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一生祖國과 민족을 위하여
아래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의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에 관련된 연설문 내용들중에서
기가 막힌 명언들을 임의로 뽑아보았습니다..
.이 연설문들을 한번 읽으면서 음미해보니,
현재 우리가 가진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의 정신이나 정책 등이 30여년전보다 못하고,
또한 아직까지도 30여년전,
박대통령의 연설문 내용조차 지키지 못하고,
또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지난 30여년(1980~2010) 동안,
도대체 우리 대한민국 군대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라는
공격적인 질문과 비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국방비를 투입하면서도 말입니다...
실전에 약한 행정적인 모든 운영방식은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치명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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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군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장에서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자는 데 있다.
적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비단 병력의 수,
장비의 우열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승의 요체는 군의 정신 전력에 있다.
즉, 엄정한 군기, 왕성한 사기, 그리고 필승의 신념에 있다"
---「1974년 3월 29일,
제30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② "땅굴은 북괴가 남침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므로 이를 하나의 관광대상
(=아마 김대중이 땅굴을 천연동굴로 치부한 것을 가리키는 듯함)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후방에서 구경오는 사람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반공교육의 실습장이 되도록 세심히 신경을 쓰라"
---1975년 5월 23일, 전방 시찰에 나선 박 대통령이
각급 지휘관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③ "우리가 지금 말하는 "자주국방"의 개념이라는 것은……
외부의 지원없이 북한 공산 집단이 단독으로 공격해올 경우,
우리도 우방의 지원없이 우리 단독의 힘으로 1대1로 능히
이를 격퇴하고 막아낼 수 있는 정도의 국방력을 빨리 갖추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앞으로 우리가 4~5년 내에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주국방"에 관한 개념이다.……
다른 일이 다 잘 되더라도,
안보면에서 조금이라도소홀한 점이 있거나 또는 어떠한 차질이 생길 때에는
우리가 해놓은 백가지 시책이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갈 염려가 많다.
따라서 모든 시책에 앞서서,
우리는 "국가안보"를 보다 튼튼히 하는 데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겠다."
---「1976년 1월 15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④ "정신 전력 면에 있어서,
우리는 북한 공산주의 군대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저들은 개인 우상숭배에 얽매여 입만 벌리면 혁명이니
, 해방이니 하고 원시종교의 주문을 외듯이 교조적이고도
획일적인 교육으로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국군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높은 긍지와
우리의 민족문화와 전통을 수호 발전시켜야 할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1976년 3월 27일, 제24기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⑤ "전력이란 군장비, 성능, 훈련도, 사기, 군수지원능력,
국민과 군의 유대, 국방에 대한 국민의 관심,
그 나라가 처한 국제 환경,
우방과의 유대 및 경제적 저력 등을 포괄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그들(=북한 공산 집단)을 앞지르는 단계에 왔다.
우리는 벌써부터
"자주국방" 태세 확립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여 노력해 왔는데,
앞으로 이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하루빨리 완결지어야 한다."
---「1977년 1월 28일, 국방부 연두 순시」에서
⑥ "우리의 국방을 남에게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 우리 땅과 우리의 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1977년 3월 29일, 제33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⑦ 멸사보국(滅私報國)의 희생정신으로
나라를 지키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은
곧 우리 해군의 전통이 되고 있다. 일찌기 임진왜란의 전화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장군은 "나는 나라와 더불어 죽을 각오로 이 땅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의로써 용전분투하여 기울어 가던 국운을 바로 잡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죽음을 각오하고 위기에 대처하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린다"는 충무공의 위대한 군인정신이자, 필승의 신념인 것이다.
---「1977년 4월 12일, 제31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작성일 : 11-04-12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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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루더 사령관을 환송하는 박정희 소장.
1961-07-01. (KTV-국가기록영상관)
5.16혁명으로 지휘권을 손상당한 매그루더 대장의 미8군사령관직이
부사령관이던 멜 로이로 교체되었다.
매그루더 대장의 미8군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 이임식이
미8군 영내에서 거행되었고,
서울운동장에서는 환송식이 있었다.
이어 7월1일 김포공항에서 매그루더 대장은 그가 진압하려던
혁명군의 리더 박정희 소장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 한국의 새로운 변화에 밀려나는 모습이다.
7월1일 재건국민운동본부요원의 1차 합격자 발표 현장.
모집정원 374명에 응시자는 5천8백명으로 15대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1961-07-01. (조선닷컴 포토DB견본)
재건국민운동 경기인천촉진대회가
7월1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인천시내 남녀 중고등학생과 공무원 및 각 기관단체 인원,
일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61-07-01. (조선닷컴 포토DB견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선출로 5.16혁명 세력의 권력이 실체화되었다. 1961-07-03. (KTV-국가기록영상관)
송요찬 내각수반 임명. 1961-07-04. (정부기록사진집5)
7월4일 박정희 의장은 송요찬 내각수반을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부패를 일소함과 아울러 민족 정기를 바로잡고
국토통일에 앞장서며 국가경제 부흥에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선서했고,
박정희 의장은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되었으므로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이 나라 국가재건 사업에 앞장서 달라”고 훈시했다.
송요찬 내각수반과 함께 청와대에 인사차 예방.
1961-07-04. (정부기록사진집5)
▒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
그의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②
미 국무성, “윤보선 대통령 하야 반대”
1961.8.25~8.26
30사단 시찰. 1961-08-25.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국방과 경제가 두 축이었다
. 북한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대통령은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붙여 나라를 지키려 했다
. 국방을 통해 지키려 한 목적, 그리고 국방을 위해 갖춰야 할 목표는
가난이 없는 조국, 잘사는 조국이었다.
대통령은 본인이 병역을 기피했거나 아들을 기피시킨 사람은 요직에
중용하지 않았고 국회의원 공천을 주지도 않았다.
특별보좌관단을 만들기 위해 대학교수를 수소문할 때도 이 원칙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생신 축하 예방이지만, 민정이양 계획과 대통령 하야문제로 불편한 만남이었다.
1961-08-26. (KTV-국가기록영상관)
“1961년 8월12일, 박의장은 ‘앞으로 2년 더 군정을 실시하고
1963년 여름에 민정이양을 실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격노했다.
박정희 의장에게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대통령은 8.15 기념일을 기해 하야를 강행하되 최고회의나 언론기관에 연락하지 말고
대변인 성명으로 끝내자고 했다.
하야성명의 골자는 ‘2년 군사정권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지정해주기까지 했다.
하야 결정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나 세 사람만 알고 있던 일인데 비밀이 그날로 외부에 새나가고 말았다.
하야가 결정된 다음날인 13일 아침
새로 부임한 새뮤얼 버거 미 대사가 급히 청와대를 방문하고
대통령의 하야에 대한 진위를 물어왔다.
대통령이 버거 대사에게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버거 대사는 웃기만 하면서 답변을 피했다.
버거 대사는 강력하게 대통령의 하야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개인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미 국무성의 공식 견해라고까지 강조했다. 대통령의 하야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 김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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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은 5.16후 첫 광복절을 맞아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책자를 펴냈다. 1961-08-15.
국가재건을 위한 국민운동은
그의 다이내믹한 카리스마에 의한 국가주도형의 톱다운 방식으로부터
국민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다운업의 패러다임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범국민적인 국가재건 운동에 몰두하는
그의 소박한 정열과 진정성이 담긴 것으로,
실사구시에 의한 혁명과업 수행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의장은 민정이양에 대한 압박으로 혁명정부 종식의 일정을 밝혀야 했다. 그가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함으로써 한미관계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있었지만,
민정이양은 혁명을 시작하자 마자 끝내 버리겠다는 모순의 약속이었다.
그는 경제개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모순 논리를 저돌적으로 돌파해 버린다.
1961-08-16. 전국경제인연합회 창립. (전경련 홈피)
“혁명직후 중앙정보부에서 불러서 갔더니 여러 경제 얘기를 하면서 의견을 묻다가
‘경제단체 같은 것을 만들어서 경제인들이
국가재건에 기여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고
경제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경제인협회가 출범했다.”
(이병철, 전경련 창립 20주년 특별좌담에서)
혁명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기업인들은 혁명정부의 요청을 수용해
이병철(삼성), 이정림(대한양회), 박흥식(화신), 설경동(대한산업), 정재호(삼호),
남궁연(극동해운), 홍재선(금성방직), 이양구(동양시멘트), 최태섭(한국유리),
김지태(조선견직), 함창희(동립산업), 조성철(중앙산업) 등 13인으로
경제재건촉진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이정림 회장의 대한양회 회의실에서 회의를 갖고
‘경제재건촉진회’의 발기준비 모임을 가졌다.
1달여가 지나 8월16일 경제재건촉진회는 한국경제인협회로 간판을 바꿔달고
초대회장에 고 이병철 회장을 선출했다.
전경련 제1차 임시총회. 1961-08-16. (전경련 홈피)
“5.16 혁명이 일어나고 호암은 부정축재자로 연행되어 박정희 소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현행 조세법에 대한 근본적인 부당성을 설명하며
오히려 박 소장을 설득하였다.
호암의 역설에 공감한 박 소장은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기업에게 벌과금을 추징하는 것으로 수사를 종결했고
이 사건은 당초보다 가볍게 마무리되었다.
그 뒤 호암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나
그 벌과금을 기업이 발전을 위한 투자금으로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도록 설득하였다.
곧이어 박의장은 호암의 뜻을 헤아려 벌과금에 대한 투자명령 조치를 단행했다.
박정희 의장은 호암의 권유를 들어주는 대신
앞장서서 기업들이 투자명령에 따르도록 경제인들을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되어 기업인들은 경제재건촉진회의를 해체하고
한국경제인협회 창설을 시도하면서 호암을 초대회장으로 옹립하였다.
1961년, 호암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한국경제인협회 초대회장.
그것은 호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맡은 공직이었다.”
(호암재단 홈피에서)
1960년대 일본을 왕래하던 이병철. (호암재단)
5.16 직후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된 상황에서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은 기업인들을 풀어주고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는 대신
기업인들이 국가 기간산업을 하나씩 맡아 일으키겠다는 것으로
이른바 ‘빅딜’을 한 셈이다.
오늘날 전경련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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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구정 때 개봉된 영화 <마부>.
고시공부를 하는 아들, 벙어리 딸 등과 더불어 살아가는
홀아비 마부 일가의 애환을 짙은 리얼리즘으로 담아냈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서민의 억척스런 삶과 함께,
마차가 지나다니는 서울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서정적인 영상 연출도 감명을 준다.
청계천의 판자촌도 그늘진 시대상의 한 부분이었다.
1961-08-01. (정부기록사진집5)
언커크(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대표 접견.
언커크는 1950년 국제연합총회의 결의에 의해,
한국의 경제재건과 평화회복을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1961-08-01. (정부기록사진집5)
국산 담배들. 1961-08-04. (정부기록사진집5)
“5.16 전에는 나도 양담배를 피웠지요.
혁명 후에는 딱 끊었소.
(이렇게 말하고는 피우다 남은 아리랑 담배 꽁초에 불을 붙이면서 씩 웃는다)
담배는 하루에 이 놈을 두 갑 피웁니다.”
(박정희 의장)
“내가 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점심을 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돈 10원짜리 냄비우동 한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그날 식단의 전부였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백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동서고금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이렇게 험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 KIST 이사장 김병희)
농어촌고리채 정리를 위한 간담회. 1961-08-05. (정부기록사진집5)
가난한 농어민의 고리채를 혁명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취지에서 실시된
이 정책은 군사정부 초기의 시책들 가운데 비교적 높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 광경. 1961-08-07.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 광경.
“박정희 의장은 ‘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라고 자문하고
‘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자답하고 있다.
5.16혁명 당시의 한국이 반(半)독립국가,
반식민지국가와 다를 바없는 상태였다는 것은
61년의 한국의 자립도가 재정적으로는 39.2%,
국방비에 이르러서도 겨우 4.9%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도 명백한 것이다.”
(일본 東海大 교수 하야시 다테이코)
재건국민운동 시군촉진회 부회장회의. 1961-08-10. (조선닷컴 포토DB견본)
“이 시절 ‘재건’과 함께 유행하던 말이 ‘새나라’였다.
장날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잡화상의 이름들이 ‘새나라 상회’, ‘새나라 쌀집’
, ‘새나라 이발’ 등이 등장했고 장날 거나하게 취한
취객들이 ‘새나라 상회’ 앞에서 객기를 부리는가 하면
편리하고 간편한 재건복이 유행해 일터로 향하는 많은 남성들이 애용하는 등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오늘날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인터넷 동부신문)
박정희 의장의 중장 진급 후 기념사진. 1961-08-11.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한 것은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지 한달여 뒤인 8월10일이다.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중장 계급장을 단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
군 선임자들로부터 경례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한미군 지휘부 장성들과의 관계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10일 혁명 유공자 50여명이 특진할 때 박소장도 중장이 되었다. |
박정희 의장의 도착성명. 존슨 부통령의 환영사에 이어 박의장은 도착성명에서
“미국과 한국 상호간 여러가지 문제들을 토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4일 백악관 방문. 1961-11-14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의장은 13일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저에
여장을 푼 뒤 이튿날 백악관을 방문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현관에서 박의장을 영접하고 있다.
아이들의 한복을 받아들고 있는 재클린. 케네디는 박의장에게 부인 재클린 여사를 소개했다. 박의장은 준비해 온 족자와 한복을 케네디 부부에게 선물했다.
박정희와 케네디는 패기만만한 40대 중반의 동갑나기(1917년생)였다 . 케네디는 “1951년에 잠시 한국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사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케네디의 자세를 응시하는 박정희. 1961-11-14. (정부기록사진집5) 박의장을 대하는 케네디의 자세가 강자의 여유와 우월감이 지나쳐
오만무례해 보였던 장면이 있었다. 어쨌든 두 정상은 두차례의 회담 뒤에 공동성명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양 지도자는 양국간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굳은 우호적 유대 및 자유와 정의에 입각한 세계평화의 확립을 위한
공동노력을 강화할 결의를 재인식하였다”는 것과,
케네디 미 대통령이 “한국 신정부가 달성한 많은 발전상에
만족하며 한국의 장기경제개발의
촉진을 위하여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박의장에게 확약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양국 관계를 획기적으로 새롭게 진전시키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박의장의 ‘월남파병 카드’였다.
필요하다면 월남에 파병할 용의가 있다는 것. “박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월남파병 용의의 의사를 밝힌 것은
누구의 부탁을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카드로 던진 것이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월남파병에 대한 반대급부의 하나였다
.” (김종필) 이후 ‘월남파병’은 정치, 외교, 경제가 얽히고 설킨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60년대의 가장 파워풀한 진운을 동반하게 된다
16일 내셔널 프레스 클럽 방명록에 서명하는 박의장. 1961-11-16. (정부기록사진집5) 박의장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연설에 이어 기자회견을 한 뒤, 이튿날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 교포들의 환영 물결. 1961-11-17. (정부기록사진집5) 뉴욕에서 박의장은 한 호텔에 숙소를 정해 놓고 있던
맥아더 원수를 예방했다. 팔순의 건강한 맥아더 원수는 진지한 기쁨의 표정으로
박의장 일행을 맞아 기념촬영을 하고 1시간 동안환담을 나누었다.
또, 마침 그곳에는 전경련의 외자도입 교섭단이 와 있어
그들이 접촉한 미국 실업인들과 함께 박의장의 면담을 고대하고 있었다.
박의장은 한국 기업인들의 외자유치 활동을 독려하고, 확고한 경제개발의 의지로 미국 실업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기내에서. 1961-11-20. (정부기록사진집5)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의장은 미 제6군사령관 존 L 라이언 중장 자택의 만찬회에 참석했다.
이 만찬에는 윌리엄 F 딘 퇴역 소장(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람)과 한국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도 참석해 한국전쟁 당시 한미 양측 전우들이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후 박의장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21일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하와이에서는 그곳에 망명해 와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의전비사관을 보내 위문토록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로에 오른 것이 11월24일―
11월25일 아침 김포공항에 도착한 박의장의 귀국 인사. 1961-11-25. (정부기록사진집5) 그는 귀국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 정부와 국민들은 우리 혁명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지난 6개월 동안에
수행한 모든 개혁과 성과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하고 강력한 반공태세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의 계속적인 유지와 한국경제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혁명정부가 시도하는 장기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원조와 협조를 계속 제공할 것을 확약한 바 있습니다.”
27일 청와대로 윤대통령을 예방하고 귀국 인사를 했다. 1961-11-27. (정부기록사진집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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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빌딩’을 향한 발빠른 움직임 ⑥
차관도입에 의한 경제개발시대 예고1961.12.7~12.31
청계천 복개로 제2개통식. 1961-12-07. (정부기록사진집5)
1955년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두번째로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2킬로미터 구간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였다.
1958년 5월에 착공하여 4년간 총17억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인원 24만명이 동원된 방대한 공사였다.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경연대회. 농가부업 장려책의 일환으로 경기도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1961-12-09. (정부기록사진집5)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 의장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업발전과 공업발전을 놓고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지를 많은 사람들과 꽤 오랫동안 논의하고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업발전이라는 빠른 길을 먼저 선택하고
10년 후에야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에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다.
조국의 경제재건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교포 실업인들. 1961-12-22. (조선닷컴 포토DB견본)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행을 앞두고 외자유치에 의한
산업시설 투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지난 11월 서독에 갔던 정래혁 상공장관 일행은 약 3천7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마르크화 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키로 하는 차관협정을 체결했다.
1961년 12월13일의 일로, 이것이 5.16후 유치한 정부 차원의 최초 차관이었다.
한편 미국에 갔던 민간외자 도입교섭단은 밴플리트 장군의 열성적인 도움을 받아
미국 기업인들을 만나고 합작투자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해 돌아왔다.
이들은 12월16일 보고회를 열어 외자를 받아들일 국내 여건의 조성을 건의했다.
이들의 성과는 이듬해초 울산공업센터 건설로 가시화된다. 그리고 서독에 갔던 민간외자 교섭단은
세계적 기업들을 상대로 유치활동을 벌여
6개월이 지나지 않아 결실을 보게 된다.
바야흐로 적극적인 차관도입에 의한 공업개발의 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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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 오후 4시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 도착,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영접을 받았다.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하네다 공항 2층 옥상에서는
약 5천명의 재일교포가 태극기의 물결로 열렬히 환영했다. 박의장은 손을 들어 답례했다.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도착성명을 읽는 박의장.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박의장은 성명서에서 자유진영의 우호와 단결을 강조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6차 한일회담이 빨리 타결되도록 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왔다”고 밝혔다.
이케다 총리 주최 만찬. 1961-11-11. (정부기록사진집5)
11일 저녁 박의장은 이케다 총리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박의장은 만찬 답사에서“날씨가 좋으면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가깝다”면서
"한일회담은 사소한 문제로 논란을 되풀이하지 말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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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빌딩’을 향한 발빠른 움직임 ③
정부와 기업인들이 해외로 뛰기 시작했다
1961.11.1~11.11
조선호텔 개관식에 참석한 박정희 의장(중앙). 1961-11-01. (정부기록사진집5)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사업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민간기업인들이 노력으로
외화획득 산업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 1961년 8월22일 관광진흥법의 제정과 다음해 제정된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관광호텔들에게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설을 기준으로 우수한 호텔을 선정,
관광호텔로 분류하여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iN, ‘한국 호텔의 역사’ )
11월2일 전경련 민간외자 도입 교섭단 미국 향발. 1961-11-02. (전경련 홈피)
1961년 11월은 박정희 의장의 미국, 일본 방문 일정이 잡혀 있었다.
혁명정부의 분주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기업인들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 11월2일 전경련 회장 이병철을 단장으로 하는 민간외자 도입교섭단이 미국으로 떠나고,
8일에는 이정림 대한양회 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제2 교섭단이 유럽으로 떠났다. 이때 정부는 미국, 일본 외에도 경제개발의 돌파구로 전후의 경제부흥에 성공한 서독에 기대를 걸고,
정래혁 상공장관과 백영훈 특별보좌관을 축으로 하는 차관교섭 사절단을 서독으로 보냈다. 정부와 기업인들이 차관도입을 위해 해외로 발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대장으로 진급한 박정희 의장에게 윤대통령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1961-11-04.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의장의 외국 방문을 앞두고, 정부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로서
위상을 고려해 대장 진급 절차를 밟은 것이다.
11월5일 박의장은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을 접견했다.
1961-11-05. (KTV-국가기록영상관)
미 국무장관 딘 러스크가 일본에서 무역경제회담을 마치고 4일 한국에 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미국은 한일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양국간에 해결할 문제이며
미국은 조정자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튿날 의장 공관에서 딘 러스크 장관의 예방을 받은 박정희 의장은
그에게 5.16혁명 기념패를 전달하고 육영수 여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외국방문 인사차 윤대통령 예방. 1961-11-11. (정부기록사진집5)
11월11일, 박의장은 미국, 일본 방문을 위해 의장 공관을 나서 먼저 청와대로 윤대통령을 예방했다.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다.
효창운동장의 문화예술인 체육대회. 1961-11-11. (KTV-국가기록영상관)
이어 박의장은 효창운동장에서 열리는 공보부 주최의 문화예술인 체육대회에
육영수 여사와 참석해 관계자들을 격려한 뒤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