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노회 산하에는 태인시찰이 있다. 태인면, 옹동면, 산외면 내에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소속 합동 측 12개의 교회가 연합하여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듯이 교회도 변하고, 사람이 변하듯이 성도도 변하는 모양이다. 옛날에 비해 연합제직회가 연합이 되지 않고 삐걱거린다. 작년부터 더욱 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작년부터 시찰 내 어느 교회에서 회계를 맡은 장로님과 목사님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노회에 사건을 의뢰하여 조사를 한 결과 장로님의 부정과 실책이 드러나 장로직을 박탈당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세간의 원칙이 교회 안에서도 적용되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장로들이 뭉쳤다. 누구 편이냐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한 자가 누군가를 분별하여 잘못한 자를 경책하고 권고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찰 내 장로님들이 차츰차츰 목회자들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니 연합이 될 턱이 있겠는가.
오늘(2012.4.4)은 태인시찰 연합 제직회로 모이는 날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회무 처리를 하는 동안 모 교회 장로님 두 분이 제동을 걸었다. 한 가지는 제직회 돈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매년 연합제직회에서 교역자 부부 모임에 100만원씩을 보조해 준다. 목회자 부부들이 일 년에 한 번 친목회 겸 수양회를 할 때 사용한다. 작년에 그 돈을 1박 2일 친목여행 경비에 보탰다.
그 장로님 말인즉슨, 제직회란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소속되어 있는데 왜 목사님들에게만 보조비를 주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에게는 안 주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공평하게 그 지출 항목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듣는 목사님, 사모님들은 씁쓸했다. 마치 거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날은 성도들이 목회자를 섬기는 일이 희귀해져가고 있다. 물론 목회자는 섬김을 받아야 하고 성도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목회자가 되었든 성도가 되었든 누구나 섬김을 받으려 하기 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은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누가 누구를 섬겨야 하는 법은 없다. 허나 통상적으로 목회자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주님의 종으로서 특히 시골 교회 목회자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려운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한 목회자들이 일 년에 한 번 연합하여 심신을 수양하러 가는데 100만원을 지출한 것이 그렇게도 아까웠다는 말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공식석상에서 목회자를 끌어 내리고자 함이었다는 말인가?
출애굽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왜 너희들만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셨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면서 그들을 대적하다가 멸망당한 무리들이 있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영의 자녀로 돌보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영의 부모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돌보라”라고 부탁하셨다. 목회자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돌보는 데 노심초사, 애면글면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성도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행여 병든 자는 없는지, 시험 든 자는 없는지, 어려운 일 당한 자는 없는지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오로지 성도들을 생각하며 사는 자들이 목회자들이다. 그것을 아는 자라면 일 년에 한 번쯤은 교회를 떠나 홀가분하게 여행을 다녀오라고 경비를 자원하여 댈 수는 없을까? 내가 사모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지금 내가 사모가 아니고 권사였다면 나도 그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공평함을 따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라는 성경 말씀에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지난 2월에 연합 부흥회 마지막 날 점심식사를 했을 때 목사님들 부부만 강사님과 함께 점심을 먹은 일을 두고 서운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로님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자비로 식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성도들이 인색해져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부흥회 기간에는 장로님, 권사님들이 다투어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로님들도 식사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부흥회를 할 때에 갈수록 헌금은 적어진다. 봉사하고자 하는 성도들도 줄어든다. 요즘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한다고 한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일꾼이 많으니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주일날 일찌감치 예배를 마치고 하루 온종일 자기 시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옛날에는 연합 부흥회를 하면 서로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다투어 순서를 타려고 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아무도 식사 대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사 목사님 식사 대접은 해야 하니 부흥회 지출 경비를 줄이고자 강사 목사님과 임원진 목사님들만 몇 분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에는 시찰 내 모든 목회자 부부들이 강사 목사님과 인사도 나눌 겸 자리를 마련했던 것인데 몇몇 장로님들이 그걸 서운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장로들을 푸대접한다고 괘씸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어쨌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시133:1)”라고 했는데 근래에는 곳곳에서 연합이 잘 안 되는 풍경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말은 잘도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냐 하며 자리다툼하던 제자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라고 듣기는 많이 들어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특히, 장로님들은 절대로 목사님보다 낮아지려고 하지 않고, 목사님들은 장로님들보다 더 낮아지려고 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는 교회들이 많다.
목사들이 어찌나 높아졌는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일이 다반사라 일찍 은퇴를 하고 평신도가 되었다고 어느 목사님이 쓴 글을 읽었다. 한편, 어느 장로님은 장로들이 모여서 맨 날 목사님 흉보고 어떻게 하면 목사님을 종처럼 부려먹을까 궁리하는 것을 보고 장로직을 사퇴하고 평신도가 되었다는 글을 썼다. 믿거나 말거나, 장로님 몇 분이 만나서 한다는 말이 “너희 종 ◯목사 잘 있냐?”라고 하더라는 말을 들을 때 슬펐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한 몸’이란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각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한 몸을 이루어 서로 교통하며 함께 하나님의 화목을 누리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에 새로운 담을 쌓아서는 안 된다. 네 교회, 내 교회, 네 교파, 내 교파로 분리됨이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연합된 제직회 안에서 장로니, 목사니 하여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우리들을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신 것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원수된 것을 소멸한 것도 십자가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도 오직 십자가인데 교회 안에서 자기의 유익을 따라 분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장애물을 소멸시켰는데 하물며 인간과 인간, 그것도 하나님 안에서 한 지체가 된 자들 사이의 장애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했다. 그런데 새사람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 어느새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고 제직회를 하는데 혈기까지 나와서 언성을 높였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되기 바로 전 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다.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 시대에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자는 그 집의 종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종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신 것은 자기를 따르는 우리들도 종으로서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기는커녕 상대방이 자기의 발을 씻어 주지 않는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1절 하반 절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다. 그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한 것이었다.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줄을 알면서도 그의 발을 씻기셨다.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교부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겨 주셨다고 한다. 자기를 팔 자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식었다. 그리하여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원하고, 섬기는 자가 되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자가 되기를 너도 나도 원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희미해져 사람들의 주장만 난무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겠다. 내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지.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