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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기 전,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턱수염의 남자가 길 위에서 무엇인가를 응시한다. 굽은 등에 비해 어깨는 꼿꼿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목을 젖혀 하늘을 보았다. 소리가 먼저 시작되자, 이윽고 검은 군중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남자는 두 손을 위로 들고, 기도 같은 것을 했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나도 새들이 천둥소리를 내면서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장면에 순식간에 압도당했다. 넋을 놓고 바라본다. 새가 이동하는 시절이 시작됐다.
길을 계속 걷다가 또 다른 이웃을 만났다. 할머니는 얼마 전 남편을 잃었다. 집에만 있으면 온몸이 아파서 어떻게 해서든 나와야 한다고, 두 손을 꾹 집고 휠체어를 밀어 골목을 배회한다. 회색 하늘 밑에서 우리는 함께 새들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다. 새 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할머니의 뒤통수 그림자 밑에서 내 그림자를 대어 본다. 한로(寒露)가 막 지난 이즈음, 동네마다 찬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새 중 가장 튼튼한 날갯짓을 하는 새가 삼각형의 꼭짓점에 선다. 꼭짓점이 먼저 앞서 길을 터면, 삼각형의 마지막 끄트머리에 붙어서 따라가는 새들은 앞서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야 한다. 모두가 잘 날기 위해서는 부채꼴의 꼭짓점으로부터 뻗어 가는 두 변이 완만하게 둥근 곡선을 만들어야 한다. 두 변을 만드는 거대한 새들은 끄트머리에서 죽을힘을 다해 힘껏 따라붙는 약한 새까지 어르고 달래 모두 함께 목적지까지 간다. 소외되고 사라지는 새는 없다.
한 마리가 홀로 힘이 빠져 길을 잃어 낙오되어도 곁에서 같이 날던 새가 같이 내려와 낯선 땅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철새들의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 모든 새가 함께 날아가기 위한 여행이다. 다른 새들보다 느리고 약한 새가 있어도 함께 선뜻 뒤처져도 되는 의리 있는 날갯짓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저항을 거스르는 힘은 바람을 가르고 구름을 품다가, 더 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이 빠져 추락할 것 같으면 자리를 바꿔주는 친구들이 있다. 서로의 도움으로 완전한 도형을 만들면서, 그들은 함께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는 이 장면을 매년 배웅하고 마중한다. 모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장면이 무척 경이롭다. 초겨울 대낮에 뜬 검은 별 무리의 날갯짓이 만드는 절경은 고개를 들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다. 새의 길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다. 늘 사라지지만, 외롭지 않은 길이며 누군가 마중 나와 기다리는 길이다. 상실을 기억하고도 다시 빚어 놓는 길이다. 하늘에는 자기들만이 아는 방향이 있고, 바람에 맞서 방향이 조금 틀어져도 자기들이 가려던 방향으로 갈 줄 아는 새들은 그 길 위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 서로 함께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새의 여정과 날갯짓은 우리와 닮았다. 그들의 소리는 나를 들뜨게 하고, 울분과 흥분을 동시에 데려온다.
오늘도 하늘에서 새들의 소리가 쏟아진다. 고개를 들고 보는 내 옆에 지나가던 모르는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 하늘을 바라본다. 이방인의 옷을 입은 검은 턱수염의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노인도 하늘을 보고, 낯선 땅에 와 있는 나도 머리를 든다. 새들이 내는 삶의 소리가 하늘 가득 퍼져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얼굴로 하늘을 본다.
날아가는 새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서로를 도우며 날아가는 길의 끝에는 분명 안전한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소리친다. 나의 자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소란에 눈시울이 붉어졌고, 날갯짓에 숙연해졌다. 무리를 놓치는 작고 연약한 새를 가엾어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힘이 있듯,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 삶의 궤적을 따라서 날아갈 용기의 꼭짓점이 있다.
겨우내 잿빛 눈이 내리고, 흐린 날이 지난하게 계속된다. 한낮의 검은 별들이 수놓은 길에 새로운 계절의 구름이 무겁게 쌓인다. 서리가 내렸던 나날 동안 철새의 길이 하늘에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겨울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새들이 외치는 목소리는 생생하다. 소리가 기억을 빠르게 데려오면, 나는 새들의 목적지를 상상하고 낙오되었을지 모를 새들을 걱정하고 궁금해한다. 우리들이 보았던 그 많은 새는 자신들의 집에 잘 도착했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각자의 집으로 잘 가고 있는 걸까, 하고. 밤이 아닌데도 검은 별들이 순식간에 날아다닌다.
새의 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빛은 같다. 울어버린 낯빛, 절망으로 고개 꺾인 삶이지만 우리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으러 하늘을 올려다본다. 고개를 들기 전,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을 했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다행한 사람이 되어 주고 안녕을 묻는다. 우리는 모두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신만의 별을 향해 가는 철새들과 나와 우리를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엇비슷한 표정으로, 끝까지 서로 힘이 되어 주며 날아간다. 비슷한 시절을 보내며 우리는 어느새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의 눈빛은 불완전했으나, 새의 길을 생각하는 마음처럼 무엇인가를 희망하는 우리의 얼굴은 모두 같다. 희망의 얼굴, 소원의 얼굴이다. 불완전한 도형의 끝자리에 있는 새들까지 모두 함께 날아가는 철새의 여정처럼 우리도 완전한 원이 아니어도 비어 있는 삼각형 대열을 채워 함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간다. 쓸쓸하고 허전한 삶이라도 분명히 있을 따뜻한 목적지로 향해 간다.
우리는 벌판 어딘가에 꽂힌 꼿꼿한 솟대 같다. 새들을 배웅하고, 마중하며 희망하는 마음을 품고 함께 날아가는 사람들이다. 겨울이 깊어지는 밤이다. 이미 철새들은 안전한 자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