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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7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5,17-26
복 음 : 요한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야! 친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니? 우리 다시 보지 말자.”
어느 형제님께서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그 정도까지는 도저히 해줄 수 없다고 하자 들은 말이라고 합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집 담보로 해서 대출받아야 빌려줄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정말로 친하고 귀한 친구였지만, 자신의 영역 밖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거절했지요.
이 거절에 쏟아진 친구의 말에 죄인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친한 친구이니 당연히 도와주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제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빌려주었지요. 그 돈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친구니까요. 하지만 이 친구를 20년 넘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연락 한 번 하지를 않습니다.
(연락처가 바뀌어서 저도 연락할 수 없습니다)
사실 친구는 나의 생존이나 경제적 이득에 상관없이,
그저 ‘관계’가 좋아서 곁에 두고 교류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 생존과 경제적 이득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친구가 아닌 ‘약한 유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이런 식으로 가까운 관계를 근거로 자기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대신 좋은 관계에 집중해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이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존재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함께 해야 할 분, 특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할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영원한 생명이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단순히 한 번 보고 끝날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으로 끝날 관계로 만들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할 분이 아니라, 내 세속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빛이신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문제만 해결해달라고 하면, 함께할 수 있는 깊은 사이가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께 그런 세속적인 문제의 어려움만 이야기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 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 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 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미술’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에서 몇 가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점’은 여분이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분이 없기에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원자’의 개념입니다.
2,500년 전에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선’은 점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분이 없는 것들이 모여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일견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정의를 내리는 데 선은 점이 이동하면서 생긴다고 합니다.
점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동에는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있다고 합니다.
수평이동에는 별 무리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수평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직이동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균형을 이루고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45도 기울어지면 된다고 합니다.
한자의 사람인(人)은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서로 기대고,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 선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힘을 가진 대사제와 사두가이파에 의해서
부당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사도들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정의롭지 못한 힘은, 부당한 힘은
자신들의 허물과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늘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억누르고,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해줍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 힘들은
지금 모두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력하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사도들은 2000년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주는 ‘빛’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가 들어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1)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다.
2) 하느님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다.
3)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메시아)’이신 분이다.
4)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5)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인간들을 구원하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분이다.
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7)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요한 1서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이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아버지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모든 일을 아들 예수님에게 떠맡기신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내주신 일은
사실상 당신 자신을 내주신 일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화를 내면서 ‘밖에’ 있는 큰아들을 타이르려고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로 갔습니다.(루카 15,28)
그것과 똑같이,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고있는 작은아들을 타이르려고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을 보내지 않고 자기가 직접 갔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작은아들도, 큰아들도 모두 집 안에 들어와서 함께 잔치를 벌이는 것뿐입니다.
작은아들을 처벌하는 것은 결코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만일에 작은아들이 재산을 모두 탕진한 뒤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면?
그러면 아버지는 “네가 한 일이니, 너 스스로 일을 해서 그 빚을 갚아라.”라고
명령하지 않고, 작은아들 대신 자기가 그 빚을 모두 갚아 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여기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마태 7,21)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심판 자체를 면제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마지막 날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는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구원받는 일에 관심이 없는 자들도 포함됩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고,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이 말씀은, 죄 속에서 살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는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렇다.”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에는 관심 갖지 않고,
현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사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는,
뜻으로는 “그들이 하는 일은 악이다.”입니다.
하느님과 메시아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내세에 대해서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만 바라는 것은 ‘악’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종교도 싫어하고, 신앙인들도 싫어합니다.
그것은 ‘빛’을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렇게 살면서 자기 삶에 만족하기 때문에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쪽으로 가기는커녕 더 멀어집니다.
(바로 그런 삶 자체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했음을 드러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빛을 향해서, 즉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했음이
모두 세세하게 드러날 것이고, 구원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선교의 주역이신 이유, 四奇之恩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 3,19-21).
이 빛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시어 드러내어 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계시 된 사랑의 진리에 대해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모범을 보여준 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에 충실하면서(사도 1,15-26)
서로 섬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공동생활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사도 2,42-47; 4,32-37).
그리고 사도들은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여
수많은 유다인들의 개종을 이끌어 냈고 어떤 경우에는 3천 명(사도 2,41),
또 다른 경우에는 5천 명(사도 4,4)을 입교시키기도 했습니다.
진리에 빛나고 또 예민한 성령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공동체를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등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세우고자 했고, 또 유다인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사방 곳곳에서도 세우고자 동분서주했습니다.
열두 사도들이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필적하는
한 몸처럼 빠름의 은총을 받아 움직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우셔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사도 9,1-31)
이 작전은 소아시아 전체와 종내는 로마제국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성령의 사기지은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몸 게다가 박해자였던 바오로의 몸을 통해서도 발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사기지은이 뒷받침된 사도들의 활동을 선교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이 선교 사도직 활동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감독 겸 주연이셨고, 사도들이 조연이었습니다.
신기한 일들은 많이 일어났는데, 대사제가 사두가이들과 함께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당신의 천사를 시켜 탈옥시키신 하느님의 개입은
베드로가 불구자를 고쳐 줄 때에도 일어났고(사도 3,1-10),
다른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도 일어났는데
병자들의 치유는 물론 악령을 몰아내는 구마의 기적도 일어났습니다(사도 5,16).
박해를 받는 경우에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 할 수 있는 인정을 받았다고 기뻐하는”(사도 5,41) 마음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마귀가 함부로 하느님 일꾼들의 마음을 상하지 못하게 하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이 빛으로 나아간”(요한 3,21) 선교의 역사는
이 땅에서도 매우 긴박하면서도 극적으로 펼쳐진 바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기념비적인 저술인 ‘천주실의’와 판토하의 ‘칠극’이
조선에 유입되어 읽힌 150여 년 동안 숱한 선비들이 읽었지만
유독 이벽만이 천주교 교리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달았고,
그래서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양반 중 무반 벼슬을 마다하고
일찌감치 신앙의 길에 정진하는 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진리에 예민함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에 학문으로나 인품으로 고명하기로 이름났던
양근 선비 권철신을 찾아가서 열흘 동안이나 설득한 끝에
그와 그의 문하 선비들이 실학을 연구하던 주어사와 천진암으로 찾아가서
기어코 그들 모두를 천주학 연구자로 만들더니 결국 천주교 공동체로까지 이끌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런 과정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데,
선에 대해 밝고 빛나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벽과 동료 선비들은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 오게 한 후에
자신들도 세례를 받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성사 운동을 전개했는데,
한두 해 사이에 한양에서만 천여 명이 입교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이벽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10명의 선비들은
이벽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성사 활동과 교리 교육 활동을 전개하여 몇 년 만에 4천 명의 신자를 얻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성체성사까지 베풀자
만여 명으로까지 신자들이 늘었습니다.
이것이 천진암 강학회와 이승훈의 세례(1784년) 후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날 때까지
불과 16년 사이에 일어난 선교 발전이었습니다.
이전 반만년 역사에서 보지 못한, 빠름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빠름입니다.
이벽이 문중박해를 받을 때에나 동료 선비들이 조정박해를 받을 때에
조상제사금지령으로 인한 혼선이 빚어지기는 했으나
이벽과 이승훈, 정약종, 윤지충과 권상연, 황사영 등은 순교를 선택했고,
정약전과 정약용 등이 유배형을 받기는 했지만,
천주교로 인한 진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배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는 자산어보나, 여유당전서 등
저술로 교우촌 신자들과 후대의 신자들에게
천주교로 개혁될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서 신앙의 증거를 남긴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치 못함의 은총이 이들 양반 선비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 중인 이하 계층의 신자들에게도 두루 풍성하게 내려서,
이후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배교 하느니 차라리 심산유곡에 찾아들어가서
교우촌을 세워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겠다고 선택하는 소리 없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박해의 칼날도 교우들의 신앙 의지를 상치 못함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나타난 한국교회의 사기지은 현상은 매우 뚜렷합니다.
이제는 이 빛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인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0.21)라고 하십니다.
어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체성은 나에 대한 믿음입니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려고
할머니에게 사인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춤을 춥니다.
그런데 일본에 살면서, 그리고 그런 정체성을 유지하는 힘을 얻지도 못하며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빛’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르침으로 우리의 정체성도 알려주시지만,
당신 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할 힘도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제 코로나도 끝나가니
신자들이 본당에 나올 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받았습니다.
바빠서 안 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오늘 이 복음의 내용이 바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내용과 직결됩니다.
진리는 TV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에 힘을 실어주는 분은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실천하겠다고 하는 이는
연료는 채우지 않으면서 차를 운전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운전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영성의 발전단계를 이해하려면 요한의 신학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율법과 진리와 은총을 구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중략)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4.17)
오늘 말씀과 종합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율법 - 진리 – 은총”입니다.
율법은 사랑해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진리로 나아오지 못하면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진리로 넘어오는 과정을 ‘회개’라 합니다.
서울 변두리 경기도 시골에 사는 미정이는 삼 남매 중의 막내입니다.
시골은 서울과 대조되는 인간의 열등감을 상징합니다.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에서 고군분투하지만
미정이는 남자친구에게 돈을 떼이고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구 씨에게 독촉장이 오도록 해놓습니다. 미정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을 확인받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미정은 시골에서 술만 마시며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한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구 씨에게 말합니다.
“왜 매일 술 마셔요?”
“아니면 뭐 해.”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 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봄이 되면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거예요.”
미정에게 사랑은 추앙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빈 가슴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약탈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보잘것없는 구 씨를 해방해 준다고 여깁니다. 구 씨는 말합니다.
“너 남자한테 돈 빌려줬지? 사내새끼들도 여우야.
돈 빌려 가고도 적반하장으로 지랄 떨면 찍소리 못하고 찌그러들 여자. 알아본 거라고.”
“그 자식이 돈을 갚으면 아무 문제 없을까? 그래도 똑같을 것 같은데.
한 번도 채워진 적 없고 거지 같은 인생에 거지 같은 인간들.
다들 잘난 척.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 말.”
“허. 미안하다. 나도 개새끼라서.”
구 씨는 마지막으로 일침을 날립니다.
“너는? 너는 누구 채워준 적 있어?”
사실 그녀도 누군가를 채워준 적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구 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내가 추앙해 줄까요?”
구 씨는 미정의 날아가 버린 모자를 찾아오기 위해 힘찬 도약을 시작합니다.
JTBC 토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일부분입니다.
미정은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모기이기에 관계란 자신의 노력으로 타인의 피를 빠는 노동이 맞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사랑을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진실을 깨닫게 하는 대상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구 씨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했다면 이제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란 자신이 이제 추앙받을 존재가 아니라 남을 추앙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앙하려 해도 이전과 같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으로는
결코 자신 안에서 남을 추앙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몇 번 해보다 실망합니다.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만들어졌을 때 피노키오는 자신을 인간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가지 않고 서커스와 타락의 섬으로 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낭비합니다.
천사는 피노키오에게 겉은 나무 같지만, 인간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나무는 거짓말해도 되지만 인간은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피노키오는 거짓말하면 안 되는 인간입니다.
피노키오가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진리에 다다른 순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준 제페토 할아버지는 큰 고래의 배 속에 있습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나왔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힌 것입니다.
피노키오는 할아버지를 구하러 갑니다.
할아버지만이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 줄 수 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람이요, 아들로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오는 믿음, 그것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진리를 거쳐 가는 ‘빛’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로 믿고 싶은데
성체를 TV로 미사 보는 것을 원한다면 말이 되는 것일까요?
피노키오가 자신이 인간이라면 아버지가 물고기 배 속에 있는데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추앙하게 만든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성체 안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죽음이라는 물고기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치지 않으면 내가 그리스도임을 믿을 수 없기에 성체로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와 빛은 하나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가 성체로 나아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성체가 곧 빛이신 그리스도이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를 실천할 유일한 힘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향해야 자신이 하는 일, 곧 진리를 실천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