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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쫓으라
마 9:9-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9-13 / [마태를 부르시다;막2:13-17,눅5:27-32] 예수께서 큰길로 내려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와서 내 제자 되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는 일어나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 그런 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세리들과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방인들도 많이 손님으로 와 있었다.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왜 당신네 선생은 저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거요?' 1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대답하셨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우라. ㄱ)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나는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는 사람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 목적을 밝히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9-11)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변방 지역의 한 세관에서 세리로 근무하고 있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마태가 근무하는 당시 세관은 로마 제국이 피지배국 백성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세무서였습니다. 게다가 부당한 세금 부과 및 부정행위 등 여러 가지 부조리들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납세자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관에서 고용원으로 근무했던 세리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배국의 세금을 징수했기에 동족으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아가서는 부정한 이방인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죄인, 창기, 이방인과 같은 비천한 부류로 취급받았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마태 역시 다른 세리들과 마찬 가지로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태의 집에 주님과 더불어 초대된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는 말이 나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2-13)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닌, 바로 병든 자, 약한 자 곧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는 말씀은 풍자적 격언으로서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을, 의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병든 자는 세리를 비롯한 구원과 영적 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인정하는 모든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또한“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가 그 당시 실천적 사랑이 결여된 율법주의자들을 훈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호 6:6). 본 단락에서는 겉으로만 의로운 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또한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밝히셨습니다. 여기에서 의인은 영적이며, 도덕적인 의인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께 과연 누가 죄인이며 의인인가를 묻는다면 인류 전체가 죄인이라 하실 것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
적 용 : 마태는 세리였으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혹시 당신은 사람을 볼 때 바리새인들처럼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꺼이 내놓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지은 악한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고 덮어주시고 돌이키는 삶을 다시 살라고 하십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더 좋은 축복의 길로 인도하심을 따르게 하십니다. 내가 받은 큰 사랑을 늘 기억하며 넉넉한 마음이 되어 작은 일에 용납하고 먼저 세워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설 교 >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라
“제자입니까?”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께서 쓰신 <율법의 정신>이란 제목의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도시에 굉장히 가난한 아주머니 한 분이 살았는데, 어느 날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그리고 빵과 우유를 사서 카운터에 가서 값을 지불하고 슈퍼마켓을 막 나가려고 하는데, 계산하던 점원아가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줌마, 그 가방 좀 열어 보세요” 아주머니는 한사코 그 가방을 열지 않겠다고 우기다가, 경찰이 출동하자 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의 가방 안에서 몇 Kg의 고기가 나왔습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경찰서로 끌려갔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그 가난한 아주머니를 심문했습니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고기를 가져가는 것은 위법인 줄 아시죠. 왜 고기를 훔쳤습니까?” 아주머니는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재판관님, 잘못했습니다. 실은 제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도 없이 다섯 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몇 달 동안 기름진 음식이라곤 한번도 먹어 보지 못해 슈퍼마켓의 고기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 고기를 가방 속에 넣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난 재판관은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정부는 이 아주머니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가족이 살기에 적당한 집을 제공해주고 연금을 지급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방망이를 "꽝 꽝 꽝“ 두드리며 판결을 마치었다고 합니다.
이 재판관은 정의보다 자비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쁜 일입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정의이며, 법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법에 의하면 도둑질한 아주머니를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엄벌에 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용서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반드시 법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법에 의해, 힘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서울의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문헌에 의하면 대낮에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바람에 인왕산에 올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토끼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엄청나게 힘이 센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의 멸종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토끼는 멸종되어 가기는 커녕,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힐 만큼 토끼가 너무 많아 고민입니다. 세상이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면 약한 토끼는 멸종되어야하고, 힘이 센 호랑이는 계속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정반대로 호랑이는 사라지고 토끼가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꼭 힘의 논리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에 의해 법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보다 위대한 것이 자비입니다. 법보다 위대한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할 때, 율법의 잣대가 아닌 사랑으로 대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와 같은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삼으실 때, 무식한 어부들과 같이 못 배우고 없이 사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처럼 취급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교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한 마디로 말해서 너희 선생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부정한 죄인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주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보다, 율법의 기준을 더 중요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명분을 더 중요시 했던 사람들입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에 나오는 "호랑이 죽이기"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한말(韓末)에만 해도 호랑이가 북악산 타고 경복궁까지 곧잘 침범했었다. 태종 때 일이다. 김덕생이라는 공신이요, 명사수가 임금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후원을 거니는데 맹호가 발소리를 죽이며 접근해 가는 것을 김덕생이 보게 되었다. 김덕생이 단 한발로 적중시켜 위기일발에서 임금을 구하였다. 두 번 공신이 될 뻔한 김덕생은 오히려 이 호랑이 사살로 대역죄에 몰렸다. 아무리 임금이 위기에 처했더라도, 임금을 향해 활을 쏜다는 것은 시해 행위에 해당된다는 조정의 법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호랑이 그림을 도처에 놓게 하여 백발백중 일실도 없음을 입증하였으나, 끝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과거 실리보다 도리에 더 비중을 두었던 시대에 일어난 '호랑이 사살사건'입니다. 아마 오늘날에 경호원이 대통령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훈장을 달아주고 거액의 격려금을 주고 최소한 1~2계급 특진을 시켜 주고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하고 야단법석을 부렸을 텐데, 이조시대에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호랑이로부터 임금님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보다, 임금님을 향해서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율법의 명분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2~13절)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며 외롭게 살아가는 세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죄인들을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다같이 1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지금 그들이 이렇게 질문한데에는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본 스승 세례요한은 기도와 금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요일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으로 올라간 날이고, 월요일은 시내산에서 하산한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목요일과 월요일, 이틀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대명사인 세리들과 잔치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기가 막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왜 금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예수님께 따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절) 주님께서는 대답대신, 오히려 결혼잔치와 같이 즐거운 자리에서 어떻게 금식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요즘에는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의 혼인잔치는 굉장히 성대했습니다. 20분 만에 후다닥 해치우고고 식당가서 갈비탕 먹고 끝내버리는 오늘날의 결혼식과 달리, 당시에는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금식의 날이 와도 금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결혼을 축하해 줍니다. 그러나 1주일 동안의 축제가 끝난 후에는 규례대로 금식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내가 영적인 신랑인데 나와 함께 기쁘게 즐기자.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란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곧 올 것이다. 내가 못 박혀 죽을 때가 오는데, 그 때는 너희들이 금식할 때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지금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마음껏 잔치를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지 말고 잔칫집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은 잔치하는 것처럼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이 잔치하는 것처럼 즐겁습니까? 아니면 장례식처럼 침울합니까? 제가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얼굴의 변화입니다. 인상파와 같은 얼굴이 제비족과 같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고문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굉장히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고문이 아니라,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옥과 같은 삶이 아니라, 천국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신학생들에게 설교학 강의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의 기쁨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표정관리에 주의하십시오. 우선 여러분들의 삶에서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했던 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허리를 펴십시오. 그리고 활짝 웃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의 기쁨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하고 소리쳐 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지옥의 슬픔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원하신다면 특별한 표정을 연출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바로 지옥의 표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의 얼굴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사합시다. “신앙생활은 고문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인사할까요? “기쁘게 신앙생활 하세요.”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옥과 같은 삶이 아니라, 천국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다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주님께서는 ‘생베조각’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아마 가정에서 살림하는 주부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질이 좋지 않은 옷을 옷가게에서 처음 사온 후, 세탁하면 약간씩 줄어듭니다. 옷을 오래 입으면 입을수록 옷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옷에 구멍이 났을 때, 한번도 세탁한 적이 없는 새로운 천 조각을 헌 옷에 붙이면 어떻게 됩니까? 오그라들어 헌 옷도 버리고, 새 천 조각도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헌 옷’이란 ‘낡은 유대교 의식’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새 옷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복음과 낡은 유대교의 의식을 접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옷감으로 헌 옷을 기우면 둘 다 못쓰게 되는 것처럼, 만약 새로운 복음에 옛 의식을 가미시키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은 예수 믿기 전에 있었던 옛 생각들을 가미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라는 사람들이,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들이 복음에다 자꾸만 이상한 것들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삼일교회 전병욱목사님이 지은 <파워크리스챤>이라는 책에 보면 연세대학교 신과대 윤동식교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윤동식교수는 ’한의신학’, ‘토착화신학’, ‘풍유신학’, 등을 주장하며 한 때 이름을 날린 적이 있는데, 1990년 10월19일 모 세미나 장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전통 종교를 우상숭배로 정죄하는 큰 과오를 범했다. 나는 무당굿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학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술 더 떠서 얼마 전에 작고한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교수는 이렇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류는 특정 종교 하나가 제시하는 신념 체계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도록 다원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하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포기한 망말입니다. 또 WCC, 즉 세계교회협의회라는 단체는 종교 간의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면서 여러 종교인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거기 참석한 목사 한 사람이 “누구를 향해 무엇을 기도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고통 하는 상황이 더 중요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마호멧에게 기도하든, 석가모니에게 기도하든, 다만 기도한다고 모여 있는 모습이 중요하다. 공통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한데 묶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짬뽕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망할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자 밑에서, 이러한 교수 밑에서, 이러한 목사 밑에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는 것을 목숨 걸고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숨 걸고 전했습니다. 복음에 그 어떠한 것도 섞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과 함께 혼잡하게 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중국집에 가서는 짬뽕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짬뽕 신학이 발붙여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이라는 천에 그 어떠한 생베 조각을 붙여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 그대로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주님께서는 ‘가죽부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7절을 보겠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되느니라." 여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자주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 회사에서 CEO가 바뀔 때, 교회에 새로운 목사가 부임해 올 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 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의 배경에는 중동지방에서의 포도주의 발효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새 술을 새 가죽부대에 넣어두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지만, 낡은 가죽부대에 넣어두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낡은 가죽부대 안에 넣어둔 포도주는 발효되어 나중에는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새 술은 낡은 가죽부대가 아닌, 탄력성이 강한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오래 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 포도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낡은 가죽부대’란 유대교 의식과 세상의 여러 가지 기준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말라‘는 것은 예수 믿고 거듭나서 새로 태어났다면, 더 이상 과거의 기준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품었던 옛 생각과 옛 경험과 옛 습관들과 같은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하는 것처럼,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답게 새롭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리얼 라이프 1월호에서 제가 이달의 책으로 추천한 박호근목사님이 쓰신 <하나님과 함께 뛰는 나의 후반전>이라는 책에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륙을 횡단하던 여객기가 기관 고장과 연료부족으로 광활한 사막에 불시착했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여객기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달궈진 모래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조종사가 구조 요청을 보내기 위해 무전기를 두드렸으나 아무런 회신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싣고 가던 식량과 음료수를 아껴 먹으며 구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잔해를 기점으로 하여 여러 명씩 조를 짜서 혹시 근처에 있을 부락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이른 새벽, 부서진 비행기 안에서 잠을 깬 사람들은 두서너 명 씩 짝을 이뤄 근처를 수색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다시 비행기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식량과 물은 바닥이 났습니다. 물이 없으니 더 이상 살아날 가망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막을 여러 방향으로 뒤지고 다녔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비장한 각오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결국 우리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밤마다 비행기로 돌아오곤 하는데, 저는 이 비행기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조난 지점으로 돌아와선 안 됩니다. 그것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기서 떠나 다행히 인가를 발견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대로 있다간 죽음뿐입니다.” 다음 날 비행기는 태워졌습니다. 힘껏 손을 맞잡은 사람들은 서너 명씩 짝을 이뤄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들이 돌아올 것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더욱 필사적으로 사막을 헤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오아시스가 있는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기쁨에 찬 사람들은 물로 목을 축이며 외쳤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습니다. 과거를 잇고 있는 줄을 끊어 버렸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는 새 삶의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를 묶고 있는 줄을 끊어야만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가죽부대를 바꾸어야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면 낡아빠진 가죽부대를 새로운 가죽부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신축성이 사라져버린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고 새로운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분명히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낡은 가죽부대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신축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축성이 없는 낡은 가죽부대를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 주일 살았고 운동력 있는 능력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렇게 크게 변화되지 못합니다. 가죽부대 때문에 새가족모임, 개인양육, 제자훈련, 사역훈련을 받으면서도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제자훈련을 받을 때는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주위 사람과 자꾸만 부딪힙니다. 심심하면 시험보고 있다느니, 시험 중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과거 사랑의 교회에서 청소년사역을 하시다가, 지금은 분당에서 우리교회를 개척하여 귀하게 사역하고 계시는 이찬수목사님이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부인은 의처증을 가진 남편과 사는 부인이다. 그런데 더 힘든 사람은 의처증을 가진 당사자이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의처증을 가진 남편은 아내가 시장에 가서 조금만 늦게 와도 혹시 딴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약국에 가서 약사와 조금만 이야기하고 있어도, 나 몰래 저 약사와 약속 잡은 것은 아닐까 라고 항상 의심합니다. 그러면 누가 힘듭니까? 당사자입니다. 의심하는 남편 때문에 부인이 피곤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더 힘든 사람은 의처증에 빠진 당사자입니다. 당사자는 모든 것이 힘이 듭니다. 모든 것이 경직되어 있어서 이것을 보아도 불만, 저것을 보아도 불만, 모든 것이 불만투성입니다. 의처증을 가진 남편은 ‘부인이 화장을 하면 딴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닐까 해서 의심하고, 화장을 안 해도 혹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 해서 의심합니다. 의처증을 가진 남편은 아내가 국을 평소보다 많이 끌려놓아도 ‘저 여편네가 혹시 멀리 도망을 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전혀 반찬을 준비하지 않아도 저 여자가 혹시 다른 남자와 외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의심합니다. 그러나 신축성이 있는 남편은 ‘아내가 화장을 안 하고 있어도 원판 그대로 보여주니까 감사하고, 아내가 두껍게 화장을 하면 아내가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축성 없는 가죽부대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매사에 따지기 좋아하고, 모든 것에 불만이고 입만 열면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기뻐하고, 은행 잔고가 바닥이 보여도 감사하고,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코가 깨져도 찬양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낡은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그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담아도 터지지 않는 신축성 있는 새로운 가죽부대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고 새로운 가죽부대로 바꾼다고 해서 여러 가지 세상의 것들을 복음에 섞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천에 그 어떠한 생베 조각도 붙이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낡아빠진 가죽부대를 새로운 가죽부대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그 어떠한 것도 가미시키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