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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독립운동의 산실 만회고택(晩悔古宅)...........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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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독립운동의 산실 만회고택(晩悔古宅)...........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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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봉화군, 독립운동의 역사와 뿌리가 살아 숨 쉬는 '봉화 해저리(바래미) 마을'에서 토담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골목길을 다니고 있다. 시골이라기보다는 구국운동의 얼이 깃든 마을로 14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 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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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림의 전통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고장 봉화는 한글 마을 이름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자 살아있는 민속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일까 왼지 마을이 평화
로우면서도 포근하고 아늑한 게 정말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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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 고택(晩悔古宅) 입구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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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들은 아랫마을이 윗마을보다 더 촘촘하다. 아랫마을 한가운데 들어서면 김건영가옥도 보인다. 사랑채는 지역 유림들이 파리장
서에 연명(連名)한 곳으로, 1차 유림단 의거의 한가운데 있던 집이다. 연명에 참여한 사람은 마을 원로들이었다. 김건영은 72세, 김
창우는 66세, 김순영은 59세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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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여행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독립운동가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바래미 마을이라는 곳이다. 바래
미 마을의 해저(海低)는 하상(河上)물보다 낮은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다 밑이라고 해서 바래미라고 부르게 되었
다. 해저리는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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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봉화읍의 서쪽 매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 잡은, 바래미 마을은 봉화읍 소재지에서 영주 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2차선 도로 옆 우측 산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바래미 마을은 영남의 대표적인 동성 의성김씨의
집성촌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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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고택(晩悔古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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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마을 18곳에서 독립유공자를 열 명 이상 배출했다. 안동이 8곳이고, 나머지는 영덕, 의성, 청도, 봉화, 예천, 청송이다. 마을의
영광이요, 가문의 영광이다. 봉화 마을도 영광의 한 자리를 거뜬하게 차지했다. 주인공은 바래미 마을이다. 닭실마을을 봉화 최고로
치지만 독립유공자 얘기만 나오면 닭실은 꼬리를 내리고 바래미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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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고택(晩悔古宅)의 얼굴격인 사랑채와 명월루(明月樓) 명월루 현판은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돈인(權敦仁)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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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고택(晩悔古宅) 현판 역시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돈인(權敦仁)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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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성김씨 집성촌 가문에서 정조(재위 1776~1800)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이 당시 영남 사
람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의성 김씨 문중이
1700년대 마을에 입향 후 200년 동안 대과 16장과 진사 19명, 생원 44명의 소과 63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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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그 학문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의성김씨의 충의는 일제시대에 까지 이어져 독립유공
수훈자 14명이 나왔으니 이는 봉화고을 바래미 마을이 독립운동가의 본향일 수밖에 없다. 그~독립운동 중심에
는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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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헌(淸風軒)' 현판은 관찰부주사를 지낸 석호 금상기石湖 琴相基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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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창 김홍기(晩蒼 金鴻基.1878~1931)는 1919년 심산 김창숙(金昌淑)을 도와 파리장서의 서명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것이 1차 유림단 사건, 이른바 파리장서 사건이다. 1925년 김뢰식,강필 등과 함께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여 부
산 동래에 은신중인 심산 김창숙에게 전달하였으나, 이듬해 군자금 모금활동의 전말이 발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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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독립운동 기운이 가득한 마을에 만회고택(晩悔古宅)이 자리한다, 유랑자는 이 만회고택을 찾아가는 길이다.
봉화의 여름 날씨는 믿을 게 못 되지만 한 여름 인데도 불구하고 한낮은 생각보단 시원스럽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날씨 금방이라도 비는 내릴 것 같지만 그렇다고 금방 또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은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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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가운 햇볕을 피해 유랑자는 만회고택을 찾았다. 먼저 재미있는 것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도 그 흔한
솟을 대문하나 없는 평범한 고택이다. 집을 저당 잡혀 돈을 독립군 자금으로 다 내 놓아서 일까?
암튼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집. 이리오너라~ 하고 노크할 문짝 하나도 없다. 이거는 무순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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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마을이 예전에는 솟대가 많이 걸렸다는데 이제 솟대 대신 온 마을에 태극기가 나부낀다.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점을 알리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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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 지난 후인 1925년, 김창숙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해저를 찾는다. 이 때 100여 가구 문중들이
황소 30여 마리와 논밭을 팔아 황소 50마리 값인 500여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 일로 김뢰식, 김헌식, 김우림, 김창근,
김창희, 김홍기 등 8인은 징역 3년형을 받았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구금 고문을 당하였다. 이것이 2차 유림단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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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明月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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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들어와도(도둑님빼고) 된다는 뜻?, 유랑자는 노크할 대문이 없기에 그냥 들어간다, 널따란 마당을 앞에
두고 검게 바랜 춘양목 건물 아래 난간이 있는 대청마루가 한가롭게 보인다. 과거 속으로 시계 바늘을 돌리는
시간. 옛 풍취가 물씬 느껴지는 고택, 뒤로는 밤나무 떡갈나무 사이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청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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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의를 둘러싼 흙돌담을 따라가면 330여년전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의 만회고택이다. 대청마루에 앉아
천년세월 맑은 물을 솟아내는 샘을 길어다 우려낸 녹차 한잔이면 세상 시름 다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
기다. 이러한 그림이라면 사진작가들에게는 발품이 아깝지 않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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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대청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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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은 3·1운동 후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
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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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만회고택(晩悔古宅)의 얼굴격인 명월루(明月樓)가 눈에 들어온다, 明月樓의 현판은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
돈인(權敦仁) 글씨이다. '명월루는 독립유공자 김정진(金正鎭)선생의 5대 조부인 만회 김건수(晩悔 金建銖 1790~
1854)가 1830년(순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후 내려와 만회고택의 사랑채로 건립하였는
데 1850년 (철종 1)에 대규모 수리가 있었다고 한다.
만회고택의 명월루는 소백산 태백산하의 청풍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영을 읊고 학문을 닦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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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정진(金正鎭 1925 – 2013)선생은 만창 김홍기의 아들로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이상호李相虎단장이 조직한 항일학생결
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1942년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
로 하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그러나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원 26명이 모두 체포되었고, 체포후 일경은 혹
독한 고문을 가하였으며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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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에서만 약 1,000편 이상의 시가 쓰여졌다고 하니 당시의 영남 유림에서 내 내노라하는 인물들의 집합장
소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이렇게 영남 유림들이 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 명월루는 해저마을 독립운동의 산
실이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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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계열 유림 독립운동의 구심점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었다. 김창숙은 해저마을 사람들을 독립운
동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해저마을 사람들의 유형ㆍ무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해저마을에 들
어와 활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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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에서 지었을 晩蒼 金鴻基만창 김홍기)의 시를 소개해 본다.
'次呈囿春翁梅花詩韻'(차정유춘옹매화시운)
我屋深藏一樹梅(아옥심장일수매)우리집 깊숙이 숨겨놓은 매화 한 그루
臘天將盡始花開(납천장진시화개)섣달 다 가려하니 비로서 꽃 피네
淡粧媚笑生百姸(담장미소생백연)담박한 단장 요염한 웃음에서 온갖 고움 살아나는데
所懷伊人在誰邊(소회이인재수변)그리운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水南春翁來一賞(수남춘옹래일상)물 남쪽 유춘옹이 와서 한번 감상하니
氷魂不覺倍淸爽(빙혼불각배청상)빙혼氷魂은 어느새 곱절이나 청량 해졌네
念我於渠對朝昔(염아어거대조석)내가 너와 조석朝夕으로 대하노라면
常憂不稱自歎息(상우불칭자탄식)미치지 못함을 늘 근심하며 절로 탄식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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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의 아버지 생가가 만회고택 왼쪽 마당에 있었다고 전해지니 이래저래 만회고택은 독립운동의 기운이 가득한 집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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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은 해저마을에 왔을 때 이곳 명월루에서 거처하였다. 그러므로 의성김씨 만회고택의 명월루는 해저 독립
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다. 명월루는 3.1운동 직후 유림들이 김창숙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
여 파리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제출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작성하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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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 고택(晩悔古宅)은 춘양목으로 유림질서에 따라 6고로 지어진 안채가 330년(1690년), 사랑채가 200년된 역
사와 문화를 가진 한국의 전통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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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에서 지었을 石湖 琴相基(석호 김상기)의 시를 소개해 본다.
'晩蒼逸居'(만창일거)
明月樓中月(명월루중월)명월루에 달 뜨고
淸風軒上風(청풍헌상풍)청풍헌에 바람 부니
一生高枕臥(일생고침와)평생 베개 높이 드러누워
風月主人翁(풍월주인옹)풍월의 주인옹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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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明月樓)대청 :유랑자는 명월루에 올라 앉아 밖을 바라본다. 펑화롭고 여유로운 정자, 전망이 참 좋다. 옛일은 까마득해지고
마음은 편안하다. 심산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지고,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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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明月樓)는 앞뒤로 트인 대청을 사이에 두고 텅 빈 마당을 집 앞에, 식물을 심은 후원을 집 뒤에 두었다. 들문을 열면 이 공기가
대청을 지나면서 집 전체를 시원하게 해 주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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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明月樓)대청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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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대에 12명의 진사와 6명의 대과 급제자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록상 영남 최고의 명문가이자 심산 김창숙
(心山 金昌淑 1879~1962)의 아버지 생가(지금은 없어짐)가 있었던 자리로 대표적인 집이다. 3명의 독립운동가
가 태어난 곳이자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한 명가로 독립운동가의 관찰이 수백통 발견돼 보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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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는 1850년(철종 1)에 중수하였다. '국가유공자의 집' 표지판이 겸손하게 집안 내력을 알린다.
만회 김건수(晩悔 金建銖)는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2년 뒤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고, 1834
년 명릉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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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루(明月樓)대청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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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해저리(海底 바래미 마을)에는 학록서당, 남호구택과 영규헌, 개암고택, 팔오헌고택, 참판댁, 해와고택, 김건영 가옥, 단사정과
학록서당, 소강고택,만회고택 등이 있다. 바래미마을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이 5곳이며 영조이후 약 200년간 17대과와 63진사
를 배출하여 동시대 기록상으로 영남최고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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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장악원판사·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현풍현감에 재직하면서 아울러 창
녕·청도·양산·영산의 4군을 다스릴 때, 밀양포(密陽浦)에 수송해 온 세미(稅米)를 둘러싸고 밀양의 관리들이 농
간을 부리자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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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김해부사·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때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만회헌
문집(晩悔軒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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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 마을은 원래 의령여씨들이 일부 살고 있었는데 조선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의성 김씨인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이 마을로 와서
우물을 만들고 농토를 새로이 개척하면서 정착한 이후 마을도 번창하고 의성 김씨들 집성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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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의 시 중 이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사상은 유교였지만, 3.1운동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들의 종
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주를 이루었고, 정작 유교 대표는 없었다. 김창숙은 유교 대표로 서명을 하려고 했으나 서명할 기회를 놓
치고 이렇게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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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도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오유(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
부유(정신이 아주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 라고
매도 할 때에 우리는 어찌 그 치욕을 견디겠는가."
심산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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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이 단재 신채호와 함께 여순 감옥에 있을 때 단재 신채호를 먼저 떠나보내고 단재를 애도하면 지은 시입니다.
*단재를 애도하며.
들으매 그대의 시신을
금주의 불로 태웠다 하니
이 땅의 정기 그대와 함께
모두 거두어졌도다
옥루의 수문으로
그대는 잘 갔네만
항아리 속에 갇힌
하루살이같이
뒤에 죽는 사람들
이 부끄러움 어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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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앙에는 학록서당과 큰 샘이 있고, 아랫마을에는 학이 날라와 앉았다고 하는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김씨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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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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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51
(지번)봉화읍 해저리 485
소개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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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봉화 관광도 하도 역사공부도 하고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네 다른것 보다도 일단은 청정 지역이라는 것
그리고 바람도. 구름도. 기차도 쉬어가는 곳인 만큼
우리 인간들도 쉬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ㅎㅎㅎ
특히 계곡물은 말 그대로 옥수들 입니다.
이런 곳이라면 여름엔 발 물에 담글만 하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