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그리다만 백모란을 완성시키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마침 올해도 강화 내리 일정이 잡혀있기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러나 실인즉 이 그림은 재작년에 그리다 마음에 안 들어 내팽겨 쳐둔 그림으로, 와신상담하여 작년에 대담하게 물감을 덧입혀 그렸었고 시간이 모자라 작년에도 완성시키지 못한 그림이니 결국에는 2년 동안 난 이 그림을 위해 오늘이 오기를 기다려온 셈이 된다.
그런데 아뿔싸! 어제 저녁, 오늘 비가 올 것이란 일기예보 탓에 스케치 장소가 양평 쪽으로 바뀔 것이란 연락을 받게 되었다. 크게 낙심해 있던 차, 9시 TV뉴스를 보고 있으려니 비는 오전 나절에 점차 개일 것이라고 수정되지 않는가. 정총무는 부친 상중이라 경황이 없을 터이고 회장님은 병원에 계실 터, 재무와 부회장 두 분에게 상황을 물으며 강화 알정을 타진하니 나를 더 슬프게 하는 뉴스가 들려왔다. 강화 내리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집 앞 모란 화단의 꽃송이들을 모조리 절단내버렸단 소식이었다. 이유인즉 서울에서 그림 그리러 온 몇 개의 사생단체 화가들이 이 맘 때만 되면 몰려들 와선 마을 주변을 오염시키고 간 때문이란 것이다.
병중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자가면역성질환’이다. 자기 몸을 지켜야 할 면역체가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의 세포를 공격하는 병이다. 현대 불치병이라 명명되는 것들의 대부분이 다 이런 ‘자가면역성질환’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화 내리 주민들이 외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마을 꽃들을 꺾어버린 것은 바로 이런 ‘자가면역성질환’에 걸려버린 메카니즘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별 수 없이 양평으로 가게 됐다. 3년 전에 이곳에 다녀간 카페 기록사진으로 자료를 확인해보니 마침 모란이 몇 그루 보이기에 백모란은 아니지만 이왕에 싸둔 30호 캔버스를 그대로 둘러메고 아침 빗길을 나섰다.
예상대로 비는 멎었고 오후에는 화창했다. 하지만 그나마 사진에 보이던 모란은 누군가 캐 가버렸다는 주인의 말을 전해 듣고 또 낙심해 있던 차, 길가 화단 한 구석에서 분홍빛 해당화가 피어있는 모습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기쁜 마음으로 희망을 갖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백모란 자리에 해당화를 그려 넣어 보았지만 그야말로 꼴불견의 그림이 되었다. 화가 나 큰 붓으로 해당화를 확확 밀어버렸다. 밀어내 형태를 없애버리니 그 자리에 공간이 생겨났다. 미완성의 백모란도 없어지고 해당화도 없어진 자리에 여백이 생겨난 것이다. 그 바람에 완성되어 있던 백모란은 더 실감나게 살아났다. 아하! 오늘 난 그림을 그리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고 그림을 없애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구나!
그렇다! 어찌 꼭 형태만이 그림이라 할 수 있겠는가? 형태의 파괴도 그림인 줄을 오늘 한 수 배우고 간다. 온당치 않은 존재는 오히려 말썽만 일으키는 법이니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3일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 동쪽으로 갔으니 무진장 막힐 것이라 입에 독을 품고 떠들었는데 어럽쇼? 한 시간 만에 강변역에 도착했다. 아하! 이것도 또한 세상이치구나! 함부로 자신의 좁은 주관만 주장할 바가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2013.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