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9.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마음을 아시네. 유낙준주교.
+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제힘으로는 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 해요.
저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저를 하느님이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요.
저는 제 생명을 보존할 수도 없어요. 제 생명을 취하셔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 주셔요.” (189쪽에서 발췌,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웰리엄 웰리몬 지음,비아출판사).
옛 아담은 죽고 새 아담이 내 안에 자리잡기를 선포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 지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 삶이 전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성사가 세례성사입니다. 죄를 씻는 물예식은 하느님의 아들이 됨이라는 취임을 선포합니다. 3번 물로 씻는 예식은 빠스카3일을 상징하여 3일간의 죽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물을 길들이시는 하느님으로 물이 생명의 기원임을 선포하지만 노아시대에서 물은 죽음으로 몰고가는 상징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노아식구들이 탄 배가 떠있게 생명을 받치는 물로 나타나 무지개를 선보이게 합니다. 무덤이었던 물이 이제는 자궁의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은 죽음과 생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을 죽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시는 삶으로 새롭게 태어나시길 빕니다.” 이렇게 하며 세례성사시에 이마에 성유로 십자성호를 사제가 세 번 그어 줍니다. 그렇게 하여 세례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새로운 세례명을 받습니다. 왕처럼, 귀족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 귀족으로 살라 선포하는 세례성사를 마치게 됩니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 입구에 있는 벽면에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둡니다. 전쟁이나 타락이나 물 등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의 명판이 기재되어 성당에 들어오면서 이들 영혼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쉬어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당 입구에서부터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씀이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검은 색의 케석이나 셔츠를 늘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당입구에서 신도들을 맞이하는 세례대가 놓여 있습니다. 세례대는 늘 묘지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세례가 세상이 죽고 주님나라가 시작된다고 보았기에 먼저 자아가 죽는 것을 상징하게 세례대 모양이 묘지모양을 하는 것입니다. 1559년 기도서는 “옛 아담이 죽어 묻히게 하사 새 사람이 일어나게 하소서. 육욕이 죽고 영이 자라게 하소서. 악과 세상과 육신에 대항하여 이기고, 승리를 거둘 힘과 권능을 주소서.”라고 세례대 앞에서 기도하게 합니다.
성당입구에는 세상처럼 찬란하게 환대하는 문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묵상하기 자리를 성당에 들어오면서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기를 과장되게 말하는 휫수가 적어지듯이 겸손이 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항상 묵상하는 신앙생활이면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겸손은 인생 전체를 건 아픔이거나 파괴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대개 겸손이 죽음을 맛본 것과 같은 모진 상황을 마주했을 때 싹이 틉니다. 죽을만큼 아플 때 우리는 겸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 속에서 부활하신 것을 우리도 경험하게 하시듯이 주교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삽니다. 주교의 케석과 셔츠가 핏빛인 이유는 주님을 위한 첫 번째 순교자로 죽음을 벗으로 두고 살라는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현실에서는 주교가 죽음을 늘 피하려고 하지만 피할수록 부끄러움만 짙어집니다.
"공감하시네"라는 청년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마음을 아시네. 가까이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네"라는 노래가사가 마음이 듭니다. 주님이 해결책을 주시는 발전세대들의 완전정복책으로 공부했던 하느님에 대한 가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복음성가에서는 상황을 공감하는 하느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세대를 반영한듯 합니다. 오늘 여러 번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