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술라는 가난한 로마 사람들이 살던 집이다. 낱말 insula는 라틴어로 '섬'이란 뜻으로, 사방이 거리와 골목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었다. 대개 3층 이상의 건물로 1층에는 가게가, 2층부터는 살림집으로 작은 방들이 있었다. 그 작은 방마다 한 가족이 사는 것이다. 도무스와는 달리 창문으로 채광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리도 없이 그냥 열린 창문이었다. 보통 인술라의 1층은 돌로, 그 위층부터는 모두 나무로 지었다. 공화정 시대의 작가들은 인술라의 위험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인술라의 붕괴나 화재 사고는 흔한 일이었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
지방과 시골에서 로마로 밀려드는 주민을 수용해야만 했던 후기 공화정 시대에는 일종의 로마식 임대 아파트인 ‘인술라’가 등장했다. 도로 주위를 둘러싼 주택 블록인 인술라는 최고 10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1층에는 대개 상점과 공장이 있어 도로를 향해 열려 있었고, 외부 계단을 통해 서로 연결된 위층들은 작은 공간으로 분할된 숙소였다. 팔라틴 언덕의 ‘리비아의 집’에 있는 프레스코화에는 여러 층의 집들에 둘러싸인 당시 로마의 거리가 묘사되어 있다. 층을 이룬 테라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건물 전면은 많은 문과 창문으로 되어 있으며 주두(柱頭)를 장식한 기둥과 몰딩 기법으로 꾸며졌다.
인술라의 숙소는 비좁고 불결했으며 저급한 건축자재로 인해 붕괴 위험이 높아서 살기에 매우 불편했다. 당시 로마의 아주 세련된 주거 기준 및 생활 기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은 거리의 우물에서 길어와야 했고 그나마 직접적인 도관은 1층에만 있었다. 변소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층계참에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클로아카 막시마(로마 계곡의 배수를 위해 기원전 578년에 땅 속에 매설한 하수로)에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난방과 요리도 어려웠다.
로마의 날씨는 추웠는데 창문의 열린 부분을 유리로 막는 일도 드물었고, 있는 곳이라고는 이동 가능한 숯냄비와 작은 난로뿐이었다. 층수가 높을수록 임대료는 쌌지만 주거는 더욱 불편했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주거 건축물은 돈벌이가 되는 투기 대상이었다. 크라수스 같은 건물 임대 사기업자들은 붕괴 위험이 높은 허물어질 듯한 집을 마구 지어 터무니없는 이익을 챙겼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하물며 야생동물도 들판이나 공중에서 그들의 동굴과 은신처를 가지는데,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어갈 인간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불평을 쏟아내곤 했다.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 곳, 밤에도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 로마에서 어두컴컴한 구덩이에 살면서 지불하는 1년치 임대료면 소도시에서 호화로운 집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으며, 화재에 대한 걱정도 없기 때문이다. 로마는 항상 화마의 공포에 시달렸다. 숯냄비, 양초와 횃불은 항상 위험요인이었고, 불을 끄기 위한 물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번 물이 났다 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도무스
대부분의 로마 서민이 인슐라에 살았다면 부자들은 도무스Domus라고 부르는 개인 저택에서 살았다.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가 카이사르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낄낄푸스의 주택이 바로 도무스이다. 일반적으로 단층인 도무스는 현관을 들어서면 커다란 홀이 있고 그 주위에 방들이 있는 공적인 공간과, 조금 더 안쪽에 있는 안마당을 중앙에 두고 방들이 들어서 있는 사적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형 저택이었던 도무스에는 소수의 귀족들이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무스는 로마의 3분의 1의 면적을 차지했다. 그 외 온갖 종류의 공공 건물이 로마의 4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하니, 대다수 로마 시민의 거주를 위해 사용된 토지는 전체 로마 면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로마의 인구에 관해서 다층의 인술라들이 많이 있으니 그것만큼 곱해서 인구를 추정해서 할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울은 수십층 이상의 고층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추정해서 그것을 그대로 곱하게 된다면 어떤 양상이 될까?
1㎢당 50만으로 잡는다면 600㎢의 서울은 인구 3억에 달하는 도시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 서울은 1㎢당 인구밀도가 1만 6700명이며,
이것은 조선시대 한양의 인구밀도에 비해 약간 더 높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도시의 인구밀도는 공간의 확보라는 점에서 아무리 고층건물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인구가 그만큼 곱해지지는 않고 약간 더 증가하는데 그칩니다.
서울의 경우 인구밀도가 세계적으로도 솝꼽힐 정도로 많은 도시이지만
한국의 전통도시에 비해서 동양의 전통도시에 비해서, 약간 높은 정도입니다.
만일 서울의 인구밀도를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적용시킨다면
23만명 정도가 됩니다.
위에서 보듯 귀족과 공공기관이 로마 도시의 절반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
에서 로마시민들이 열악한 환경의 인술라의 구조에서 사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도시로 몰리는 현상도 있겠지만 성
벽 밖으로의 외적의 침입에 안전한 성안이 선호도가 높았고 그래서 땅값역시 치솟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한정된 도
시공간과 귀족들의 더넓은 거주 사용으로 서민들은 좁은 공간에서 살게 되는데 이것도 어느 한계성을 가질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로마의 면적은 13.86㎢입니다.도시의 경우 인구가 늘어가게 되더라도 상류층의 인구밀도가 그만큼 늘어나지는 않
습니다.그러한 인구는 하층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과밀화 인술라 같은 열악한 주거형태를 만들게 됩니다.
로마에서 도무스에 사는 상류층들의 비율을 비교적 높게 잡아서 2만명이라고 가정해도
나머지 98만명이 하층민들이 사는 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하층민들이 사는 공간은 약 40% 정도로 5.544㎢입니다.여기에 98만명이 산다면 1㎢당 176,768명이 됩니
다.17만명이 넘는 인구가 1㎢에 산다는 뜻이죠.
현재 한국에서 시군구단위 행정구역 중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서울 양천구로 1㎢당 27,256명입니다.
양천구는 주택지역이 70%를 차지합니다.그래서 양천구의 면적 100%를 모두 주택지역으로 계산할 경우
1㎢당 38,937명이 됩니다.이것을 로마의 하층민 지역인 5.544㎢에 대입할 경우
215,868명이 됩니다. 여기에서 상류층 2만명을 더한다면 235,868명이 됩니다.
결국 로마의 면적을 현재 서울의 아파트단지가 밀집해서 전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모두 주거지공간
으로 대입해서 계산하더라도 23만 5868명이 나옵니다.
13.86㎢에 100만명이 살 수 있는 인구밀도를 당나라 장안에 대입한다면 606만명이 살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뭐 이런 계산이 완전한 것으로 말할수 없지만 최소한 얼마나 이런 면적에서 인술라의 특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100만이라는 숫자라 무리가 많은지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즉 로마 도시에서의 인구가 100만이라는 것은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과장된 부분을 알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
100만급 이상이 나오는 도시는 유럽에서는 근대 이후에나 등장하게 되며 이런 100만 과밀 인구 수용에서의 많은
여러 사회문제와 오폐수 문제등 산적한 현안들을 극복하고서야 안정적 도시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낼수 있었습
뭐 반박은 가능하겠는데, 서양사에 그리 관심 많지는 않은지라 ㅡ.ㅡ; 서울 인구밀도가 과연 절정인가. 서울이 건물로 빽뺵한가. 서울의 녹지등 비율이 어느정도인가, 서울의 평지비율이 어느정도인가, 서울의 건물중 주거용 건물이 어느정도인가 이정도만 해도 거의 반박은 가능할거라고 뵈는디 ㅡ.ㅡ 거기에다가 상류층이 지네가 집에서 살때 과연 혼자 사나? 노예는 사람도 아닌가도 문제고 ㅡ.ㅡ 여하튼 특별히 신경쓸 필요는 업ㅂ을듯.
단지 인구밀도만으로 계산할 수 없는거 같습니다...제가 경주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통일신라 시대 경주 인구가 100만이었다고 하더라구요..전성기시...물론 100만까지는 과장일지 몰라도, 지금 경주인구가 30만이 안되는데 예전 사람들이 살았던 유물, 흔적들을 보면 지금 사람이 살지 않은 넓은곳까지 분포되어 있거든요...현재 아파트 그런걸 따지더라도 여러가지로 봤을때 경주 인구가 50만은 충분히 넘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렇다면 그당시 로마 전성기를 본다면 로마도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현대의 인구밀도와 고대의 인구밀도를 똑같이 생각한 글이군요. 이 방면의 문제는 로마로 유입된 식량의 품목명세서 장부를 해석함으로서 확인이 끝났습니다. 오현제 시대에 120만에 육박했습니다. 이 문제는 빼고 우선 말씀드리자면, 현대인이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간의 10분의 1이 고대의 공간입니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집에는 큰 편의성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도시는 좁고 불편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죠. 대개가 도시 외곽에 저택이나 별장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가난한 가정의 경우에는 6~7명의 가족이 원룸으로 된 빈민가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죠. 노예의 경우는 더 심했겠지만, 로마는
성벽이 없는 유일한 도시 중 하나였죠. 물론, 전성기 때 이야기지만요. 그래서 로마에서 인구로 집계한 인구 중에는 로마 부근의 농촌이나 별장의 사람들도 같이 집계됩니다. 로마는 카이사르가 통치할 때부터 대규모 인구 유입을 예상하여 도로교통법이나 주택규제, 그리고 수도와 하수도 문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예를 당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저택 내부에 과수원이나 양어장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그것인데, 과도한 저택의 규모를 축소하고 귀족의 자급자족율을 줄여 유통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의 하층민은 이른바 국가에서 주는 공짜 밀가루를 받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매년 10만에서 20만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하층민만 받는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 소유자라면, 다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중산층이나 귀족도 받을 수 있지만, 받는 사람이 직접 와야 하기 때문에 얼굴에 철판 깐 사람이 아니라면, 중산층이나 귀족은 거의 갈 일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가 도시 주민의 식량과 물을 제공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로마의 인구는 고대에서는 보기 드문 100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첫댓글 먼 옛날 단복 자폭글이네염. 털리긴 털렸는데 어떻게 털렸는지는 기억 안남;;
어헣헣 짐 단복이.???가 올린글 찾아보고있는데 2007년 6월까지 단복이가 개털린건 안보임. 언제 털렷나여?
제가 옛날에 활동하던 때니까 대충 2005년 말이었던걸로 기억하네요-_-;
로마는 오현제시대(ad2세기), 장안은 (ad1세기)에 100만명을 이루었죠.
뭐 반박은 가능하겠는데, 서양사에 그리 관심 많지는 않은지라 ㅡ.ㅡ; 서울 인구밀도가 과연 절정인가. 서울이 건물로 빽뺵한가. 서울의 녹지등 비율이 어느정도인가, 서울의 평지비율이 어느정도인가, 서울의 건물중 주거용 건물이 어느정도인가 이정도만 해도 거의 반박은 가능할거라고 뵈는디 ㅡ.ㅡ 거기에다가 상류층이 지네가 집에서 살때 과연 혼자 사나? 노예는 사람도 아닌가도 문제고 ㅡ.ㅡ 여하튼 특별히 신경쓸 필요는 업ㅂ을듯.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일듯 ㅡ.ㅡ 상류층 집에 노예를 추가하면 저기 글처럼 상류층 2만일때 노예가 수십만은 족히 나올텐디.
유동인구도 있지않나욤..?일단 근위대 1만명 플러스
단지 인구밀도만으로 계산할 수 없는거 같습니다...제가 경주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통일신라 시대 경주 인구가 100만이었다고 하더라구요..전성기시...물론 100만까지는 과장일지 몰라도, 지금 경주인구가 30만이 안되는데 예전 사람들이 살았던 유물, 흔적들을 보면 지금 사람이 살지 않은 넓은곳까지 분포되어 있거든요...현재 아파트 그런걸 따지더라도 여러가지로 봤을때 경주 인구가 50만은 충분히 넘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렇다면 그당시 로마 전성기를 본다면 로마도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현대의 인구밀도와 고대의 인구밀도를 똑같이 생각한 글이군요. 이 방면의 문제는 로마로 유입된 식량의 품목명세서 장부를 해석함으로서 확인이 끝났습니다. 오현제 시대에 120만에 육박했습니다. 이 문제는 빼고 우선 말씀드리자면, 현대인이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간의 10분의 1이 고대의 공간입니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집에는 큰 편의성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도시는 좁고 불편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죠. 대개가 도시 외곽에 저택이나 별장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가난한 가정의 경우에는 6~7명의 가족이 원룸으로 된 빈민가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죠. 노예의 경우는 더 심했겠지만, 로마는
성벽이 없는 유일한 도시 중 하나였죠. 물론, 전성기 때 이야기지만요. 그래서 로마에서 인구로 집계한 인구 중에는 로마 부근의 농촌이나 별장의 사람들도 같이 집계됩니다. 로마는 카이사르가 통치할 때부터 대규모 인구 유입을 예상하여 도로교통법이나 주택규제, 그리고 수도와 하수도 문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예를 당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저택 내부에 과수원이나 양어장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그것인데, 과도한 저택의 규모를 축소하고 귀족의 자급자족율을 줄여 유통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의 하층민은 이른바 국가에서 주는 공짜 밀가루를 받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매년 10만에서 20만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하층민만 받는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 소유자라면, 다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중산층이나 귀족도 받을 수 있지만, 받는 사람이 직접 와야 하기 때문에 얼굴에 철판 깐 사람이 아니라면, 중산층이나 귀족은 거의 갈 일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가 도시 주민의 식량과 물을 제공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로마의 인구는 고대에서는 보기 드문 100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