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이치 觀하여
이치에 이르게 되는
불교의 핵심에 기초해
‘소설 관상’ 전개하고 있어
“영화는 보여주는 문학이요
소설은 읽는 문학이다
소설은 영화가
놓쳐 버릴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읽게 할 수 있다 ”
1985년 소설 <십우도>로 삼성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타나 많은 베스트셀러 소설을 낸 백금남 작가가 이번에는 소설 <관상>을 출간했다. 역사를 소재로 한 팩션소설을 써 온 백 작가는 최근 영화 <관상>의 개봉과 함께 소설 <관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언뜻 보기에 소설 <관상>은 역사의 한 자락에서 등장하는 한 관상쟁이의 희비극 같다. 하지만 백 작가는 “소설 <관상>에 많은 불교적 내용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백 작가를 조계사에서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오랜만에 소설을 낸 것 같다.
= 불교신문에 ‘불속의 꽃으로 피다’를 1년 연재하면서 <김홍도 샤라쿠의 비밀>과 <신윤복>을 냈다. 이후 소설 <법정>을 냈고 한동안 칩거했다. 올해로 2년여 만이다. 2년 동안 칩거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글을 접으려고까지 했다. 주로 불교소설을 썼는데 희망이 없어 보였다.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잡기도 힘들었지만 도대체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싶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게 접는다고 해서 접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 손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와 소설이 동시에 나오는 특별한 경우다.
= 영화 개봉 시기에 출간 일을 맞추다 보니 그런 질문을 자주 받고는 한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출판계와 한국문단에 영화와 책이 동시에 나온 예는 이례적이다. 영화는 보여주는 문학이다. 소설은 읽는 문학이다. 그렇지만 보여주는 문학과 읽는 문학은 확연히 다르다. 영화는 소설로 얻어낼 수 없는 것까지 직접 보여줄 수 있다. 소설은 영화가 놓쳐 버릴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읽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과 영화의 상관관계를 통해 그 괴리를 극복할 수 있다. 침체해 가는 출판계와 한국문단에 영화와 소설의 상관은 그렇게 의미 없는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관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작품을 끝마칠 때쯤 어느 관상가에게 관상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관상 속에 존재의 근본이 있다. 그럼으로 관상은 곧 존재의 근본 원인을 밝히는 학문이다. 삼라만상의 꼴을 살피며 그것이 우주의 모습임을 정의하는 학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길흉 생사, 화복의 운세를 판단하는 학문이다. 바로 그것이 이 우주의 모습이요 인상법의 내용과 형식이며 그 핵이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그가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우리의 현실은 그런 견해보다 더 치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정확하다.
- <관상>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어떻게 전개되나.
= 때는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왕위를 놓고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벌이던 무렵이다. 김내경이라는 관상쟁이가 등장한다. 관상쟁이 김내경은 김종서에게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원수인 김종서를 도와 왕위 찬탈을 꿈꾸는 수양대군의 상을 역적의 상으로 바꾸려 한다. 역적의 상이 됨으로서 왕위 찬탈이 이루어지고 자신의 복수도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진행되는 이야기다.
- 소설에 불교적인 모티브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하던데.
= 엄밀히 말해 우주의 이치를 관(觀)하여 그 이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핵이다. 그렇기에 달마는 세상의 모습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세상의 모습, 관상이다. 관상이라 그러면 사람의 얼굴이나 살피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우주의 이치 그 모습이다.
달마대사가 상법을 남긴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법을 완전히 한 후 화산 계곡의 마의 선생에게 전했다. 이 법은 다시 송나라 진박에게 전해졌다. 달마의 상법은 그 후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상학은 고대 신교(神敎)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도교가 들어오면서 상학은 민간신앙처럼 이 땅에 전해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불교가 전해지면서 함께 꽃을 피운 것이다. 그렇기에 대개 다섯 대맥이 내려온다고 승가에는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어찌 불교적인 모티브 없이 소설이 되겠는가. 소설 속에는 이 과정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 불교소설을 많이 써 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 진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필요 없다. 삶 자체가 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불교다. 바로 문학이다.
- 소설 <관상>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어디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하나.
= 인생이 생각대로 되면 상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될 것이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그게 바로 업장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 그래서 언제나 인간은 갈등 속에서 산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가면 그가 오고 그가 가면 내가 온다. 그렇게 어긋나는 것이 인생살이다. 그 인생살이 모습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관상이다. 적어도 <관상>에서 재미를 느끼려면 우리네 삶 그 근본적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겨 먹었는지 알아보는 심정으로 읽다보면 재미가 저절로 나지 않을까 싶다.
- 불교소설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 언젠가 불교소설을 쓰는 작가가 없다고 질타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현장에서 뛰다보니 오죽 안타까웠으면 기사화했을까 싶었다. 왜 불교소설을 쓰지 않는가? 이는 내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대답이다. 사실 우리의 문학동네는 좌우 대칭이 너무 심하다. 그들의 편견에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불교소설이다. 불교문화예술의 창달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물론 어차피 예술 활동이야 제멋에 겨워하는 것이라 치부해도 그렇다. 그런 마당에 누가 불교소설을 쓰겠는가.
■ 백금남 소설가는…
소설가 백금남씨는 “관상은 사람의 얼굴이나 살피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우주의 이치 그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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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출생. 1985년 백정 집안의 기묘한 운명을 다룬 장편소설 <십우도>로 제15회 삼성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1987년 중편소설 <등대의 불 밝히기>로 KBS문학상을 수행하며 소설가로서 입지를 탄탄히 했다. 심오한 티베트 불교의 오묘한 가르침을 소설화 한 <탄트라>가 잇따라 히트하면서 불교를 소재로 한 작가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후 가슴을 울리는 서정성 깊은 소설인 <천상의 약속>을 발간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한국 전통 풍수사상을 소설화한 <소설 명당>을 발표했다. 2003년에는 <티베트 사자의 서>를 저술한 파드마삼바바의 일생을 다룬 <파드마삼바바>로 민음사 제정 올해의 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불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남성적이고 중후한 문체를 구사한 백금남 소설가는 화두를 주제로 깨달음의 세계를 조망한 최초의 선(禪)소설인 <칼의 어록>을 출간했고,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었던 탄허스님의 삶을 조명한 <소설 탄허>를 발표했다.
또한 자식의 뼈로 만든 화살로 겨레의 심장을 겨냥하는 활장이의 슬픈 역사를 다룬 <동녘에는 불새가 산다>와, 노동의 슬픔과 애환을 다룬 <겨울 함바 위로 날아간 머슴새>를 발표 했다. 이후 역사에 기반한 팩션소설에 천착해 <샤라쿠 김홍도의 비밀> <소설 신윤복> 등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고 2010년에는 <법정, 맑고 향기로운 사람>을 출간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 작가의 말
“거울 앞에서 얼굴 가꾸는 사람은 아름답다”
자신의 얼굴에서나마
그 존망을 엿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리 없다
작품을 시작한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지나버렸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만났던 수많았던 사람들 그리고 자료들…….
작품이 끝나갈 무렵, 어느 관상가에게 관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관상을 보니 상대가 내일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당신 내일 죽겠소’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상대가 내 얼굴을 보더니, ‘당신도 내게 그 말을 하고 내일 죽겠소’ 그러는 것이야.” “그래서요?” 그렇게 묻는 나를 관상쟁이가 뭐 느껴지는 게 없냐는 듯이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게 관상이야.” “네?” 나는 무슨 말인가 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기는. 이미 근본 이치는 주어져 있다는 말이지.” “더 어려운데요.” “뭐가? 저기 사람이 들어오지?” “네.” “느낌이 어때?” “대학생 같은데요.” “저기 저 사람은?”
“글쎄요? 회사원 같아 보이기도 하고.” “바로 그거야.” “네?” “느낌!”
“그게 관상이란 말인가요?” “만사가 그래.”
나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실없는 소리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상 속에 존재의 근본이 있다. 그러므로 관상은 곧 존재의 근본 원인을 밝히는 학문이다. 삼라만상의 꼴을 살피며 그것이 우주의 모습임을 정의하는 학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길흉생사, 화복의 운세를 판단하는 학문이다. 바로 그것이 이 우주의 모습이요, 인상법의 내용과 형식이며 그 핵이다.
뭐 그 정도의 대답은 할 줄 알았는데……. 그러나 점차 관상을 알아가면서 깨달았다. 그런 대답이나 바랐던 나의 사고가 매너리즘의 사고에 의한 것임을. 관상의 정의가 정확하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언제나 현실은 견해보다 치열한 것. 자신의 얼굴에서나마 그 성패를, 그 존망을 엿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리 없다. 그것이 우주의 역사요, 이 나라의 역사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밑그림임에 분명하다. 시나리오를 쓴 김동혁 작가나, 영화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도 그것을 인정할 것이고 나 역시 인정한다. 인정하기에 피바람 부는 역사의 행간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삶과 오늘의 삶이 무엇이 다르랴.
그날의 삶 속에서 우주 만물의 존재 이유를 극명하게 볼 수 있기에 시나리오를, 영화를, 소설을 만들고 썼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인간의 행동과 갈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대화 형식으로 풀어나갔고, 어떤 이는 그 세계를 보는 문학으로 화면 속에 현재의 시제로 장중하게 일궈내었으며, 어떤 이는 읽는 문학으로서의 산문 문학을 일궈냄으로써 서로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모양새를 얻고 말았지만, 어떠한 힐문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오늘도 꿈을 꾼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가꾸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모두가 세상의 정원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광동(佛光洞) 서재에서
백금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