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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2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교회 공동체의 목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의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 사람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더러운 영의 권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깨끗이 하여 세상을 아름답고 좋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크리스천 공동체는 과연 세상에서 악마의 세력과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고 과감하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생각하고 주님께 용기를 청하며 노력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2.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이런저런 고발을 듣습니다. 가끔이지만 제일 싫어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어머니의 고발이기도 합니다. 그 고발은 주로 젊은 자매들이 신부님한테 너무 함부로 대한다는 이야기와 미사 참례 시 너무 짧은 바지와 어깨와 배꼽이 드러나는 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의 90%는 마음의 병입니다. 육체적인 병은 병원에서 고칠 수 있지만 가슴에 응어리 진 것은 명의라 해도 고쳐질 수 없지요. 우리들의 주변에도 이러한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치유해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린 것과 같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고쳐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응어리진 것이 풀려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응어리를 더 만들어주는 곳이 되고 있는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3. 하느님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그럴듯하게 순례자(巡禮者)의 길을 가라고 표현합니다. 순례자의 길은 진리 탐구의 길이며, 신앙생활의 길이며, 모험의 길이며, 완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삶의 길입니다. 이방인들이 걷는 길을 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은 숱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삶을 따라서 산 전력을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사마리아 인들에게도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일본사람들에게 아주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안목으로 보면 우리들의 감정은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지요. 먼저 우리는 사랑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여인의 얘기들 통해서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심어주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듯이 우리의 감정을 먼저 순화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순화시키는 일은 자연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억지로 선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억지로 선교하는 사람들을 자주 대하고 있습니다. 억지선교는 사마리아 인들에게 가는 일입니다.
5. 길 잃은 이스라엘 집안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교회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냉담하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 잘 아시지요. 우리는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신자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냉담한 신자를 먼저 찾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자연히 같은 민족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과 예수공동체의 이론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은 사람들이 가슴이 응어리져서 다시 발길을 돌린다면 이는 우리들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길 잃은 이스라엘 집안을 찾아가라고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6.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들도 회개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선포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계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세상에 선포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그 어떤 성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저희를 파견하시는 주님! 그 동안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묵살한 채 살아온 불성실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형제자매들의 응어리진 가슴을 풀 수 있도록 힘쓰게 하시고, 우리의 잘못된 시선이나 편협 된 감정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을 주소서. 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데 저희 모두가 앞장서게 하시어 예수님 닮은 공동체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0,1-3.7-8.12
1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3 이제 그들은 말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금이 없지만 임금이 있다 한들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리오?”
7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8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그때에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쳐 다오!”, 언덕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 하고 말하리라.
12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축일7월 6일 성 이사야 (Isaiah)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 연도 : -8세기BC
같은 이름 : 이사이야
"야(훼님)는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성 이사야(Isaias)는 기원전 760년경 아모스라는 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사 1,1). 이밖에 그의 가족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체나 언어 기법, 도시인들이 즐겨 쓰는 은유, 또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때문에 그를 이 도성 출신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시찰 나갔을 때 그가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음으로 보아(7,3), 귀족이었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귀족처럼 왕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없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소명 환시를 근거로 이사야가 사제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6장의 배경은 성전 안팎이 다 될 수 있다. 6장의 환시를 보기 위해서 이사야가 굳이 사제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격조 높은 문체를 구사하고 강력한 웅변력을 발휘하는 이사야가 평범한 집안 이상의 출신으로 고급 교육까지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사야가 임금이나 조정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의 종교, 정치, 사회 정책을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출신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이사야에게는 아모스나 호세아처럼 ‘광야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집트 탈출 등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알지만 별다르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가 시나이 계약과 함께 선택된 민족의 양 기둥을 이루는 다윗 계약(2사무 7장)을 강조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왕실과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생활은 그의 사명 수행과 관련된 사항만 몇 가지 간략히 제시된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는데 두 아들에게 모두 상징적 이름을 붙인다(7,3; 8,3). 자식들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8,18). 이렇듯 이사야는 혼인과 가정생활까지 통틀어 온몸으로 하느님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소명을 받고(6,1) 그 뒤 세 임금의 치하에서 활동한다(1,1).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이사야가 므나쎄 왕 시기(기원전 687-642)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며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순교했다는 전통은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 에녹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왕 시기에는 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므나쎄 왕은 온갖 외국 종교 관습을 끌어들였고, 야훼 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이사야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축일7월 6일 성녀 마리아 고레티 (Mary Goretti)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연도 : 1890-1902년
같은 이름 : 고레띠,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지방의 코리날도(Corinaldo)에서 가난한 농부의 여섯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지 고레티(Luigi Goretti)와 어머니 아순타 카를리니(Assunta Carlini)는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충실한 신앙생활로 인도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총명하며 예의 바른 마리아는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1896년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져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농장마저 포기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팔리아노(Paliano) 인근의 콜레 지안투르코(Colle Gianturco)로, 1899년에는 오늘날의 라티나(Latina)와 네투노(Nettuno) 인근 레 페르리에레(Le Ferriere)로 이사가서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며 루이지 고레티가 그만 건강을 잃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농장 주인은 그가 하던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을 구했는데, 새로 농장에 온 사람은 조반니 세레넬리(Giovanni Serenelli)로 그에게는 17살 된 알레산드로 세레넬리(Alessandro Serenelli)라는 아들이 있었다. 1900년 마리아가 10살 때 병약한 아버지는 말라리아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린 나이지만 마리아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동생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편이었던 마리아는 첫영성체를 할 나이가 되었으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그녀는 어머니가 알려주는 바를 암송하고, 어머니 친구의 도움을 받고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안 본당 신부도 자주 그녀를 찾아 교리를 가르쳐줬다. 마침내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5월 29일 감격스러운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미사 중에 본당 신부의 강론을 들으면서, 그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늘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그해 7월 5일 오후,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농장 일을 하며 이웃해 살던 조반니 세레넬리 가족과 그녀의 어머니도 모두 일을 나간 뒤였다. 그때 일하러 가던 중 핑계를 대고 돌아온 18살의 알레산드로는 자신의 셔츠를 기워 달라며 마리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베란다에 앉아 바느질하던 어린 마리아를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가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칼로 위협했다. 알레산드로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리아를 강제로 강간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큰소리로 “안 돼! 알레산드로. 이것은 하느님께 대죄를 짓는 거야!”라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가 끝까지 버티자 알레산드로는 이성을 잃고 날카로운 칼로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그녀의 몸에는 모두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뒤늦게 돌아온 가족들이 피범벅이 된 그녀를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다.
상처가 너무 심해 마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으나 의사들도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병원으로 찾아온 본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마지막 영성체를 했다. 본당 신부는 성체를 영해 주면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처럼, 너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든 알레산드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겠느냐?”라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할 겁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해 주실 거예요.” 이렇게 정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7월 6일 오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유해는 로마 남부 네투노에 있는 예수 고난회의 은총의 성모와 성녀 마리아 고레티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녀의 영웅적 덕행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순교자다운 죽음은 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그녀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한편 알레산드로는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종신형 대신 30년의 노동형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전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밤 한 어린 소녀가 머리에 화관을 쓰고 하얀 베일을 휘감은 채 손에 백합을 들고 나타난 것을 보았다. 자신이 참혹하게 죽인 소녀가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와 백합꽃을 전해주는 꿈을 꾼 뒤에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며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은 형기를 모범적으로 마치고 출옥한 알레산드로는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어머니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어머니 역시 이미 자신의 딸이 용서했다며 그를 껴안고 기꺼이 용서해 주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47년 4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는데, 그때 알레산드로는 시복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어린아이를 성인품에 올리는 문제로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교황청 시성성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수호한 그녀의 영웅적 행동을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0년 6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의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은총과 그 은총에 대한 굳은 결의의 응답에 의지하여 목숨을 바치고 동정의 영광을 잃지 않았다.”라며 그녀를 일컬어 ‘20세기의 성녀 아녜스(Agnes)’라고 칭송했다. 이 시성식 미사에는 성녀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회개한 후 새사람이 된 알레산드로도 참석했다. 알레산드로는 후에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평수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회개와 봉사의 삶을 살았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모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히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성도덕이 문란해지는 현대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이사야(Isaiah) 형제들과 마리아 고레티(Mary Goretti)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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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