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5일 국회법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곪아터진 정치권을 향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당리당략과 이해득실의 나눠먹기 정치가 입법권을 담보로 거래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자 분노였다. 2년여 동안 지켜본 결과물이자 이대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감히 생각조차 못할 만큼의 메가톤급 폭탄발언이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인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6일 거의 모든 언론사가 여야 정치권과 박 대통령을 동시에 비판하는 양비론으로 사설을 장식했다.
사설의 논조는, 국회가 공무원연금 개정안을 정략적인 흥정꺼리로 삼았다는 것으로 요약하며 정치권을 비판했다. 즉 본질과 상관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위헌의 소지까지 우려되는 국회법 개정안을 연계시킨 새민련과 이를 선뜩 받아들인 새누리당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왜 여야와 대화를 하지 않고 결과에 대한 거부감과 불평만 하느냐는 것이 공통점이다.
특히 박 대통령의 초강도 발언에 대해 타협이나 대화보다는 공격과 대결을 선택했다며 향후 국정 차질을 우려했다. “당선 뒤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는 표현은 심하다고 지적했다. 어제 박 대통령은 “정치의 문제가 경제와 민생을 위협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정치권에서는 정부 비판과 반목만을 거듭하고 있고,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 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을 빅딜 하고 통과시키고 있다”고 여야를 같이 공격한데 대한 언론사들의 엇비슷한 반응이다.
예상대로 새민련 문재인 대표는 “박 대통령의 거부권은 국민에 대한 거부권”이라며 “단호히 맞서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표의 독선에 정면 반발하며 최고위에도 불참했던 이종걸 원내대표도 자연스레 동석해 박 대통령을 ‘곱빼기 막말꾼’으로 매도했다. 존재감이 바닥났던 안철수 의원도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을 탈당하라’며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나락 직전의 새민련이 박 대통령의 강수로 살아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사퇴를 요구했던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인간적으로 배신자다. 전국구 의원을 지역구 의원으로 발탁해 당선시키고 당 대표 비서실장으로 성장시킨 은혜는 차치하자. 당명(한나라당⟶새누리당)과 상징색(파란색⟶빨간색)을 바꾸는데 대해 정면으로 반대했으나 그 같은 과감한 혁신을 통해 총선과 대선에 승리했다. 청와대를 향해 ‘얼라(어린애의 경상도 사투리)들’라고 말했다. 이는 대통령도 포함되는 표현이다. 원내대표가 되면 청와대와 찰떡궁합이 될 것이라며 표를 호소했다. 그러나 국회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 대통령의 혁심공약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인간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언행들이다.
제1야당인 새민련은 박 대통령 집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 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을 빅딜 하고 통과시키고 있다”고 비판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을 철저히 악용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인가? 1차적으로 새누리당이 유승민을 감싸는데 있다. 이는 곧 대통령과 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오늘 유승민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죄했다. 그러나 사죄한다는 말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의 권위가 걸린 문제다. 무슨 짓을 하고도 사과하면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통령의 권위는 곧 국가의 통치권과 직결된다. 당 대표나 원내대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책임을 부여받은 자리다. 그럼에도 대통령에게 수모에 가까운 행동을 일삼고도 용서를 바란다? 사퇴가 정답이다.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메르스 사태로 29%로 떨어져 회복불능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26일) 발표에서 33%로 30%대를 거뜬히 회복했다. 특히 의미 있는 것은 메르스 사태가 지속되고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이 행사되면서 유승민 사퇴 압박과 새민련의 재의결 촉구가 있는데도 상승세를 탔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그만큼 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기대는 크다는 반증이다. 유승민의 사과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對)정치권 강수를 계기로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희망의 국회로 재탄생해야 한다. 언론도 큰 안목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두리뭉실한 양비론으로서는 약삭빠른 정치권을 정도로 유도할 수 없다. 오늘의 경우도 그렇다. 여야 정치권의 나쁜 버릇만 질타해야 했다. 대통령의 문제점은 그것대로 달리 지적하면 된다. 신문부수와 시청률에 신경 쓰지 않는 고급언론이 절실히 다가온다.
특히 유의해야할 것은 대통령은 정치인이기도하지만 국가 원수다. 입법 처리에 있어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통사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입법은 국회의원의 몫이자 책무다. 입법에 있어 국가와 국민만 바라보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박 대통령의 강조점도 바로 이것이다. 다만 대통령이 여야 수뇌부와 자주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새민련의 철저한 당리당략 절대주의가 변하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언론은 이 근본 문제부터 낱낱이 파헤쳐 비판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언론의 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