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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스볼베르에서 태어난 이론물리학자 포코스키(POKORSKI)는
호르몬 분비와 조절을 담당하는 기관인 뇌하수체에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분비되지 않아서 평생 지독한 "신경장애"를 떠안고 살았으며
시대적 상황으로 불치병을 타고난 그는 스스로 "운명의 기형아"였다고 말했다.
(※ 신경장애란?
신경전달물질(대표적인 세로토닌과 엔도르핀 등...)이
정상적으로 분비되지 않을 때 생기는 장애로 식욕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안정적인 숙면을 취할 수 없으며 기억력이 쇠퇴하고, 기분 향상이 안 되며 성욕을 상실하기도 한다.
호르몬의 종류와 기능은 수 억가지로 세분화되기 때문에 보고되지 않은 증상은 무궁무진하다.)
성장호르몬을 신경계로 분산시키는 능력이 뒤쳐진 포코스키는
태어날 때부터 보통 아기들과 다른 신체적 징후(발달장애)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예를 들자면 눈동자가 사상각막염(filamentous keratitis)의 일종인 양색소 이안증으로 인해
극심한 충혈상태처럼 검붉게 나타났고,
신경 자극제 역할을 하는 호르몬(도파민 등...)의 결핍으로
종종 뇌가 활성화 안 된 상태로 길게는 4주 이상까지
기면 상태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그런 신체적 징후는 근친혼에 의한 유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나,
의학에 문외한이었던 두 부모는 그를 "저주받은 아이"라 여겼다.
부농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오컬트를 숭배함으로써 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믿었던 부친에 의해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 포코스키는 산추루(현재 지명:sumperk)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고아원에서의 삶은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포코스키를 위험한 아이로 성장시켰다.
포코스키는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촛불을 껐다는 것을 말미로 동급생의 목을 졸라 죽일 뻔하기도 했고
사소한 다툼으로 다른 아이의 손가락을 그 아이가 자고 있을 때를 노려 꺾어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하루에도 수차례, 소란이 있을 때마다 크고 작은 폭력 사태의 가해자는 늘 포코스키였다.
고아원에 있는 동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덕목과 예의 수업을 받은 포코스키는
자신의 폭력성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불건전한 욕구에 관해서는 늘 충동적으로 해결했으며
마음 한편으로는 죄의식을 느끼고 처벌받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숨어지내며 타인의 접근을 멀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리에 섞이지 않고서는 고아원에서 순조롭게 지낼 수 없었고
원치 않게 사람들과 어울려 있을 때면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폭력 성향의 실수를 되풀이했다.
단체생활 안에서는 늘 불안해 보였는데 그런 경험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17세 만기로 고아원에서 나온 후에는 사람들 무리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했고
포코스키는 그 해 자진해서 은둔하기로 결정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천재성을 숨겨둔 이가 은둔형 외톨이로 산다는 것은 독자적인 세상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코스키는 독방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접한 바깥 사회의 구조(시스템)를 각종 도표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재구성하는 시간을 취미 삼아 보냈고 특히 계측법과 건축학, 수학 등 숫자나 기호를 이용하는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포코스키가 수학이나 그 외 다른 학문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뛰어났던 이유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 : su c/2)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증후군은 2010년 기준 자폐아에서 30% 그 외 뇌 기능이상자에서 10% 미만으로 보고되는데
한쪽(좌or우) 뇌에 지나친 결함이 있을 때 다른 한쪽 뇌가 활성화되는 보상 작용으로 천재성이 발휘되는 증상이다.
8시간 반 연주 분량의 악보를 암기하여 지휘한 피체(17세기 대공트리오의 일원이자, 란데스 휴일의 원 작곡자)가
역사 속 대표적인 서번트 증후군 보유자지만, 포코스키는 암기력보단 사물을 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초월 상태의 사고력이 발휘된 경우며, 이는 증후군의 제2형 종증인 su c/2(좌>우)로 보고
서번트 증후군 보유자 중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를 여겨본 법적보호자 "찰스 덴버슨"은 포코스키의 재능을 살려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가 가진 천부적인(혹은 병적인) 사고력과 그동안 갈고닦은 학문의 조화는 한 이론물리학자를 탄생시키기에 적합했다.
(※ 법적보호자란?
포코스키는 소년원 출신이며, 정신과적 재범률이 높다고 판단되어
40세가 되기 전까지 정부에서 보낸 법적보호자가 정기적으로 상태를 감시했다.
법적보호자는 수용인의 연금과 수입, 생활 지출을 총괄적으로 관리했으며 야간활동을 통제했다.
이는 고아나 범죄 경력이 있는 문제아들을 위주로 시행된 사회적 감시 제도였다.)
포코스키는 혼자있을 때 한 가지 일에 극도로 몰두하는 외골수적 성향이었으며
한꺼번에 많은 철자를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문헌을 독해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이론물리학자로서 그는 실험과학자들이 맡긴 복잡한 논문을 쉽사리 이해했으며
자신의 장점인 수학(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아냈고 이것을 과학자에게 통보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정교한 수학 공식으로 측정된 논문의 실용 여부는 19세기 과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천부적인 사고력을 바탕으로 군더더기 없이 설계된 실험 도구를 직접 제작해 특허를 받기도 했고
자연, 기계 및 각종 현상에 대한 모의실험의 효용성을 선구적으로 진보시켰다.
대인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포코스키에게 이론물리학자란 직업이 가진 고유의 폐쇄성은 그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 것이다.
당시 이론물리학자는 실험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실험 결과에 어떠한 책임도 물지 않았고, 보상도 받지 않았다. 하는 일은 실험과학자들의 논문을 읽고
전문가적인 시각에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 과정에서 사례금을 받았다.
이 관계를 우편으로 대신한다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외부인과 접촉하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포코스키는 정신에 지장 없이 생산적인 활동을 맘껏 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이론물리학자의 업무에 몰두하며 실적을 쌓았고
자신도 별다른 문제 없이 사회에 공헌한 학자로 남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심각해지는 신경호르몬 조절 장애 탓에 기억상실증을 겪고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는 능력이 퇴화하면서 포코스키의 삶에는 이중성이 부여됐다.
혼란스러운 기억의 마찰 속에서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에 의문을 가졌으며
사람들을 피해 17세부터 시작한 은둔 생활의 이유조차 까맣게 잊고서
번화가로 발길을 돌리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심 속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구타로 의식을 잃은 노숙자들이 속출했으며, 익사한 개들이 수로에 떠다녔다.
생선쓰레기 악취가 스볼베르의 거리를 뒤덮고, 도살당한 가축의 피로 지저분해진 담벼락이 날로 늘어갔지만
상황이 더 악화하는 동안에도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것은 모두 포코스키의 불안정한 인격이 저지른 망나니 같은 쇼였으나
늘 그래 왔듯이 포코스키는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이중생활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법적보호자인 찰스덴버슨만이 포코스키의 행실을 수상하게 여겼지만
그때마다 포코스키는 알리바이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고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선 비밀로 한 채, 유유자적한 이론물리학도의 삶을 지향한다며
의심으로부터 스스로 변호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십자가에 죽은 고양이의 머리를 꿴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
미데스 교회의 지원 아래 최대 규모의 조사관이 투입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포코스키는 36세가 되던 1879년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소환됐다.
(미데스 교회 : 노르웨이의 구 국립중앙교 20c / 설립일 1727년부터 1919년까지 )
찰스덴버슨은 포코스키편에서 변호사의 역할을 소신껏 수행하지만
배심원과 종교단체의 사람이 한 데 모인 곳에서 대인기피증을 극복하지 못한 포코스키는
결국, 정신착란증세와 더불어 모든 범행을 자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으로 받게 된 판결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이었다.
불규칙한 호르몬의 분비로 포코스키의 2차 성징은 27세에 왔었다는 기록을
당시 나르비크 종합병원 신경의학과 원장이며,
우상과 진화심리학을 집필한 심리학자인 이안(1859년 3월 14일 (영국) - 1891년 4월 18일)이 공개했다.
(나르비크 종합 병원 : 당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종합병원.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지금까지도 가장 오래된 병원 중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환자 기록에 따르면 포코스키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욕구를 훌륭히 절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예측불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고 대화를 할 때에도 단답형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나,
때로는 사소한 자극에조차 극심한 분노를 느끼며
혈색이 붉어지고 땀이 흐르는 등 급격스러운 신체 변화가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특히 이안이 주목한 점은 그가 병실에 혼자 있을 때
종잡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괴성을 지르며 탈출을 감행했다는 점이었다.
한 때 이론물리학자란 신분을 가졌던 사람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하게 되는 원동력은
그의 내면에 의식의 주도권을 강탈하려는 "돌촉형 이종자아(PoHA)" 상태의
인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
※ 돌촉형 이종자아(PoHA)란?
이 종증의 환자는 본인의지로 무엇인가를 실천에 옮긴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그 의지보다 더 강하게 반영된 이종자아(이성/지성이 결여된 무의식 속 욕구/욕망)의
이끌림에 의해서 병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결과가 더 자주 발생한다.
※ 이중인격이라고 알려진 알츠하이머 유형의 인격장애(PoHB)와
제코하이드 유형인 이종인격(PoHA)의 차이점은
이중인격(PoHB) 환자의 경우 "두 가지 이상으로 포착된 인격이 항상 마찰하는 상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격이 수시로 교체되며, 이 과정을 제어할 수 없다.
PoHB 환자는 가장 많은 보유기억을 가진 주인격(ASP)외의 다른 인격이 경험한 것을
완전한 타인의 기억으로 분리하고 원래 상태(ASP)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한 일을 기억 못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 보유기억이란?
긴박한 상황 혹은 절정의 쾌감(등)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머릿속으로 영구히 기억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노인이 조금 전의 일은 기억 못 하면서 수십 년 전 전쟁담에 관해 생생히 증언하는 것이 기억의 보유력에 속함.
반면, 이종인격(PoHA) 환자의 경우 학계에 보고된 트라우마 종류만큼이나 무작위적인 촉발 사건(돌촉)을 계기로
자제력의 한계에 근접함으로써 본체의 통제력을 무의식(hide 상태)에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이때 무의식은 이종자아 형태며, 자신의 상황에 따른 욕구/욕망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간단히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은 어느 정도 의향이 있는 상태에서 "넘겨준 것"과 같다.
주인격(ASP)은 이종자아가 경험하는 것을 타인의 기억으로 분리하지 않고
관람하는 상태가 되며 자제력을 회복할 때까지(혹은 촉발 계기가 무효로 될 때까지) 누적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단, PoHA 환자는 이종자아가 한 일에 대해 꿈에서 있었던 일처럼 희미하게 기억할 뿐 현실감각이 없다.
환자의 병원생활을 상세하게 기록한 내용에서 포코스키에게 다가올 장래는 암담했다.
치료 방법이 밝혀질 때까지 정신병원에 귀속된다는 무기한 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한 찰스덴버슨은 법적보호자로서 마지막 절차를 남기고
포코스키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왔던 노력도 더는 소용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었을까? 정신병원에서의 일과 중에서
포코스키는 점차 특유의 무미건조한 침착함을 유지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이론물리학자의 업무를 병원 안에서도 볼 수 있도록 담당관에게 정중한 편지로 요청했다.
그것은 전문의가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도록 의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의도가 있었든 간에 기대 이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포코스키는
그동안의 절망적인 치료 기록에서 예고된 것과 달리 입원 21주 만에 통원치료 절차를 수속했고,
해괴망측한 사건으로 이슈가 된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약간이나마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다.
신문에서 밝힌 인터뷰에서 포코스키는 자신의 정신질환을 악(evil)이라 정의하고
끊임없이 자각함으로써 도덕적 경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고
스스로 고안한 이 명상 치료법은 정기적인 약물치료와 더불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인물을 정부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포코스키의 한결 온건해진 상태를 인정하여 그는 법적보호자의 통제와 재정감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고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방탕한 것을 포함한 소비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뀐 운명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달라진 그의 모습은 어쩌면 곧 다가올 죽음이 만든 변화였을지 모른다.
포코스키의 죽음은 1879년 6월 고요한 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두 자고 있을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택이 의문의 폭발로 날아가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포코스키도 불길에 타버린 것이다.
폭발에 휩쓸린 그의 시신은 조각으로 나뉘어 그을린 채로 발견됐고 다른 인명 재산 피해는 생기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 그날 밤은 장대비가 내렸고 집 주변으로 돌담이 둘러싸고 있어 불길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의문의 화재 이후 얼마 뒤,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포코스키를 지켜봐 온 법적보호자 찰스덴버슨이
포코스키가 생전에 사용한 노트를 공개하게 되는데, 그 노트에 기록된 내용은 과거 자신(포코스키)의
불안정한 인격이 저지른 이면생활을 적나라하게 기술한 비망록 같은 것이었다.
찰스덴버슨이 고인의 노트를 얻게 된 당시로 거슬러 가자면
1879년 1월 체포된 포코스키는 재판 직후, 나르비크 종합병원으로 후송되는 과정에서 찰스덴버슨에게
산후스로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각종 기록물(자서전과 산문집 등..)이 보관된 목조 상자를 줬다고 한다.
포코스키가 소포를 직접 보내지 못한 이유는 그가 법적 감시를 받는 범죄자 신분인 탓도 있었겠지만
산후스는 법무사 자격을 가진 공인만 왕래할 수 있는 수사집행기관이었기 때문이다.
※ 산후스 : 20세기 전까지 건재했던 수사집행기관. 현 노르웨이 복지 교도소의 전신이다.
강력 범죄가 연쇄적으로 발생한 베스트폴주 호르텐의 구 레딜강 다리 인근에 방범대가 투입되면서 설립됐다.
19세기 당시 호르텐에서부터 서북방향으로 110km 떨어진 멘데르까지의 치안업무를 관장하였고
민원을 배제한 독자적인 요원(법조인 , 수사관 등..) 운용으로 범법자의 신원을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모인 자료는 그 신원대상자의 위험도에 따라 전단을 제작해 공표하였고
이미 죗값을 치른 범법자에게는 새 직업을 소개해주는 등, 정상적인 사회복귀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의학적으로 치료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정신병력이 있으며
그 당시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포코스키 명의의 소포를
산후스로 보내는 것은 좋든, 나쁘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상자를 맡게 된 찰스덴버슨은 이 일은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이라며
소포를 어떤 명분으로 산후스의 관계자에게 전달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의견을 물어봤지만
포코스키는 정신 병리적 상태를 선처 바라며, 범법자로 낙인 찍힌 자신의 전기(傳記)와 산문집을 공개해
범죄심리학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요구사항을 강조했다.
만약, 자서전이나 산문집에서 좋은 내용만 간추려 정리하면
포코스키를 격리한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그를 비호하기 위한 자료로 쓸 수도 있겠지만
산후스에서 기록물의 출처를 요구하게 되면 다른 안 좋은 내용까지 언론에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을 처리할 때보다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찰스덴버슨은 포코스키를 비난하는
루터교(노르웨이 종교계)를 진정시키려고 모든 방면에서 노력해왔고
재판으로 유죄가 인정된 범죄자의 소포를 미끼로
신원재판소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수사집행기관인 산후스를 끌어들이는 건
그곳에서 도움을 받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찰스덴버슨은
소포의 처리에 관해 어떠한 부탁도 들어주지 않은 채
때를 기다리며 비밀스럽게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포코스키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고, 새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도
시기상조일 뿐이라며 소포의 처리를 미루고 있는 그 사이,
포코스키의 유품으로나마 남은 건 자신이 맡은 상자뿐임을 알게 됐다며
받은 그대로 보존된 목조 상자를 개봉하여 그 안의 내용물을 고심 끝에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그 상자는 특이하게도 "프튀르크가의 공법"으로 제작되어 함부로 열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 프튀르크가의 공법이란?
덴마크 왕립도서관에서 서기관를 지낸 프튀르크가의 프튀르크 스톨텐베르그 3세가 발명한 공법으로
공기순환이 잘되는 아카시아 나무판자에 오일팜 나무 잎사귀에서 추출한 천연방부제를 점칠한 후,
못을 사용하지 않은 조립식으로 밀폐된 용기를 제작하는 기술이다.
이 공법으로 제작된 상자는 오래된 그림이나 문헌 등 종이질을 장기간 보존하는 데 사용됐다.
포코스키는 생전에 기이한 행동으로 주목 받은 터라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에 다양한 의혹을 제기했고 무관한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품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을 공개하는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상자 안에는 방부 처리된 꽤 큰 액수의 현찰과 종이 무더기, 그리고 가죽끈으로 봉인한 노트가 들어 있었고
현금은 동봉한 편지에서 요구한 대로 포코스키가 졸업한 고아원에 전액 기부됐다.
유일한 친구이자 인생의 조언자였을 찰스덴버슨의 손을 거쳐 포코스키가 남기게 된 노트에는
과거, 비도덕적인 행위들에 대한 죄책감과 혼란스러운 정신상태가 반영되어 읽을 수 없는 글씨체와 문장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정교하고 완벽히 다룬 내용은 스스로 구상한 자살계획이었다.
그가 이름 붙인 안식지원장치는 철저한 계산과 모의실험으로 나온 조건이 일치했을 때
침실을 폭발시키는 구조로 되어있었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부터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자살이란 섣부른 판단을 수습할 기회조차 없이 기억력이 날로 쇠퇴하였던 포코스키는
병원에서 지낸동안 어느새 장치의 존재를 잊게 된 같다.
점차 악화될 자신의 정신과적 결함까지 의도적으로 자살계획에 포함시킨 것일까?
그는 자신이 병행한 약물치료의 성분 중에 항우울제인 리튬 화합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억력 감퇴를 가속하려고 애용했다고 노트에서 밝혔다.
통원 치료 절차를 수속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의 모습에서 죽음의 두려움은 볼 수 없었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 자신도 모르게 생사의 갈림길에 섰으며
결국, 포코스키는 안식지원장치를 설계한 최초의 바람대로
죽은 거란 사실을 잊고 두려움 없이 수면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안식지원장치는 습기까지 고려하여 작동하는 구조였는데
포코스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의문의 화재 사고 당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불길이 크게 번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설계자의 배려를 알 수 있다.
비록 선택한 방법이 잘못되었을지라도 그가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사회구조학 논문을 보면
인문 사회와 남녀노소의 유대관계에 애증이 섞인 동경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포코스키의 비망록이 세상으로 나온 그 날,
그것을 미리 봤다면 불상사를 막을 수도 있었다는 사람들에게 찰스덴버슨은
"60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깨달음이란 언제나 늦다."란 말을 남겼다.
병원에서 점점 상태가 나아지는 듯한 포코스키를 위해
철거될 뻔한 그의 주택(부동산)을 합법적으로 유지한 것도 찰스 덴버슨이었고
한 이론물리학자의 운명을 바뀌게 할 단서도 그가 쥐고 있었던 셈이다.
도덕적 경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가두고 마음속으로는 욕구불만의 인격과 대치해야만 했던
제코하이드 유형의 이종인격(PoHA) 환자인 포코스키의 일생은
1886년 출간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집필한 단편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고
찰스덴버슨은 어터슨으로 이름이 바뀌어 소설속에 등장해
지킬박사의 친구이자 변호사이며 그와 동시에 지킬박사의 사악한 인격인
하이드의 정체를 묘사하는 인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