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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알림] 나혜석 - 한국의 여성운동 효시
스포츠광 추천 0 조회 676 08.10.17 05:27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제59회] 나는 말한다-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방송 : 2008. 10. 11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종석 PD
▣작가 : 고은희
 

경성을 뒤흔든 나혜석의 고백!

“정조는 취미다.”
“자식은 악마다.”

신여성으로 대표되는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그녀는 무엇 때문에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나?
행려병자로 사망하던 최후의 순간까지
그녀가 세상에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일까?


경성을 뒤흔든 이혼고백서 - “정조는 취미다”

1934년 8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글이 경성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화가 나혜석이 기고한 ‘이혼 고백서’. 나혜석은 이 글을 통해, 자신의 결혼생활과 이혼 후의 삶을 밝히고, 당당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1년 후 그녀는 보다 파격적인 주장을 외친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이다”
<신생활에 들면서 中 1935년 2월>
그녀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 삼천리에 실린 이혼고백서                   ▲ 영화 화조는 나혜석을 욕망에 휘둘린
                                                                모던걸로 묘사하였다


조선 여자 유학생, 봉건을 말하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장려한 것이다”

1914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나혜석.
유학생 활을 통해 근대적 여성상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유 학생 잡지<학지광>에 현모양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싣는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
<학지광 1914년 12월호>

 ▲ 매일신보에 실린 나혜석의 기사.  
그녀는 조선 여학생 중 가장 학업이 출중한 학생으로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머니 나혜석, 금기를 말하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다”

1920년 나혜석은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 첫 아이를 낳은 그녀는‘화가’와 ‘어머니’라는 위치에서 고뇌한다. 그리고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육아의 고통에 대해서 입을 연다.  

“잠 없고는 살 수 없다. 이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
<母된감상기 中>

모성은 천성이라고 규정하는 남성들의 기존 관념 을 거부하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녀는 모성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 적 인간관계라 주장했다.

 ▲ 나혜석과 자녀들의 사진

이혼녀 나혜석, 제 권리를 요구하다- 불륜과 이혼
   “조선남성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합니다”

1927년 파리 랑송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나혜석. 그녀는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중 하나이며 천도교 대표였던 최린과 추문에 휩싸인다. 이로 인해 남편 김우영은 이혼하게 된다. 여자에게 재산 분할이나 양육권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 나혜석은 돈도 명예도 자식도 잃은 상태로 이혼하게 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조관념이 남성과 다르다는 것 을 절감한 그녀. 이에 나혜석은 정조유린이라는 명 목으로 최린을 고소한다.
▲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소송을 건 나혜석의 기사  

 

인간 나혜석의 홀로서기!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고, 행복했습니다”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 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말하 기를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사회는 그녀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혜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했다.
“당시에도 뭔가를 쓰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보고 깨끗이 정서를 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당시 목격자 박인경씨의 증언 中>

 ▲ 나혜석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 수덕사에서 그린 나혜석의 자화상            
상태에서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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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10.17 05:29

    첫댓글 오랜만에 참 좋은 프로그램을 봤네요.

  • 08.10.17 11:51

    저도 이 프로그램을 보았어요. 여성뿐만이 아닌 한사람의 인간으로 진화하고자 했던 그녀를 재해석하는 아주 좋은 프로였지요.

  • 08.10.18 08:55

    한사람의 인간으로 진화하고자 했던 그녀....라는 말씀 참 좋습니다...

  • 08.10.17 21:55

    좋은 프로를 보지 못했네요. 인터넷으로 검색해서라도 찾아봐야겠습니다. 나혜석이란 여성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 08.10.17 22:44

    나혜석거리 라고 수원 중심가에 있습니다. 동상도 있고...가끔 지나다니죠...나혜석 평전을 보았습니다. 재능있었던 그녀의 기구한 삶이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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