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미국 대통령, 닉슨과 레이건
니콰라과의 오르데가는 소모사 독재정권의 붕괴를 주도한 혁명가였지만 그와 동시에 재집권 후에도 종신집권 독재를 노리고 있는 권력욕의 화신이다.
오르데가는 혁명가 정신의 상실과 함께 닉슨 대통령과 CIA가 지원하는 극우 보수파에 의해 권력을 상실했다.
혁명가 정신을 내다 버렸다는 말 자체는 이미 1990년대부터 듣고 있었다.
니카라과에서 존경받는 신부로 손꼽히는 인물이자 해방신학의 대부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이나
1980년대에 산디니스타 해방운동 전선으로 총리직을 지냈던 세르히오 라미레즈, 1980년대 당시 산디니스타 해방전선 소속으로 수백곡의 당음악과 갬페인 송을 작곡한 민속음악가 카를로스 메자 고도이는 1990년대 초반에 오르테가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따로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이라는 정당을 차렸다.
당시 유명 인사들이 대거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선전이 기대 되었지만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서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은 한 자릿수 득표를 확보하는데 그치는 등 별다른 세를 얻지 못해서 그저 명망가들의 정당 정도로 그쳤다,
현재도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이라는 정당은 지속되고 있지만 의회에서 1석도 확보하지 못할 정도로 세가 약하다.
아옌데는 칠레의 의사이자 정치가. 칠레 역사상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서 빈부격차가 극악한 칠레의 현실을 개혁하려다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의 쿠데타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오늘날 칠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사회주의 개혁의 성과로 칠레의 연평균 국민총생산 성장률을 8% 이상까지 치솟게 했다.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5% 이하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이렇게 칠레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하고 있게 되자, 인민 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4월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 정부인 아옌데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보수 언론과 기독민주당 등 야권 후보에 대한 미국의 재정 지원에도 굴하지 않고 이뤄낸 전례 없는 성과였다. 칠레 정치에서 집권당이 임기 중 지지율이 상승한 것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옌데는 당선된 직후 개헌을 제안했다.
공무원과 정치인에 대한 주민소환제도를 도입하기로 했고, 노동자 조직과 시민운동 진영에도 정치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기로 했다.
국방 분야에서는 칠레 민중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주권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일련의 사회개혁 프로그램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남녀 동일임금제, 전국민 생활임금제, 사회보장제도 확대, 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이 있었다.
대규모 신규주택 건설 사업도 계획했으며 민간은 물론 민관 합작회사도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차별을 당해온 여성과 혼외 자식에게도 평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국가 차원의 공교육 제도가 입안됐고, 성인 문맹을 뿌리 뽑기 위한 문해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아옌데의 초기 성과는 미국의 고립과 경제제제 그리고 보수우익의 고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집권 2년차가 되자, 지속되는 경제 고립으로 인하여 칠레 에스쿠도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각종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로 다국적 기업들의 반발과 의도적인 계략 및 공작으로 인해서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칠레 자본가 계층과 보수 야당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다국적 기업들 역시 반발하여 칠레에 대한 경제 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적 문제는 당연히 극심한 경제적 고립 때문이었다.
아옌데 전기 작가인 빅터 프랭클에 따르면, 이러한 경제위기의 제1의 원인은 칠레 내부의 문제보다 미국의 경제제제와 우익 세력 지원이라는 외부적 조건이 가장 컸다고 한다.
더욱이 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 정권을 못마땅하게 여긴 판국에 아옌데의 반미정책과 다국적 기업에 대한 강제적인 국유화 정책에 반발해서,
칠레 경제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1970년 아옌데가 당선되었을 때, 리처드 닉슨은 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만~100만 달러 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세력에게 막대한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닉슨정부와 CIA였다. 이런 행위에는 당시 칠레에 진출해 있던 미국계 초국적 기업도 자금을 보탰고, 거짓 선동이 '적색 공포'를 불렀다.
심지어 눈을 가린 죄수들이 총살당하는 장면이나 소련의 탱크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진주하는 모습 등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언론을 통해 전파됐다.
그런데 그것이 3년 후에 실제로 일어났다 물론 이렇게 조작된 거짓 선동이 아옌데의 당선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회를 극단적인 분열 상태로 몰아가며 금융시장을 패닉에 빠지게 만드는 목적에는 성공적이었다.
아옌데는 미국 레이건과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테타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