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향기처럼
김영심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국화향기가 나를 들뜨게 한다. 난 가만
히 숨을 고른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면 나는 한 송이 국화가
된 듯 하다. 지난해 선물받은 국화화분의 꽃이 진 다음 대문께
심었더니 이 가을 형형색색으로 피어나 온 집안을 향기로 취하
게 한다. 국화는 뭇 꽃들이 지고 난 늦가을 서리 속에 피어나 맑
은 향기를 풍기기에 옛 선비들과 시인, 묵객들에 의해 그 지조
와 고고한 기풍이 찬미되기도 했었다. 국화는 사군자의 한 부분
을 차지하여 당당히 그 고절한 성품을 인정받고 있지 않은가!
시인 이규보는 국화를 피우게 하는 것은 가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인고 끝에 피어난 꽃이라고 읊었다. 우리네 삶도 젊은
날의 향기보다 인생의 황혼에 맞이하는 그윽한 향기를 더욱 소
중히 여김과 같은 것이리라.
나는 들어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국화 앞에 앉아 꽃잎을 손으
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디선가 소쩍새 슬픈 울음소리가 들리
는 듯 하다. 먹구름 속에서 치던 천둥 소리마저도 들리는 듯한
것은 서정주 님의 애절한 마음이 국화를 통하여 내게 전해 옴인
가!
꽃잎을 하나하나 뜯어 채반에다 널었다. 소국 한 송이를 이루
고 있는 꽃잎이 무려 80~90개가 넘는다. 수북히 쌓인 꽃잎을
집어 손가락 사이로 떨어뜨려 보았다. 순간 온 우주에 꽃비가
내리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이 꽃잎을 말려 베개 속에 넣어 긴
겨울밤 그 향기 따라 황금빛 들녘을 지나 꽃의 정원에서 기다
릴 그리운 임을 만나는 꿈의 여행을 떠나리라.
열려진 대문 안으로 옆집 할머니가 꽃 내음이 좋다며 들어선
다. 꽃잎을 따는 나의 행동이 이상했는지 멀쩡한 꽃은 왜 따느
냐고 의아해한다. 베개 속에 넣으면 그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
고 국화주 또한 그 풍미가 일품이라고 했더니 술이 익거든 한잔
하자고 하신다. 국화꽃 몇 가지를 꺾어 할머니를 주고 나 또한
오지 항아리에다 듬뿍 꽂으니 온통 가을이 내 안으로 밀려온다.
꽃을 보려 굳이 산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내
안에 산이 있고 거기 갖가지 가을꽃이 피어 있다. 고향의 들판
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국화 거기 내 어린 시절 모습이 보인
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는 들국화는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자연의 속성을 벗어나는 삶을 살수록 마음은 피폐해지고
물질 문명이 주는 정신의 혼탁함으로 우리 자신을 잊고 살아가
고 있는 현대인 이토록 가을 바람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대하
면 잊었던 본성을 일깨우게 되어 다시 한번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리라. 내 안의 꽃밭을 거닐며 지나온
날과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본다.
꽃도 연중 피어있다면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피었다 지고
또다시 피기 때문에 새로움으로 놀라워하지 않는가. 가을 낙엽
이 지는 것을 아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묵은 잎이 지고 나면 새
잎이 피어나듯이 자신도 불필요한 아집과 독선을 다 버려야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롭게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얼
굴을 가지려면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가꾸어야만 되리, 순간 순
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 매순간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더욱 가까이 한다는 것.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야겠지.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꽃과 새소리, 별이 빛나는 밤
하늘 계절의 변화 그 속에 자연의 일부인 인간. 꽃처럼 피었다
사라져갈 우리네 인생, 삶이 다 한날,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떠
날 준비를 하여야겠다. 저 가을 낙엽처럼.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 나 또
한 먼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어디론가 목적지도 없이
훌쩍 떠나고 싶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내게 해당되지 않나
보다 가슴에는 바람이 일고 하늘은 나를 유혹한다. 늘 떠나는
연습을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나를 에워 싸고 있는 현실
의 굴레 때문인가, 이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
단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늘 떠남을 꿈꾼다. 이 사색의 계절
에 난 생각과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내 삶의 진정한 주인공
노릇을 못하는 것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야 함을 알면서도 늘 그 언저리 맴도는 구경꾼처럼 서성이고 있
는 자신을 본다. 국화 향에 취하여 돌아본 내 삶에서 무엇을 버
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나의 황혼이 국화 향처럼 항기로울 수만 있다면 후회 없는 일
생이라 할 수 있으리.
국화를 완성하는 데는 술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거기다 임이
나 벗이 있어 대작할 수 있다면 더욱 흥을 돋을 수 있을 것이다.
꽃잎이 술잔에 들어와서 그윽한 향기를 보내주니 가을이 더욱
정답게 느껴지리라.
국화 몇 송이를 땄다. 늙지 않는 국자동(중국 주나라 신하)처
럼 국화주를 마시며 젊음과 장수를 기원해 볼 꺼나.
2003 16집
첫댓글 김영심 수필가
이분은 수 년간 투석을 하며 건강하게 살아갔었는데
몇 년전 안타깝게도 세상을 뜨셨습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했던 분으로 그 모습이 아련하게 스쳐갑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국화향기가 나를 들뜨게 한다. 난 가만
히 숨을 고른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면 나는 한 송이 국화가
된 듯 하다. 지난해 선물받은 국화화분의 꽃이 진 다음 대문께
심었더니 이 가을 형형색색으로 피어나 온 집안을 향기로 취하
게 한다. 국화는 뭇 꽃들이 지고 난 늦가을 서리 속에 피어나 맑
은 향기를 풍기기에 옛 선비들과 시인, 묵객들에 의해 그 지조
와 고고한 기풍이 찬미되기도 했었다. 국화는 사군자의 한 부분
을 차지하여 당당히 그 고절한 성품을 인정받고 있지 않은가!
부친이 대국을 봄부터 잎사귀를 삽모로 시작하셔서 가을에 풍성하고 향기좋은 꽃송이를 만드셨다.
등 뒤에서 어렴풋이 습득한 지식으로 따라하려는데
쉽지가 있다
노력과 사랑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