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3/14-망국 남부여 부흥 다물전쟁>
망국 남부여 부흥 노력
多勿戰爭(다물전쟁)
☯ 남부여의 잔존 변방성주들, 남부여부흥 다물전 돌입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전란에 모두들 이성을 잃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차츰 쓰러진 옛 왕조를 다시 다물[(多勿:회복)]하기 위하여 부흥군들이 일어났다.
그 중 무왕(武王)의 조카인 부여복신(扶餘福神)은 스스로 은솔에 올라 다물 전쟁을 강력히 이끌었다. 그리고 전 좌평 도침[(道琛) 혹은 자진(自進)]은 주류성(周留城)을 탈환하는 쾌거를 이룩하고, 두시이(豆尸伊)성을 되찾았다.
《남부여의 부흥 다물전》
0086
예상보다 빠르게 불붙은 남부여의 다물 전쟁은 남부여의 영토를 영구히 삼키려고 세워 놓았던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을 심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700년의 긴 역사 동안 동아(東亞)를 호령했던 백제, 남부여의 저력을 어찌 수만 명의 나당(羅唐)연합군으로 누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었기에 소정방은 10만의 주력군을 이끌고 허둥지둥 귀국길에 올랐던가?
역사에 자주 빠뜨리고 있는 당나라의 속사정은 다음 장에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하여튼 당나라의 소정방은 아직도 불안한 정복지의 주력군을 빼돌려 처음부터 남부여 공략의 목적이었던 북방 전선으로 향하였다. 당의 주력이 빠져나가자, 남부여의 상황도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661년 2월. 복신(福信)장군은 강서(江西)의 병사를 다시 모아 진현성을 탈환했고, 이 작전에서 유인원의 당군 1천여 명을 포위하여 전멸시키고 말았다. 일이 급하자, 유인원은 실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태종(太宗)은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잡찬[迊飡]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무훌(武欻), 욱천(旭川)을 남천주대감(南川州大監)으로 하여 대군을 파견하였다.
3월5일, 그 선봉대가 두량윤성(豆良尹城)에 이르렀으나 다물군의 기습으로 전멸 당했고, 이어 전군을 동원하여 성을 포위하고 36일간 싸웠으나, 끝내 복신 군을 이기지 못하였다.
《 당시의 전투 상황도》
0087
[상황도 지문 내용: 좌에서 우로]
두시이성: 좌평 정무(正武)의 두시이옥을 탈환하여 사비성의 목을 조름
진현성: 부여복신이 스스로 은솔에 올라 다물군(多勿軍)을 이끌고 661년 2월에 진현성을 탈환
주류성: 좌평(佐平) 도침[(道琛) 혹은 자진(自進)이라고도 함]이 백마강 하구를 지키는 최대 군성(軍城)인 주류성(周留城)을 다물함으로써 당(唐)이 점령하고 있는 사비성과 옹진성으로 당과 바닷길이 봉쇄되어 당군이 역 포위당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소위 동맹군을 형성했던 실라 측은 당(唐)의 남부여 점령이 장기화 되는 조짐을 간파하고, 형식적으로 다물군을 진압하면서 사실은 다물군이 당나라 점령군의 힘을 약화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서기전 19년 5월, 시조 비류천황(沸流天皇)이 대방 고지에 일으켜 세운 외백제(外百濟)로부터 시작하여 백제국(百濟國), 십제국(十濟國), 나라백제[奈良百濟], 남부여(南扶餘) 등의 파란만장한 왕조(王朝)를 거치며 동아(東亞)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백제는 지난 678년간의 화려했던 역사를 덧없이 잃고 말았으나, 아직도 변방의 여러 성주들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물전쟁(多勿戰爭)을 선포한 대장군 복신(福信)은 잔존 성주들을 주류성(周留城)으로 총집결시켜 다물군(多勿軍)을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1. 비류계(沸流系)와 남부여계(南扶餘系)의 구별 없이 전 부여인들을 총망라하여 부여의 재건에 목숨을 바친다.
2. 야뫼도[대화(大和)]와 탐라국(耽羅國)에 원군을 청한다.
3. 소성(小城)을 버리고 대성(大城)으로 집결하여 병력의 분산을 막고 군 작전에 통일을 기한다.
4. 다물군(多勿軍)의 총사령관은 우장군(右將軍)복신(福信으로 하고, 좌장군(左將軍)을 도침(道琛) 장군으로 하여 상(上)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로 한다.
5. 지금 의자대왕(義慈大王)께서는 당적(唐敵)들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長安)으로 끌려가 계시므로 다시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라엔 한시라도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천황이 필요하므로, 마침 아스카[飛鳥]의 일궁부(日宮府)에 계신 풍장왕자(豊璋王子)를 모셔다가 천황위(天皇位)에 세운다.
6. 당적(唐敵)의 주력은 곧 무너질 것이므로, 서천(舒川) 부여군(扶餘郡)의 각 성들을 즉각 다물하고, 임시 서울을 주류성(周留城)으로 정한다.
7. 복신(福信)은 본군 1만2천 명으로 주류성에 주둔하고, 도침(道琛)은 좌군 1만 명으로 임존성(任存城)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1만 명으로 진현성(眞峴城)에, 상여(相如)의 3천 명은 이례성(爾禮城)에, 지수신(遲受信)의 3천 명은 가림성(加林城)에 주둔한다.
다물군은 총 3만8천 명의 병력을 갖게 되었다.♣
☯ 왜도 야뫼도 나라백제의 남부여 다물전 지원 착수
한편, 야뫼도[大和]의 서울 아스카[비조(飛鳥)]의 단풍이 붉게 타올라 백제궁의 안팎을 곱게 물들이고 있는 10월 중순. 마침내 남부여의 비극이 제명천황(齊明天皇)에게 전해졌다.
보황녀(寶皇女)는 이 엄청난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빠 의자왕의 신변에 무엇인가 큰 변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의자대왕의 남부여에 무슨 변란이 있다면 야뫼도[大和]의 입장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보황녀(寶皇女:齊明天皇)는 오빠인 의자대왕(義慈大王)을 구하기 위하여 서울을 나니와[난파(難波)]로 옮겨가기로 하고, 불과 40일 만인 12월엔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것으로도 본국 남부여와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되어, 다음해 1월엔 또 다시 서쪽 끝까지 움직여 가니, 그곳은 나노쓰 항으로서 지금의 후쿠오카[福岡(복강)]이다.
《야뫼도의 남부여 다물전 지원 서울 이동도》
0087-1
본국을 지원할 수 있는 최단 거리까지 온 제명천황은 여기서 왕자 중대형(中大兄)과 중신겸족[(中臣鎌足): 겸자련(鎌子連)]에게 명하여 최단 시일 내에 최대한의 도해용 군선(軍船)을 조선하도록 독려하였다.
중대형은 어머님의 뜻에 따라 군선 제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 한편으로 어머님 천황(天皇)이 머무르실 궁전을 지쿠고강[筑後川(축후천)]에 지어 벌써 68세에 이른 노모(老母)의 괴로운 마음을 위로하였다.♣
☯ 실라의 남부여침략과 병행한 당의 가우리 공격 전황(戰況)
[편집자 주(註): 실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가우리의 남부여 지원을 막기 위해, 북방의 가우리에 대한 공격을 병행했지만 곤경에 처해, 남부여를 멸망시킨 주력 소정방군을 남부여 평정에 계속 주둔시키지 못하고 급히 회군시켜 가우리 공격 전선에 투입하게 되었다. 그런 남과 북의 양개 방면 상황에 대한 정리를 지도를 통해 보면]
가우리와 당(唐)의 대전 상황은 ‘가우리 자멸’ 편에 자세히 설명될 것이나, 우선 독자들에게 복잡하게 전개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여기에 개략적인 상황 전개를 소개한다.
다음에 표기된 순서대로 화살표를 따라가면서 차례로 읽으면 한눈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방 패권전 제12차 대전의 판도》
0088
[상황도 속의 지문들]; 전황 순서 ()번호 대로(흑색은 가우리 전선)
(1) 660년 6월. 당(唐)의 설필하력은 북방군을 이끌고 가우리의 공격에 나섰고, 남방군은 소정방을 대장으로 하여 13만 대병을 동원하여 백제[당(唐)은 남부여를 백제라 불렀음] 공략에 나섬
(2) 6월 실라의 법민 왕자가 제1군 5만 병력으로 황해[?남해]를 돌아 [황해의] 덕물도에 도착하여 소정방의 당군과 연합군을 편성함
(3) 나.당 연합군 33만 명은 부여를 격파하고, 의자왕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음
(4) 설필하력의 북방군은 660년 11월까지도 요동을 넘지 못하고, 가우리의 완강한 저지를 받음
(5) 소정방은 남부여의 항복을 받고,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황급히 남방군의 주력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 때 의자왕과 태자 융(隆) 그리고 부여의 많은 기술자들을 데리고 갔다.
(6) 소정방의 당군이 빠져나가자, 복신의 다물군은 부여성(扶餘城)을 역 포위하였다.
(7) 당왕은 남방군을 빼내어 북방군이 고전하고 있는 가우리 전선에 투입한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27만의 대군으로 남펴라를 직접 급습하여 가우리군의 분산을 노렸다.
(8) 야뫼도[大和]의 아스카백제는 서울을 나니와[難波]에서 나대진(娜大津)[나노쓰]으로 옮기고, 남부여의 다물전쟁(多勿戰爭)을 지원하기 위하여 전선 제조에 돌입함.
(9) 661년 8월. 요수 전선의 오랜 소강상태를 깨고 [가우리의] 남생(男生)군이 드디어 설필하력의 [당나라] 북방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
(10) 662년 정월. 북방군이 남생 군에게 격파당하고, 소정방의 남방군이 남펴라에서 역포위 당하여 극심한 곤경에 빠지자, 당은 방효태(龐孝泰)를 대장으로 하여 13만의 수군을 동원, 가우리의 왕성인 펴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가우리의 역습을 받아(제2의 살수대첩) 13명의 아들들과 함께 전멸 당하고 만다.
(11) 소정방의 남방군도 가우리의 철저한 역포위에 걸려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믿었던 방효태가 살수에서 또 다시 섬멸 당하자, 할 수 없이 동맹군인 실라에게 식량을 구걸하게 되었다.
(12) 실라의 태종왕은 김유신 등 9명의 장군들을 동원하여 벼 2천 섬을 보내어 소정방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13) 실라군이 칠중하(七重河)에 도착할 무렵, 가우리의 복병을 만나 싸움에 크게 패하고, 모든 식량을 빼앗기고 쫓겨 돌아옴.
(14) 소정방의 27만 명은 굶주림으로 태반을 잃고, 할 수 없이 바다로 탈출하여 구사일생으로 도망갔다.
※ [남부여 투입 남방군의 가우리 전선 재투입 전황]
당의 대장군 소정방은 실라에 식량을 구걸하게 되었고, 숙적 백제를 정벌하는 데 도움을 준 당나라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태종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군 구출 작전을 폈다. 김유신은 죽지랑을 대장으로 인문(仁問), 진복(眞服), 양도(養圖) 등을 부장으로 하여 3개월분의 식량을 신고, 서기 661년 12월에 금성을 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가우리의 빈틈 없는 첩보망에 걸려, 칠중하까지 진출하였을 때 가우리의 매복 작전으로 크게 패하고, 식량만 빼앗긴 채 간신히 도망쳐 왔다.
소정방도 더 이상 기대할 만한 희망이 없으므로 결사적으로 가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바다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소정방과 함께 왔던 대부분의 당병은 가우리 땅의 귀신이 되고 말았다. ♣ §
2020.6.24.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