이제 이 속에 나는 없는 것 같아
데이지 상점
데이지는 기차에서 이방의 골목을 팔고, 다른 살을 팔고, 아름다운 피 모양을 판다. 나는 창 밑에 숨어 있다가 플랫폼에 서 있는 존 레논을 쐈다. 내가 그랬다. 세상은 속았다. 세상을 속이는 법을 데이지에게 샀다.
기차 속엔 골목이 많고, 모두 한 방향의 수수께끼로, 몇 월로 가고 있는지 아무데도 도착하지 않는 기차에서 절름발이 데이지가 골목을 밀며 온다.
데이지는 저당 잡았던 외투를 승객들에게 돌려주었고 나는 존 레논의 외투로 들어갔다. 한 번도 밟지 않았던 기슭이 거기 있었다. 내가 열고 나왔던 축축한
내가 가려던 곳은 어디였는지 가방은 텅 비어있고, 상자가 되고 싶은 거대한 나무를 기차가 회전하고 있다.
나는 죽은 존 레논을 상자에 넣었고 데이지는 상자와 나와 승객들을 올려둔 가판을 밀며 간다. 나는 마지막으로 객차에 앉아 있는 선생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나를 속였던, 버렸던 선생들을 상자에 넣었다. 기차는 껍질을 뚫고 오래, 오래 간다.
못 ㅡ손 미
못에 걸렸다
문지방을 넘다가
목에 걸린 몸 때문에
여기까지
키가 자라면
저걸 뽑아야지
박힌 자리를 더듬더듬 기억하며
점점 깊어지고
못은 점점 물렁해졌다
다시 만나자
사람들은 작별을 고했고
내 몸에서 피 맛이 나
침을 삼킬 때마다
주둥이가 뾰족해진다
이것만 빼면 살 것 같았다
몸에 걸린 못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고
너를 사랑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목은 힘이 세지고 엷어지면서
나에게선 점점
피 냄새가 없어지고 있다
그루밍 ㅡ손 미
검은 돼지가 쏴쏴 떨어지고
장마
탈출하지 못한 우리가
담장 속에 숨어 있다
한 가닥씩 삐져나온 털이
피리소리를 따라 길어진다
나는 담장을 불렀으나
엄마는 열리지 않았다
다리를 꺾어 넣고 불을 피운다
배고픈 돼지들이 담장 위에 모여있다
자주 오줌에 젖는
뻣뻣한 몸에서
아무데도 갈 수 없는 다리만
수북하게 자라고 있다
남자가 던진 냄비를 쫓아
담장으로 온 아이가
삐져나간 내 머리털을 움켜쥔다
미지근한 손금에 쓸려
얼굴이 기괴해지고 있다
얼음 ㅡ손 미
엉덩이들은 숨어서 만나고
뭔가 따뜻한 것이 뒤에 있다
벌컥, 대문을 내리고 들어오던
그가 묻는다
그 뒤에 수북이 쌓인 건 무엇이지?
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린 항상 붙어있어
뒷다리 물린 얼룩말처럼
뜨거운 짐승이 등 뒤에 있다
흐르는, 등허리
찢어진 곳을 보여주며
우리는 각자의 칸에서
부풀어 오른다
침대 밑 동전처럼 조심조심
.........................................
손미 시인은 계산되기를 거부한다. 예측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세계로부터 벗어난다. 그녀의 시는 대부분 일상적인 문맥을 따르지 않는다. 때로는 매우 공격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꿈꾸는 어떤 세계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거부하지만 추구하지 않는 주체. 그것은 그녀를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목소리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불안하고 파괴적인 장소로 이동한다. 시인은 그것을 “배반”(「몇 온스의 숲」)이라 칭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섬세한 시선이 필요하다. 즉, 거부한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이상하지만, 외계인은 아니다. 그녀가 구성하고 있는 시적 주체‘들’은 외부 세계로 탈출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전략적으로 그녀가 거부하는 세계에 살아남는다. 위반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시는 없다. 공포가 없었다면 열망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기가 있으므로 손미라는 시인이 가능한 것이다. 이 이중성 안에서 그녀의 시를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시적 전략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해된다. 가령, 손미 시인은 그녀 자신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규정한다. 그녀가 구성하는 시적 주체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존재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존재들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는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체성 이전의 상태, 어떤 성이나 이름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물질 상태이다. 말하자면 어머니 몸에서 지니고 있었던 기호계적 증상들과 같은.
그러므로 손미 시인에게 시와 세계 사이의 최전선은 ‘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적인 몸을 거부하는 몸. 보다 엄밀하게 표현한다면, 몸 이전의 몸. 물질로서의 몸. 즉, 손미 시인은 스스로를 통합된 주체로 구성하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주체를 하나의 몸으로 재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시적 주체는 몸의 일부로 존재하거나 혹은 몸이지만 탈통합적인 기관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주체들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몸이 지닌 순종적이고 순응적인 삶으로부터 탈피한다. 절단되고 분절된 기관들이 그녀의 시를 이끌어간다.
엉덩이들은 숨어서 만나고
뭔가 따뜻한 것이 뒤에 있다
벌컥, 대문을 내리고 들어오던
그가 묻는다
그 뒤에 수북이 쌓인 건 무엇이지?
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린 항상 붙어있어
뒷다리 물린 얼룩말처럼
뜨거운 짐승이 등 뒤에 있다
흐르는, 등허리
찢어진 곳을 보여주며
우리는 각자의 칸에서
부풀어 오른다
침대 밑 동전처럼 조심조심
-「얼음」
몸의 일부가 하나의 개체로 그려지고 있다. “흐르는, 등허리”, “엉덩이들”은 하나의 “짐승”이다. 고전적으로, 몸의 각 부분들은 전체 몸이라는 의미 구조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유기적인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기관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이러한 유기성이 제거된다. 부분들은 전체와 무관하게 ‘살아’ 있다. 그것도 뜨겁게, “뒷다리가 물린 얼룩말처럼”. 이 절단된 기관들은 하나의 통합된 몸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몰론 유기적인 몸에 대한 개념에서 본다면, 그것은 불능 혹은 불구의 기관들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불구의 기관들을 살아 있는 하나의 완전한 몸으로 물질화함으로써, 전체주의적이고 통합적인 인식 체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기관들은 “부풀어” 올라 하나의 통합된 주체를 압박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적 주체의 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작동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에로스적인 관점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자아를 성공적으로 유지할 뿐만 아니라 계통적으로 유전시키기를 꿈꾸는 자아본능은 이 시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 강렬한 죽음충동을 동인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른 모든 시인들에게도 이는 자주 빈번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현실원칙에 대한 거부는 본질적으로, 교정된 것으로 간주되는 쾌락원칙을 복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손미 시인의 경우에는 이러한 타나토스적 욕망이 매우 복합적이다. 그녀는 에로스적인 동시에 타나토스적이다. 공포와 사랑, 우울과 열망, 분노와 승화라는 복잡한 욕동들이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그것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코라적 기호계가 상징계와 연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기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외디푸스 이전 단계’와 이후의 단계가 결합되어 있다. 즉,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한 개체가 지니게 되는 운명적인 트라우마와 트라우마가 발생하기 이전의 몸이 연접한 것이다. 손미 시인의 시에 몸에 대한 비천시와 타자에 대한 열망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못에 걸린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을 고통스러워 하지만, 이 도달할 수 없는 무기력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몸」)
따라서 이 글에서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주체는 복수의 주체, 즉 ‘그녀들’이다. 아마도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면, 그녀가 아름다운 미적 주체를 포기하는 이유, 정상적인 정체성을 거절하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들끓는 숲’(「몇 온스의 숲」)이다.
데이지는 기차에서 이방의 골목을 팔고, 다른 살을 팔고, 아름다운 피 모양을 판다. 나는 창 밑에 숨어 있다가 플랫폼에 서 있는 존 레논을 쐈다. 내가 그랬다. 세상은 속았다. 세상을 속이는 법을 데이지에게 샀다.
기차 속엔 골목이 많고, 모두 한 방향의 수수께끼로, 몇 월로 가고 있는지 아무데도 도착하지 않는 기차에서 절름발이 데이지가 골목을 밀며 온다.
데이지는 저당 잡았던 외투를 승객들에게 돌려주었고 나는 존 레논의 외투로 들어갔다. 한 번도 밟지 않았던 기슭이 거기 있었다. 내가 열고 나왔던 축축한
내가 가려던 곳은 어디였는지 가방은 텅 비어있고, 상자가 되고 싶은 거대한 나무를 기차가 회전하고 있다.
나는 죽은 존 레논을 상자에 넣었고 데이지는 상자와 나와 승객들을 올려둔 가판을 밀며 간다. 나는 마지막으로 객차에 앉아 있는 선생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나를 속였던, 버렸던 선생들을 상자에 넣었다. 기차는 껍질을 뚫고 오래, 오래 간다.
- 「데이지 상점」
‘나’는 “데이지”이면서 데이지가 아니다. ‘나’는 “존 레논”을 살해하면서 동시에 그를 숭배한다. 나는 공포를 피해, 내가 살해한 존 레논의 외투 속에 숨는다. ‘나’를 가르친 것은 선생들이지만 “세상을 속이는 법”을 판 사람은 데이지이다. ‘나’는 상징계로부터 ‘버려진’ 존재인 동시에 그 사회를 공격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나’는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함께 ‘나’는 기차를 타고 간다. 기차는 직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회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는 아무도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기차는 반복되는 선로(線路)로 다른 길들을 뚫고 나아간다. 이 점에서 기차에서 바라본 삶은 진짜가 아니라 “껍질”들이며, 동시에 기차는 이 껍질을 뚫고 어디론가 나아갈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그녀에 의해 살해당하고, 상자에 담겨져 보관된다. 그러나 상자를 두고 하차하지 않는다. 나는 데이지가 밀고 있는 가판에 놓인 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타자들 중 하나이며, 동시에 데이지이다. 세상을 정말로 속일 수 있는 단 한 사람. 따라서 그녀는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이지 않다. 그녀는 속임의 전략을 통해 상징계의 검열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어떤 정체성도 버릴 수 있으며, 동시에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는 어딘가에 존재한다. 고통의 근원을 은폐하기 위하여 수많은 전략들을 구사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들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욕망한다.
검은 돼지가 쏴쏴 떨어지고
장마
탈출하지 못한 우리가
담장 속에 숨어 있다
한 가닥씩 삐져나온 털이
피리소리를 따라 길어진다
나는 담장을 불렀으나
엄마는 열리지 않았다
다리를 꺾어 넣고 불을 피운다
배고픈 돼지들이 담장 위에 모여있다
자주 오줌에 젖는
뻣뻣한 몸에서
아무데도 갈 수 없는 다리만
수북하게 자라고 있다
남자가 던진 냄비를 쫓아
담장으로 온 아이가
삐져나간 내 머리털을 움켜쥔다
미지근한 손금에 쓸려
얼굴이 기괴해지고 있다
-「그루밍」
가령, “한 가닥씩 삐져나온 털이/ 피리소리를 따라 길어진다”에서 알 수 있듯, 은폐된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난다. 피리소리에 길어지는 머리카락, 아무데로도 도망칠 수 없는 다리,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엄마 등은 뚜렷한 공포감을 바탕으로 한다. 어떤 고통, 어떤 슬픔은 흐릿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적 공포가 끊임없이 기억을 현재화한다. 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생한 물질성을 획득한다. 공포는 “탈출”하지 못했던 그 날 밤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소환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포는 얼굴이 없다. 왜 그런가. 그녀는 「못」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키가 자라면 저걸 뽑아야지”(「못」). 여기서 ‘저것’이란 물론 “못”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은 못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못은 “목”이었다가 “몸”이었다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그것은 못이 라캉이 말한 초월적인 시니피앙이기 때문이다. 실체를 처음부터 가지지 않은 채, 즉 기원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고통 자체를 제거할 수 없다. 고통의 제거는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한, 시인은 세계와 타협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녀의 얼굴은 “기괴”하다. 공포는 나른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어떤 시들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해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애에 침윤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이해와 소통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손미 시인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불통에도 진정성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불통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사유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리라. 물론, 분명한 이해를 가져 올 수 있는 손쉬운 방법도 있다. 그녀를 서구 형이상학적 철학에 대한 안티테제 혹은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페미니스트로서의 거절 등 보다 분명한 암시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시인 자신이 아직 무엇을 추구할지에 대해 명료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라면. 손미 시인은 그녀의 전략대로 과정으로 존재한다. 무엇이 아닌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되기의 과정만이 그녀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그녀의 거부가 태도 이상의 의미를 지니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위반만으로 시를 새롭다고 평할 수는 없으니까. 추한 것만으로 아름다움의 윤리를 비판할 수 없으니까. 시인에 대한 기대가 크다.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 등단
아무 날 ㅡ 손 미
찾았어?
케이크를 자를 때 여기가 맞나 칼을 대고 망설이는 곳에서 맥박이 뛰고 폭죽이 터지네
손목에 힘을 주면 조금씩 열리는 골목에서 당신이 막, 사라졌고 빈 곳을 메우기 위해 나는 다급하게 노래를
케이크를 자를 때 혹시 여기 있나 잠시 멈춰서 당신이 사라진 단면에 흰 선을 긋고 거기에 누워보는 거네
찾았어?
통과한 당신?
이 초를 끄면 우리는 영영 못 볼 것 같은데
스카프 하나가 오래오래 창공을 날아가네 머리 위로 몇 번씩 칼날이 내리고 점점 갈라지네 모두 멀어지네
케이크를 자르면서 둥글게 둥글게 우리가 자리를 바꾸면서 울먹이며 나타나는 곳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내 노래는 단면이 먹네
케이크를 자를 때 울음이 시작되고
또 생일이 오네
발자국도 없이
발자국도 없이
와서는
찾았어?
칼날이 서겅서겅 떨어지며 묻네
ㅡ계간 《문학동네》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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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 ㅡ 손미
나는 비에 있었다
숲이 쏟아지기 전까지
내가 삼킨 알약은 어디에 있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나
근대인의 젖은 발
긴 식탁보를 따라
도시의 모서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른다
나는 모서리를 잘라버린다
문 닫은 동물원
다락에서 숲이 잠들었다
사냥을 다녀온 숲
숲은 손바닥을 내밀어
내게 각설탕을 먹이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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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귀신에게 ㅡ 손미
잘 죽어
너 없으면 나도 없다
복숭아 옆에 복숭아씨가 나와 있고
극동 오디오에서 내게서 나온 너를 보았다 고장난 스피커 사이에서 너는 돌아오지도 않고 멀리서 물었다
나는 살아서 소리를 내고 있니? 너는 신호를 찾아 손을 번쩍 들었다
소리의 무덤에서
축축한 손잡이를 만졌다
방금 누군가 손을 씻고 여기를 나갔다
아니 들어왔다
와서 여기 있다
극동 오디오에는 나의 귀신
복숭아 옆에는 복숭아 씨
판화 ㅡ손 미
나를 파줘
이게 첫 임무다
육신을 쪼갰어
침투한다 피가,
밀어내고
밀어버리고
통과하려 한다
껍질을 뜯으면서
당신은 왜 나를 왜 밀어두는가
왜 빠져나가려 하는가
아직 살아 있는 나무의 말
파고들면 슬픈 일이 생겼다
우리는 같은 판 위에서
사지를 물어뜯고
서로의 주름진 곳을 사랑했다
스토브 하나 없이
협곡을 걷던 족속이
사라진 곳
한때 오래 머물던 곳 같다
오목한 길을 따라 와
거기에서 기다릴게
물이 고이는 곳
아주 먼 곳부터 따라온
출혈하는 저 나무와
나는 어떤 관계야?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길에서
너를 만날 때까지
얼굴에 어둠 발랐다
나를 파줘
더 깊이 깊이
파고들게 하는
죄 많은 거기를
—《시인수첩》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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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의 회화ㅡ 손 미(1982~ )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사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사물의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봐야 한다. 사물의 겉이 아니라 속을 거닐고, 그 안에서 쉽사리 재현되지 않는 의문스러운 자신과 대면해보는 것. 이것이 사물을 통해 세계를 보는 방법이 아닐까.
여기에 무언가 담겨져 있는 컵이 있다. 컵에 담겨 있는 액체는 무엇일까. 피, 투명한 동물, 녹색 방울, 젖은 발자국 등으로 고정화되지 않고 분유되는 이미지들이 컵 속에 담겨 있을 법한 액체의 알리바이를 마련해주고 있지만, 사실 이 시에서 범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컵이 어떤 액체를 구속하고 있는 상태다. 더 범박하게 말하면, 고정된 윤곽이 없는 액체들에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컵이란 억압이지만 그 억압으로 인해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는 ‘다른 몸들’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컵은 액체를 억압하는 동시에 보존하고 이동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컵은 비우는 용도인가. 채우는 용도인가. 아마도 손미는 컵을 통해 비정형의 가능성을 강하게 노출시키려는 것 같다. 그러면서 스스로 액체성의 정념 주체가 되어 어떤 몸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이곳의 약속이 아니라 늘 다른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보여준다.
스푼으로 내 몸에 담긴 생각 하나를 휘젓는다. 무너지고 훼손된 것들 속에서 잠시간의 희망이라도 기록할 수 있다면 내일은 좀 더 건강할 것이다. 박성준(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빈 집에 물방울이 ㅡ 손 미
똑,똑,똑,
저 소리가 나를 가져가려 발을 든다
수도꼭지가 작게 눈을 뜬다
이렇게 길게 헤어질 수 있다
긴 얼굴 하나 끈질기게 떨어지고 있다
나는 이제 깜깜한 여기서 나가
조금씩 저쪽으로 떨어지고 싶다
방울, 방울 몸을 나눠
멀어지고 싶다
종일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저 수도 좀 교체해주세요
안 됩니다
이 혀 좀 잠가주세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작별입니까
그 어떤 말도 저장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흑백의 꼭지에 매달려
길쭉해지고 있었다
출구를 찾고 있었다
뿔을 잡힌 채
한 방울씩 도망가는
나의 정령
몸속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이 뼈를 똑,똑,
뚫고 나와
쏟아지려 한다
대낮에 이불을 덮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물의 악조를 따라
핏방울이
똑,똑,똑
저쪽을 노크한다
—《시산맥》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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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의 회화 ㅡ 손 미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이 시는 손미 시인의 첫 시집 『양파 공동체』에 나오는 첫 시이다. ‘컵의 회화’라는 제목만 보면 시인이 컵의 모양을 보고 그림 그리듯이 쓴 시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데 왜 시인은 하필이면 시집의 초두에 컵이라는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컵을 단지 어떤 것을 마시거나 담기 위한 도구로 바라보지 않고 그 대상에 자신을 투사시켜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이 시의 첫 행에서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내 피가”가 돈다고 진술하고 있다. 왜 시인은 컵을 젓는데 자신의 피가 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컵에 자신을 투사시켜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컵에서 자신의 육체성을 발견해낸다. 시인은 그 순간 그만 정신이 아뜩해져서 순식간에 컵의 테두리는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문맥상으로 보면 테두리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컵이 투명한 컵이기 때문이지만, 그 투명한 컵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이 되어 ‘씻어 엎으면’ 즉 사랑을 하게 되면 여성성의 상징인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달의 이빨’이라는 표현은 다르게 읽으면 여성 성기의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난간을 따라 걷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컵의 테두리에 입술을 대고 차를 마시는 행위로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농도 짙은 사랑의 행위로도 읽힌다. 따라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르는 것도 단순히 녹차 같은 액체가 컵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을 넘어, 사랑의 행위에 따른 황홀감을 표현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는 행위 역시 단순히 컵 속의 물이 컵을 받치고 있는 종이 위에 쏟아져서 문고리 모양의 무늬를 그린 것이라는 표면적 의미 이면에 농도 짙은 사랑의 행위가 읽혀진다. 시인은 참으로 교묘하게도 종이 위에 찍힌 둥근 컵 모양의 물그림에서 문고리를 발견해내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 즉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는 오묘한 표현을 찾아낸다. 따지고 보면 사랑하는 행위야말로 몸을 통해 서로에게 가는 가장 깊은 소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시의 제목인 ’컵의 회화‘가 단순히 컵 그림이 아니라 회화(會話), 즉 사랑의 소통행위가 될 수 있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여성 시인이 농도 짙은 사랑을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넓게 보면 페미니즘의 범주에 속한다. 이 시는 이렇듯 시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시인의 관능적 상상력을 발견해내는 묘미가 있다 ㅡ 박남희시인
사다리 ㅡ 손 미
나를 폭로할까 해
옷을 벗을게
알사탕 껍질 같은
육체를 벗을게
꽃을 들고 선 얼음
나는 언제
이렇게 냉정해졌나
종일 회로를 고치는 사람의 목에
호스를 넣지 않고
식도로 밥을 넘겼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없는 계단을 디디면서
그래서
죽은 거야?
산 거야?
왜 자꾸 사다리가 쏟아지는 거야?
입김 하나 내뱉지 않고
꼭 데리러 오는 것처럼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급하게 밥을 먹었다
보이는데
못 보는 척했다
⸺월간《시와 표현》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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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 1982년 대전 출생. 2009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양파 공동체』.
양말도 안 신고
손 미
실을 굴리며 거기로 갔다
먼 교회에 가서 울었다
나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카펫 속의 동물이 교차한다 교차로에서
모두 직물이 되어간다
실밥이 나온 스웨터를 입고
가로로 갔다
방금 털을 민 양이 양말도 안 신고
세로로 갔다
가끔 빠져나가려고 표를 끊는다
한 코가 빠진 하늘을 본다
양을 잡은 나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옥상에서 양이
나를 본다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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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 ㅡ 손 미
한 번 만나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기로 했는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북반구가 흩날리는 미술관에서
등에 붙은 꿀벌은 비상구로 날려주고
한 번 만나요
아직 돈이 없어서 미안해요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요
사람들이 울먹이며 복음서를 읽는 세기말이니까
땅이 뒤집혀 생긴
아름다운 추상화 앞에서 봐요, 우리
당신의 해골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여줘요
살았는지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어깨를 건드려보는 거리에서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현수막이 펄럭인다면
여기가 세상 끝이니까
하늘에서 윙윙 벌이 쏟아지니까
더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재난 경보음이 울리는 미술관에서
한 번 봐요, 우리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살아있는 당신 해골을
오래 관람해서 미안해요
창밖은 부옇고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
격월간《시사사》 2018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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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 / 손미
한 번 만나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기로 했는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북반구가 흩날리는) 미술관에서
(등에 붙은 꿀벌은 비상구로 날려주고)
한 번 만나요
(아직 돈이 없어서) 미안해요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요
(사람들이 울먹이며 복음서를 읽는) 세기말이니까
(땅이 뒤집혀 생긴)
아름다운 추상화 앞에서 봐요, 우리
당신의 해골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여줘요
(살았는지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어깨를 건드려보는) 거리에서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현수막이 펄럭인다면
여기가 세상 끝이니까
(하늘에서 윙윙 벌이 쏟아지니까)
더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재난 경보음이 울리는) 미술관에서
한 번 봐요, 우리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살아있는 당신 해골을
오래 관람해서 미안해요
(창밖은 부옇고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 번 만나요
안 그러기로 했는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미술관에서 한 번 만나요
(아직 돈이 없어서) 미안해요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요
세기말이니까(땅이 뒤집혀 생긴)
추상화 앞에서 봐요, 우리
당신의 해골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여줘요
(살았는지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어깨를 건드려보는) 거리에서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현수막이 펄럭인다면
여기가 세상 끝이니까
더 움직일 수 없으니까
미술관에서
한 번 봐요, 우리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살아있는 당신 해골을
오래 관람해서 미안해요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우리네 삶이 ㅡ들끓는 이 세상이 ㅡ너와 나의 행로가 마치 전람회 같아
시를 읽어서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시일 때ㅡ 그걸 문장으로 글로서 읽어서 이해하려 하지말고 시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떠올려 그려보세요.
시는 여러 이미지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퍼즐 같은 것입니다.
그 퍼즐을 맞춰 보세요. 심지어 퍼즐은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다른 그림이 만들어지겠죠.
그렇게 흩어져 있는 불완전한 퍼즐조각 같은 것이 시 입니다.
그걸 스스로 맞춰 나가다보면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 이미지가 보일 것이구요. 그걸 기초로 자기만의 퍼즐을 맞추시면 됩니다.
그렇게 읽어 보세요.
시는 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소통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면 시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설명서나 교재를 써야죠. 시는 예술이며 문학이지 소통 도구가 아닙니다.
시는 독자를 보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 자신의 예술적 문학적 열망을 쏟아내고 표현하는 작업이지 독자에게
뭔가를 알려주기 위한 작업이 아닙니다. 독자를 보고 쓰는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독자라고 하는 대상은 매우 다양한 군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독자를 보고 써야 할까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써야 하나요? 그렇다면 동시 조차도 어려울 겁니다.
시는 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예술의 하나이고 그것을 읽고 느끼기 위해선 독자도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가 쓰는 시가 어려워서 독자들이 외면할까봐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쓴다면 그건 예술도 문학도 아닙니다.
예술은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한 어떤 작위를 가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이 시를 읽고 느낀 바... ㅡㅡ화자 ㅡ이루지 못한 옛사랑 상대가 있어보이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한번 만나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화자 탓인지 상대 탓인지 둘 모두의 문제인지 떳떳하게 만나보자 할 수는 없는 상태 같아요. 조심스럽게 진심을 드러내는 느낌이 드네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 그 사랑을 놓치고 매일매일이 괴로웠다
예를 들자면, 김기택이나 송찬호의 작품을 보면, 제목과 내용이 일치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파 시인들의 시는 제목을 보고 시를 읽었는데 내용은 다른 데 가 있습니다. 제가 시 보는 안목이 좁다고 말하겠는데, 대부분의 기성 유명한 시인들도 이들의 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
영감을 준 그림이 있을 것 같아요. 아주 단순하게 보면 상대가 전람회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요. 전시회에 가보면 이해가 안 되는 그림들이 있는데 그런 그림도 알고보면 속사정이 있을 거예요. 작가가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라든가 그림에 부여한 의미라든가. 이 시도 화자의 내면 고백이긴 한데 이해가 잘 안되는 그림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죠. 누군가는 의미를 읽을 수도 있을 거고 누군가는 이해 안 가는 이상한 그림으로 지나쳐버릴 수도 있고요. 이 시 자체가 전람회 같네요.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시 너무 좋은데요
시의 이미지들을 잘 따라가보세요 멸망 북반구 비상구 불 세기말 땅이 뒤집힘 당신의 해골 종말 세상 끝 재난 경보음이 올리는 미술관 등을 이미지들이 섬뜩하지 않나요 이미지들이 화자의 심리와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잖아요 당신과 나는 이별 상황인데 그 상황과 정서를 자칫 비유기적이지만 유기적인 이미지들이 환기하고 있네요
마음을 울리는 부분은 있었어요. 저 역시 살아가며, (이미 타인이지만) 우리가 서로 타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하거든요. sns나 유튜브, 개인 방송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같지만 그건 실은 자신과는 먼 모습이고.. 개인의 세계는 병들어가는 것같다고 느껴요ㅠㅠ 그렇기 때문에 만나자는 말이 단순히 서로의 외형을 보여주자는 게 아니라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외침같아서, 그러나 그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일같아서 너무 안타깝달까요.. 그런 까닭에 전람회라는 제목이 이질적이고 아프게 다가 오네요ㅠㅠ 주절주절 그저 제가 느낀 점을 한 명의 독자의
입장에서 말해 보았습니다.. 시 올려주시고 생각 나눌 수 있게 해주신 것,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추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비엔날레 미술관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여 오랫동안 그 사람의 얼굴(해골)을 봤다는 것이니까
전람회와 시 내용이 딱들어 맞잖아요.
간혹 어려운 문구도 있지만 이해 안 될 때는 그 시의 리듬에 편승하세요.
가령 옷에 불을 질러 미안해요.
라는 구절에서는 예쁘게 보일려고 시인이 빨간 옷을 입고 나왔구나!
이런식으로 너그럽게 생각하세요. ㅋ
전람회 ㅡ 세상만사
멸망 ㅡ 문맥상으론 '열망' 이어야 함. 열망과 멸망은 이음이의이나 작자는 고의로 달리 표기함. 그렇게함으로써 시 속 화자는 그 둘을 함께 발음한 것임. 고로 보고싶다는 열망이 극한으로 치우쳐 멸망하는 극단적 심정임을 토로함.
북반구가 흩날리는 ㅡ 상대적, 혹은 반대적 성향이나 처지의 작중 화자임. 흩날린다는 건 몹시 격정에 차 있다는 심정. (계속
등에 붙은 꿀벌은 비상구로 날려주고 ㅡ 너 뒤쪽에 감춘 빨대와 독침은 떳떳하지 않으니 정당하지 않는 비상구로 내보내고(떼어놓고) 즉, 추잡하게 굴지말고.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 ㅡ 옷은 날개. 즉 거죽. 즉 세속적 신분.
러브?스토리를 골격화하고,
시적 언어를 고상하게 치장한 예쁜 시이지요.^^
돌 저글링 ㅡ 손 미
오늘은 달 대신 바위가 떴다
애인은 급히 방을 찾고 있다 바위에서 돌멩이들이 떨어진다 점을 치는 것이다
애인과 여자는 욕조 하나를 얻었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셋의 차가운 무릎이 닿는다
알죠? 나 언니 돌로 찍고 싶은 거? 언니만 생각하면 가슴 터질 것 같애 매일 언니 인스타 뒤져요 둘이 있을까봐
욕조 위에 바위가 떠 있다 바위엔 얼어버린 동물과 참고 참고 참아서 쌓인 사람들
식어가는 물속에서 누가 누굴 사랑하는지 모른 채,우리의 무릎이 닿는다
어두운데 웅크리고 있으면 팔과 다리가 붙고 무거워지고, 그건 바위 같고, 빠지면 절제가 안 되고, 멈춰지지 않고, 병신이 되고,
알죠? 언니? 그림 그린다면서요? 나보다 돈 많으니까 언니 외로워서 그런 거잖아? 나 언니가 쓴 글 다 뒤져서 읽어요.
나는 애인을 만지는 언니를 만진다
돌멩이가 떨어진다
돌고, 돌고, 돌아,
땅에 떨어진 것은 사람이 되고,
그게 누구였었는지 모른 채
발견한 순서대로 끌어안고
우리는 서로에게
저를 던지면서
충돌한다
우리는 다 저기서 떨어졌으니까
어차피 하나였으니까
오늘은 가지 마요 언니
살점이 떨어져도
사랑은 해야 하니까
가까이,
제일 가까운데 있어요
ㅡ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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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손미 -
문이 열린다 네가 닫힌다
따라 나가던 내가 닫힌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문을 열고 들어가
무수히 많은 의자에 앉았었지만
벌컥 열고 들어와
누군가 너를 훔쳐갈까 두려웠다
비밀이었던 문이 삭제된다
힘주어 문고리를 물고 있던 복도도 사라진다
더는 애쓰지 말자
손잡이 떨어진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참 오래도 서 있었다
어쩌면 문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거다
나는 이제 네가 궁금하지 않다
______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외 2편)
손 미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 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돌 저글링
오늘은 달 대신 바위가 떴다
애인은 급히 방을 찾고 있다 바위에서 돌멩이들이 떨어진다 점을 치는 것이다
애인과 여자는 욕조 하나를 얻었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셋의 차가운 무릎이 닿는다
알죠? 나 언니 돌로 찍고 싶은 거? 언니만 생각하면 가슴 터질 것 같애 매일 언니 인스타 뒤져요 둘이 있을까 봐
욕조 위에 바위가 떠 있다 바위엔 얼어버린 동물과 참고 참아서 쌓인 사람들
식어 가는 물속에서 누가 누굴 사랑하는지 모른 채,우리의 무릎이 닿는다
어두운데 웅크리고 있으면 팔과 다리가 붙고 무거워지고, 그건 바위 같고, 빠지면 절제가 안 되고, 멈춰지지 않고,
알죠? 언니? 그림 그린다면서요? 나보다 돈 많으니까
언니 외로워서 그런 거잖아? 나 언니가 쓴 글 다 뒤져서 읽어요.
나는 애인을 만지는 언니를 만진다
돌멩이가 떨어진다
서로에게
저를 던지면서
충돌한다
우리는 다 저기서 떨어졌으니까
어차피 하나였으니까
오늘은 가지 마요 언니
살점이 떨어져도
사랑은 해야 하니까
가까이,
제일 가까이 있어요
옥수수 귀신
아무도 얘기 안 했어
장례도 없이
환생도 없이
같은 몸에서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다는 걸
여러 개의 문을 열어도
아무도 말 안 했어
깜깜한 방에서 웅크리면
나는 절반밖에 없다는 걸
어둠이 나를 파먹고 있다는 걸
한번, 찢어 본 적 없는데
팔다리도 흔들지 않는데
저 안의 옥수수는
정말 살아 있나?
외투 속 나는
정말 살아 있나?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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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손 미
이빨 아래 두고 오독오독 씹다가 비상계단에서 뱉어버린 지구는 지금도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중인데 이토록 고요하다
아파트에서 나와 아파트로 간다 너는 손으로 가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서 나는 위에서 아래에서 쏟아지는 이빨을 받으며 껌처럼 납작해진다
나는 어디쯤 붙어 있는 걸까
밤이 되면 붕대 감긴 아파트에 눕는다 불면이 나의 머리를 오독오독 씹었다 저쪽으로 혹처럼 부어오른 나의 집에서 지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를 부른다
아득한 물소리
거대한 이빨 사이에 매일 밤 눕는다
한 번도 못 만난 사람들이 위에서 아래에서 눕는다
직선에 얹어 놓은 유일한 입체들
볼록하게 붓는 이유는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물이 내려간다
⸺계간 《모:든시》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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