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길을 잃고, 산에서 길을 찾다
▒ 흐르는 곡 : OST-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Loving You Makes Me A Better Man-Vince G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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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떠난다고 답답함이 사라지겠는가?
항상 그 만큼만 마음주고, 그 만큼만 거두어 들일 것이다.
그리고 투명해지기 위해, 혹은 유연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항상 그랬다.
마음은 그 질량이 정해져 있다.
행복함과 즐거움 뒤에는 그 만큼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숨겨져 있었고
가지려 하면 잃어야 했고, 놓으려 하면 손 안에 꼬옥 웅크리고 있었다.
바쁘고 정신 없는 가운데 얻는 것이 있었고,
한가롭고 평온함 뒤에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공평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행복하고 싶으면 그 만큼의 슬픔도 견딜 수 있게 강해져야 한다.
슬픔이 무뎌진 만큼 행복 역시 무디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 만큼만 기대하고, 그 만큼만 각오하고, 그 만큼만 인정하고...
개인약수산장
어제 오후 울산을 떠나 밤 늦게 내린천 상류 미산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아직 개장하지 않는 폐교된 미산분교 야영장에 설치된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행 5명은 호사스러운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차로 7km 가량
산 안쪽으로 이동한 후 개인약수산장을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한다.
늦은 봄이라지만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곳의
맑고 청아한 아침 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개인동계곡
바쁜 일상을 떠나 오랜만에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만났다.
느림이 용서되는 이곳엔 모든 것이 더디게 흐른다.
산장에서 약 40분 거리인 개인약수까지의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고 오름길도 완만하다.
냉기를 뿜어내는 계류는 청량하고 신선하기 이를 데 없는 계곡이다.
물의 빛깔, 숲의 신록, 물가 바위에 끼인 이끼의 푸르름이
작은 폭포의 하얀 포말과 대조를 이룬다.
햇빛이 있는 한낮에도 울창한 숲길은 어둠이 짙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이라도 이곳은 더위를 모른다.
그만큼 이곳은 지대가 높고, 골이 깊은 곳이다.
인간의 욕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했던가?
아무리 채워도 허기지고, 그래서 더 붙잡고 싶은 추억의 덩어리들...
시간이 흐르면 그 추억들은 기억의 그물망을 빠져 나간다.
한 번 물어보자.
인생이라는 긴 여로를 버겁게 건너는 당신에게는 그런 '정거장' 이 있는가?
언제든 찾아가면 포근하고 품 넓은 가슴을 내어주던
안식이 되어준 그런 장소가 있었던가?
개인약수
개인약수터다.
위장병과 당뇨병, 신경통 등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샘(泉)은 암·수 한쌍이 나란히 있는데,
암약수는 물이 고이지 않아 그냥 흘려보내며 잘 마시지 않는다고 전한다.
이곳 주변에는 100~200년 묵은 전나무, 소나무, 가문비나무 등의
우람한 노목들이 죽죽 늘어서서 서로 키재기를 하고 있다.
등산로는 왼쪽으로 골을 따라 이어지며 오를수록 물줄기가 가늘어진다.
점심 때 끓여 먹을 라면 물을 일찌기 수통에 가득 담는다.
방태산 골짜기로 봄빛이 부서져 쏟아진다.
나무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빛줄기가 흩어졌다 모인다.
이제사 봄기운 머금은 초록 잎들은 빛을 튕겨내고
부서졌던 초록빛은 바람 소리와 함께 산 너머 먼 여행을 떠난다.
떡갈나무 숲에서 태어난 초록빛은 가시덤불 군락지에서 연두색으로 물든다.
이곳의 하늘과 산 속은 시시각각 황홀한 색을 연출한다.
박새풀
방태산 주능선 삼거리에 올라섰다.
산장을 출발하여 쉬임 없이 걸으면 약 2시간 거리다.
걷는 산길 옆에는 시종일관 박새풀 군락지로 끝 없이 이루어 졌다.
산 사면은 초본류로 뒤덮여 흙바닥을 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중간중간 맷돼지들이 파헤친 속 살이 드러난 현장이 보인다.
마치 굴삭기로 작업한 듯한 엄청난 괴력의 힘이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허리를 뒤틀면 깃대봉 방향이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주억봉으로 향한다.
우리는 배달은석 초원지대를 다녀오기 위해 배낭을 벗어 두고
가벼운 걸음으로 서쪽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우리가 사는 남쪽에는 꽃피고 진지가 언제인데
이곳의 철쭉은 아직도 봉오리인채 이제사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주능선 평균 고도가 해발 1300m를 유지하는 북쪽 고지대라
그만큼 이곳의 봄은 늦게 오고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그렇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영화로웠던 시간은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지지 않도록 진정하고픈 말은 마음 속에 가두는 법이다.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순해지고 싶다.
나를 향한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손, 당신의 향기를 닮고 싶다.
당신과 함께 내 삶의 목마름을 잊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목마르지 않는 봄을 만나고 싶다.
배달은석
배달은석을 넘으면 갑자기 넓은 초원이 펼쳐져 놀라게 한다.
깃대봉 아래 안부는 곰배령의 초원에 버금가는 초원이다.
방태산은 빼어난 절경은 없지만 때묻지 않은 자연과 웅장한 산세를 지니고 있다.
깊고 깨끗한 골짜기는 원시 그 자체이다.
이곳에서 시작한 물은 한니동계곡을 타고 미산 내린천으로 흐른다.
미산리는 이름도 아름다운 '美山'이다.
벌깨덩굴꽃
산허리를 돌아온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난다.
이제 방태산에 봄꽃들은 하나둘씩 질 것이고, 그 뒤를 이어 감자난초, 은대난초, 앵초, 요강나물,
쥐오줌풀, 하늘말나리, 동자개, 솔나리가 또다시 천상의 화원을 이루며 만개하리라.
무인도에 가고 싶은 것처럼 문득 깊은 산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인적 드문 산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골 깊은 산이 지닌 근원적인 정서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외계에서 고립된다는
기분 좋은 단절감이 알맞게 섞여 부합되기 때문일 것이다.
적가리골
주억봉 주능선 위에서 내려다 본 방태산의 적가리골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다.
마치 쥘 부채를 펼친 듯한, 운석이 떨어진 듯한 타원형의 분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함지박처럼 생겼다.
인제군 서화면의 펀치볼에 버금가는 기묘한 지형이다.
주억봉
주억봉(1444m) 정상에 섰다.
일부 사람들은 서쪽 끝에 위치한 깃대봉(1435m)을 정상이라 하는데,
방태산에서는 이 봉우리 주억봉이 제일 높아 정상이라 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동네 뒷산을 올라도 어김없이 있는 번듯한 정상석(頂上石)이 큰 산인 이곳 방태산에는 없다.
작은 나무판에 글씨를 쓴 정상 표시가 초라하지만 차라리 정겹다.
원시에 가까운 울창한 숲이다.
구룡덕봉으로 향하는 주능선은 빽빽한 수림으로 인해 좀 채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나물이 지천으로 나는 봄철이면 나물채취하는 많은 사람들이 월둔에서
구룡덕봉으로 차로 올라 고요로 잠든 산 속의 정적을 깨고 있다.
구룡덕봉에서 뒤돌아본 주억봉이다.
장쾌한 주능선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동쪽에서 서쪽으로 힘차게 치닫는다.
동으로는 응복산과 가칠봉이 눈에 잡히고, 황소 잔등 같은 육중한 능선이 일망무제 거칠 게 없다.
여기에서 임도를 따라 개인산 방향으로 향하다가 잘룩한 안부에서
오른쪽 어두원골로 들어서는 들머리를 찾아야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지체할 수만 없어 방향만 설정한 후 나무가지와 성가신 넝쿨을 헤치고 길 없는 숲으로 내려선다.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과 휴양림에서 올라 온 사람들로 웅성인다.
구룡덕봉과 주억봉 사이를 제외하고는 방태산 전역은 인적이 끊겨 적막하다.
오른쪽 아래로 개인산과 방태산이 품은 어두원골이 아련하다.
산머리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걸어온 눈 앞에 아지랑이 아른거린다.
배달은석에서 걸어온 구룡덕봉까지는 기분좋은 길이다.
행복한 길이다.
"산은 들을 비워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슴을 말린다"고 생각하던 길이다.
구룡덕봉에 바라본 가칠봉과 응복산
세상만사가 구름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우리는 그저 그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무르는 존재일 뿐이다.
억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도 자연의 흐름을 거스러지 않으면서 살았으면 한다.
8시간을 걸어 어두원골로 내려서는 발길이 무겁다.
아직도 2시간 이상은 희미한 계곡길을 따라 가야하기 때문이다.
산 속은 바람소리 새소리 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까지도 헤아린다.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은 바람과, 흔들리는 풀잎이 사이좋게 속삭이는 곳.
그리고 창공을 날아온 철새들이 날개를 푸는 곳.
이 봄의 방태산은 고단한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어두원골
고요로 가득찬 어두원골이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명의 세계와는 완전 단절된 곳이다.
산길은 이어지다가 끊기고, 끊겼다가 이어지는,
끝 없는 계곡 바닥을 타면서 수 없는 물을 건넌다.
산벚꽃이 드문드문 피어있고
연초록 잎새를 띄운 나무들이 해발이 낮은 산의 신록에 초봄과 비슷하다.
공기는 산소로 가득하여 한 여름에 한 열흘 정도 이곳에 머물어 있으면
그 이상의 피서는 없을 것이다.
오르면 내려가고,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인데
우린 왜 그때마다 당황하고 아픔을 느끼게 될까?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가만히 서 있으니 바람이 자꾸 귀 좀 빌려 달라고 한다.
바람의 장난에 나무도 몸이 근질거리나 보다.
바람 소리에 움칠거렸던 풀잎들도 하나 둘 고개를 내민다.
산이 사람을 품었나. 사람이 산을 품었나.
풍경을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 자리를 깨닫는 것.
어제 오늘 내 눈 속에 들어온 풍경은 무한 창공에 펄럭이는 바람이기도 했고,
푸른 하늘에 수직으로 만나는 낮달이기도 했다.
금낭화
개인산장 위에 위치한 별장지붕이 보인다.
이윽고 하산지점에 다다른 모양이다.
배달은석을 올라 구룡덕봉에서 어두원골 산행길은 쉬엄쉬엄 걸어서 돌아온
10시간 남짓한 거리다.
나른한 심신과 뻐근한 다리는 또다른 행복감으로 충만하다.
아직 내 안에는 벗지 못한 번뇌들이 가득한데
어찌하면 눈 앞을 막아서는 어리석음에 깨어 새처럼 하얗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
뒤돌아보니 방태산은 언제 다녀 갔느냐는 듯 묵묵히 말이 없다.
그리운 것들은 우리 안에, 내 가슴 속에 모두 있었다.
사람이 아름답다.
자연이 아름답다.
방태산이 아름답다.
첫댓글 푸르른 신록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잘~~보고 감니다^^
아름다운 글 잘 감상했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고.............또 산에서 길을 찾다.....!" 참 마음에 닿습니다... 글을 좀 퍼갑니다..
오랜만에 좋은 글 올려 주셨군요...너무나 편안한 즐거움 나눠 주셔서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마음을 정화 시켜주는 글과 사진 참으로 고맙게 보고 느끼고 감다...부상당한 발 땜에 당분간 산에 못 가서 더욱더 산이 그립네요...
허둥대는 제 마음을 진정시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한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저 펀치볼 위에서 군생활 했는데 어떻게 펀치볼을 잘아시네요....새벽에 눈을 뜨면 매일같이 보았던 펀치볼의 아름다운 운해가 님 덕분에 생각 납니다...그리고 좋은글과 사진 즐감 하고 갑니다 ^**
좋은글 사진 예를 다해서 감사드리고 퍼갑니다
한돌님! 시같은 사진, 글같은 사진 ! 당신은 삶이 무언지 아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