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서 우파 지식인들은 휩쓸리고 밀리고 있다. 그러나, 유독 밀리지 않는 세력이 있다. 바로, 월탄 박종화의 제자들로 알려진 분들이다. 박종화 선생이 이끄는 문단이었던 pen이 좌파 문단에 그대로 접속되는 상황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인내력 없이 바라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지식 상품으로서 소비자에게 전달해야 된다는 반인간주의적 교육학이 공교육의 이념인 7차 교육학의 시대에, 공부를 통해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서민들에게 스승에 대한 인간적 기대를 바라지 말라는 것에도, 이제는 분노의 마음이 지나간 것 같다. 어찌되었던 간에,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해본 이들이라면, <세대차이>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900년생 월탄 박종화가 대학 강단에서 제자들을 맞이했을 때, 가장 연장자가 1928년생이었다. 무려, 28년 차이였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젊었을 때, 박종화 선생의 노년기와 겹쳐졌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시도 때도 없이 종종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오늘날에 원형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우기듯이, 박종화 선생이 안 그랬을 보장은 없다. 그렇게 볼 때,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 젊은 세대와 '갭'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역사소설'텍스트는 답을 가지고 있되, 연구할 시간과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되 박정희 대통령의 존재를 현실로 가정하는 것만큼, 박종화 선생이 돌아가셨으되 역시 그러한 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집단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 세력이 경악할만큼의 다른 사고를 갖듯이, 박종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안티조선 강준만교수의 미당 서정주 비판글의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미당 서정주를 이용하는 사람들> 어디 문하임을 꼭꼭 밝히는 문단 풍습이 <주인>이 되고, 실존적이며 인간적 교류가 <노예>가 된 것이란 말이다. 어디 문하임을 밝히는 수준으로 '오야붕'을 밝혀적는 선이되, 인간적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강준만교수의 글은, 유도논리가 지나쳐서 가치가 거의 없는 글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파 문단이 사라져 버린 오늘의 문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강준만 교수는 월탄 박종화가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한 성균관대학교 출신이다.)
나는 '사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을 격렬하게 비판해 왔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기성세대에 드러난 <감각적 확신>을 '사실'이라고 보는 어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우파 문단을 사라지게 만든 감수성의 감각 속에 드러난 월탄 박종화는 월탄 박종화가 아닐 가능성을 인정하고, 다음 세대에 진지하게 새로운 연구 소통 출구를 열어야 된다는 것이다.
역사소설은 사회현실에 은근히 참여하여 '민족혼'을 불러일으킨다는 구절이 있으되, 이승만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한 월탄 박종화의 인생사를 지워 버리면,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관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에 '딱-'인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오염된 단어만 있으면, 무조건 박정희주의를 지키는 테두리에서 피해가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방식으로,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관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던, 인터넷에서 극소수의 개인만의 글쓰기에 나머지의 감성적 승복을 바라는 '권력적 글쓰기' 자체에 매몰된 구세대들의 엽기적 선입견 속에서는, 소시민적 비판의식의 왜곡도 쉬울 것이라 본다.
극소수 개인의 글쓰기에 감성적 승복이 요구되는 '칼로 혁명하는'에 대비되는 '문으로 혁명하는' 차원에 집착하면 하는 한, 사무라이 문사에 대해서 감히 천황 앞에 대들다니 하는 식의 비판의식 거세 움직임을 불러올 것이다. 기성세대가 많은 삶의 연륜을 쌓았다고 좌익들의 사람 이용하기 심리전에 안 말린다는 것은, 확실히 버려야 할 선입견이다. 신문 사설 논설위원의 권력을 뮤직 비디오에 나오는 가수와 춤꾼으로 바라보는 것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것이다.
나는 전교조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오랫동안 자기의 앞에 놓인 길만 바라본 우파정치신념의 어르신의 기대와 다르게, 동정의 마음을 가진 바 있었다. 과장을 하지 않고 대부분의 내 또래 세대가 그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대차'를 이용한 심리전에 말린 것임을 너무나 뒤늦게 알았다. 지금은 후회가 없다. 스승이 스승이길 먼저 포기한 사람이 잘못일까? 속아준 사람이 잘못일까? '참'이란 형이상학적 가치를 끼리 끼리 정치권력화 하여 독점하고, 사실상 갖다버린 사람들이 잘못일 것이다.
일본식 유교에서는 월탄 박종화 제자들의 사다리를 밟지 않은 새로운 연구가 불가능하다. 나의 감각적 확신으로 바라본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체가 될 수 없듯이, 박종화의 제자들에 감각적 확신으로 나타난 박종화는 박종화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감각적 확신을 '사실'이라고 옮겨쓰는 단어는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일그러진 것이다.
박종화 선생의 제자이신 분의 박사논문이 이광수가 주제이고, 가장 직계제자로서 평양이 고향인 분을 두었다면, 박종화 선생이 바라본 문학사관의 골격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어가도록 새로운 세대에 도와주는 분은 누구인가?
카프 문학의 상당 부분 시기까지 동정자 의식을 가진 박종화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본다면, 우파 사상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시각보다 유연한 것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을 잃어버릴 만큼의 훼절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가에서 우파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측면으로 존경할 분이 매우 적어진 날인 것 같다. 고려조의 역사가 고려조의 적인 조선조가 기록하고, 조선조의 역사가 조선조를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식민지 사람들이 기록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후대의 역사 평가는 매우 외롭고 고적한 스승의 날이었다는 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