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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3일(성령강림절 후 스물한 번째 주일)
호세아 1:1~2:1
이해를 넘어선 순종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호세아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전 8세기경이었습니다. 이때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군사적으로도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주변 나라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왕 이후로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많은 왕들 가운데 여로보암 2세 때처럼 부강했던 시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유했던 북이스라엘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타락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 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2절).”라고 고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은 영적 음란의 성격이 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모든 것이 풍족해지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혹 우리도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음란한 이스라엘 민족의 전철(前轍)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뜻밖의 말씀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여러분, 과연 호세아가 누구입니까? 원래 ‘호세아’란 이름은 “여호와가 건지신다.” “여호와가 도우신다.”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호세아 선지자는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고백했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호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호세아의 신실함에 비하면 너무나 가혹한 명령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호세아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왕궁을 들락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외치던 사역자가 아니었습니까?
한 명은 왕궁을 드나들며 쟁쟁한 권력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외쳤지만, 다른 한 명은 사역을 그만두고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식들을 낳아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갈구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요? “이왕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좀 더 큰 무대에서, 좀 더 폼 나게 사역하겠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이런 마음 안 가져 본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신학교 들어갈 때 큰 목회 해 보겠다고 마음 품어보지 않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대부분의 목회 후보생들이 조용기 목사님처럼 큰 목회를 한번 해보고 싶어 하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같은 부흥사가 돼보고 싶지 않았겠어요?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교회를 개척해서 아침에 눈 뜨면 사모님과 전도 나가고, 점심때 집에 돌아와서는 사모님과 함께 국수를 삶아 먹고,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전도 나가는 생활을 반복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개척교회하고 있던 때에 함께 공부했던 신학교 동기 목사님들은 제법 규모 있는 교회에 청빙을 받아 세상 말로 잘 나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어느 날, 하나님께 “하나님, 이거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똑같은 신학교 다니고, 더군다나 아무개 목사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더 공부도 못했던 친구인데, 지금 나는 목회의 밑바닥을 기고 있고, 그 친구는 저렇게 잘 나가면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하고 불평을 했답니다.
어느 날, 사모님이 조용한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길래 이 목사님이 속으로 “아니, 매일 만나는 사람이 왜 갑자기 커피숍으로 나를 불러내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지? 이거 뭐 큰 문제가 있나 보다.”하고 나갔더랍니다.
그런데 아니라 다를까,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은 이제 지쳐서 더는 목회를 못하겠으니 자신과 이혼을 해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내 아내가 오죽 힘들었으면 저랬을까?”를 생각하니, 이 목사님은 아내가 불쌍하기도 하고, 못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해서 자신도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젊어도 너무 젊었을 때 갑자기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신앙도 좋고 성품도 좋아서 교회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봉사하는 그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편을 잃고 어린 자녀들 두 명을 키우려니 얼마나 막막했는지 모른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권사님은 평상시에 안 해본 장사도 하고, 허드렛일도 하면서 근근이 아이들 키우고, 공부시키고, 취업을 시켰어요. 그런데 큰돈이 들어갈 때면 항상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떼를 썼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도저히 두 자식 못 키웁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야 해요. 하나님이 내 어린 것들 책임 져 주세요.” 이렇게 얼마나 많은 세월을 울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좀 다른 방법으로 역사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꼭 그런 방법 외에는 안 될까요?
그런데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가 대단한 이유는 도저히 이해되지도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그가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니까,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음란한 여인 고멜이 아들 하나만 낳은 게 아니라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다시 아들 하나 이렇게 음란한 자식을 셋씩이나 낳았어요.
상상해 보세요. 호세아 선지자는 자식을 셋이나 낳을 정도로 오랫동안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어요. 우리가 보통 큰맘 먹고 한두 번 정도는 순종할 수 있어요. 물론 그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처럼 오랫동안, 그것도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세아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했다고는 오해하지는 마세요.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희망찬 미래가 보인 것도 아니지요. 어찌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이미 실패가 예견된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어요. 자녀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몰라요.
호세아의 큰아들 이름은 ‘이스르엘’이에요. 그 뜻은 “하나님이 흩어놓으신다”입니다. 공교롭게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여로보암의 선친이었던 예후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예후는 권력을 잡기 위해 아합왕 일가족을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죽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고 예언하시면서, 이제 호세아의 큰아들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어주셨어요. 큰아들의 이름처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저히 흩어버리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큰아들 이름치고는 이 얼마나 비참한 이름입니까?
또 둘째 딸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그녀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로’는 부정의 뜻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루하마’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루하마’가 무슨 뜻이냐면 히브리어로 ‘긍휼’의 뜻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둘째 딸의 이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비참한 이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면서 상대적으로 남 유다 백성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게 북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에서는 더 큰 아픔이고 더 큰 상처에요.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는 절대로 긍휼을 베풀지 않겠지만, 옆집에 사는 김 집사에게는 반드시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또 셋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9절에 보면, 셋째 아들의 이름이 ‘로암미’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로’라는 말은 부정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암미’는 말 그대로 ‘암미’하지 않겠다는 뜻인데요, ‘암미’는 히브리어로 ‘내 백성’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셋째 아들의 이름 ‘로암미’는 “너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뜻이에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름이지요?
자! 하나님이 왜 이리 화가 나셨을까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물질적인 풍요는 누렸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서 영적인 음란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하나님으로, 음란한 여자 고멜을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들을 자기 백성을 배척하시는 하나님의 심판행위로 나타내신 겁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자신의 삶 전체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말 그대로 만신창이의 가정이요, 만신창이의 사역이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너무나 불쌍해요.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렇게 큰 슬픔을 주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비록 홍해에는 비교되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이라는 엄청난 장벽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은 참으로 독특한 강입니다. 일반적으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강들은 바다보다 해수면이 높아요. 그래서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 유독 요단강만은 인근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200미터나 낮습니다. 그런데도 요단강은 연중 물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바다로,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요단강과 연결된 헤르몬산의 눈 녹은 물이 봄에는 강 언덕에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만난 때가 곡식 거두는 시기였으니까, 이때는 강물이 강둑에 철철 넘칠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세요.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방법으로 요단강을 먼저 갈라주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강을 건너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믿음으로 요단강물을 밟고 멈추면 그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갈라주시겠다는 겁니다.
아니, 그러다가 일이 잘못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으면 어떡하려고요? 그냥 하나님이 먼저 강물을 갈라주신 후에, 믿음으로 강바닥을 건너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신앙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믿으면 그것은 믿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순리를 따라가는 거예요.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순리를 따라 살기도 원하시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순리를 거스르는 믿음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연어가 거대한 물줄기는 거슬려 자신의 몸을 날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만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우리가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걷기를 원하십니다.
한자로 ‘사명(捨命)’이란 단어는 ‘버릴 사(捨)’ 자에, ‘목숨 명(命)’ 자를 쓰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호세아처럼, 목회자로서의 원대한 꿈과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겠노라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혹 내가 이미 실패가 예견된 사역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명 자에게 요구된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위해 나 자신까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목숨은커녕 조그마한 물질 하나, 시간 하나, 재능 하나 드리지 못해서 쩔쩔매지는 않습니까?
혹 우리가 입술로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조금만 더 축복해 주셔야 내가 마음껏 물질로, 시간으로, 재능으로 봉사할 수 있겠습니다.”라며 거짓 핑계를 대지는 않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말로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 하겠어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을 위해 내 삶이 엉망이 되어야 한다면, 아니 엉망은 둘째 치고 조금이라고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간데없고 내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한 우리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만났던 한 분은 봄, 가을만 되면 몇 주씩 주일에 교회를 빠집니다. 알고 보니까, 이분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 게이트볼 선수였습니다. 이분은 봄, 가을만 되면 게이트볼 대회가 집중되어 있어서, 제가 연락해 보면 어떤 때는 전라도에 가 있고, 또 어떤 때에는 강원도에 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더구나 게이트볼은 단체경기인지라, 교회의 몇몇 집사님들이 한 팀이 되어 경기를 나가다 보니 빠져도 단체로 몇 주씩 예배를 빠지는 겁니다. 이분들이 경기가 없는 날에는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 저희가 이번에 어디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아깝게 2등 했어요.”하면서 자랑 아닌 자랑을 했습니다.
여러분, 참고로 게이트볼은 백발의 노인들이 하기 좋은 운동입니다. 그런데 아직 60도 안 되신 분들이 그 백발노인들과 함께 시합해서 2등을 했다면 그것을 잘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고백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귀한 향유 옥합을 깨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지속적인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종의 삶입니다.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라 하시면 사랑하고, 하나님이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하고, 하나님이 내려놓으라 하시면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호세아 선지자 한 사람의 헌신이 정녕 부질없는 짓이었나요? 앞뒤 안 재고 하나님께 헌신했던 호세아가 결국 망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 이해를 넘어선 순종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호세아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10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것이라”
이어지는 11절에서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7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의 말씀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의 말씀을 여호와를 떠나 음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선포해 주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징계를 내리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은 단 한 시도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의 약속을 천년이 훨씬 지난 후에도 잊지 않으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놀라운 복을 예비하시고, 죄에서 돌이키지 못할 때는 때려서라도 돌아오게 하셔서, 기필코 하나님의 보장된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과연 누구이기에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속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음란한 고멜과 같은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저주와 부정을 끊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호세아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호세아 선지자의 자녀들 가운데 로암미와 로루하마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의 자녀들 이름 가운데서 ‘로’자를 빼 주셨습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듯이, ‘로’는 ‘부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안 되는 인생’, ‘안 되는 가정’, ‘안 되는 사업’ 모조리 안 되는 역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안 되는 부정의 꼬리표’를 떼어 주십니다.
비록 바다보다 해수면이 낮은 요단강이라 할지라도, 한겨울 헤르몬산을 덮었던 엄청난 양의 눈이 녹아 강물을 채우면 그 강에서 물이 흘러 바다를 채웁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믿음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