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작업실서 그림 시작해
조산사·요리사·청소부 등
소외받는 여성들의 노동과
사적인 휴식의 공간 다뤄
최근 가격급등 10억대 목전
넷플릭스 드라마 ‘조용한 희망’에서 주인공 알렉스가 살아갈 희망을 얻는 건, 일터에서 얻은 자존감 덕분이었습니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도망쳐 나온 미혼모에겐 딸을 부양할 의무가 있었죠. 대저택을 청소하면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번 돈이 삶의 토대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더러운 화장실을 솔로 닦는 알렉스의 뒷모습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1982년생 작가 캐롤라인 워커는 세상의 모든 일하는 여성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그림에는 알렉스처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늘 등장합니다.
프리즈 서울에서 스티븐 프리드만 부스에 걸려 인기를 얻었던 폭 3.4m의 대작 ‘출산 욕조(Birthing Pool)’는 출산하는 여인을 그렸습니다. 관람자의 존재를 모른채,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에 몰입합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임산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파란 간호복을 입은 간병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림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워커의 그림은 ‘영화적’이란 찬사를 받곤 합니다. 런던의 피츠로비아 성당에서의 열린 개인전에 출품됐던 작품입니다. 작가가 임신 중에 산부인과 병동에서 목격한 여성들을 그린 작업입니다.
조산사, 요리사, 청소부, 어머니들에 초점을 맞춘 워커의 그림은 미술사에서 간과되어 온 여성의 일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빛과 그림자의 사용에 능한 워커의 반짝반짝 빛나는 유화는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노동의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그녀들은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접시를 닦고, 식물에 물을 주고, 식사를 요리하고, 현미경을 들여다봅니다. 작가는 현실과 개인의 경험을 혼합해 작업합니다. 지난 4월 스티븐 프리드만의 개인전 ‘리사’에서는 시누이의 출산과 육아를 관찰하며 그린 육아노동의 세계를 그렸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현대 여성이 직면한 문화적, 경제적, 인종적 현실을 기록해왔습니다.
워커는 2009년 런던 왕립 미술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길지 않은 전시 이력을 가졌지만, 최근 시장에서 인기가 뜨겁습니다. 올 초까지만 해도 10만 달러 이하에서 살 수 있었던 그의 그림은 여름 이후 급등했습니다. 지난 10월 14일 런던에서는 재미있는 기록이 탄생했습니다. 2017년작 ‘Night Scenes’은 필립스 경매에서 시작가를 5배 뛰어넘은 51만6600파운드(8억3000만원)에 팔리며 환호를 받았습니다. 같은날 작가의 최고가 기록은 다시 깨졌습니다. 소더비 경매에서 ‘Indoor Outdoor’(2015)가 추정가를 9배 경신한 52만9200파운드(8억5000만원)에 팔린 겁니다. 여성들이 안도감을 느끼는 집안의 장소를 그린 작품의 가격이 치솟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작가는 어렸을 때 처음으로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가족 부엌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부엌에 마련한 첫 작업실에서 셀 수 없는 시간을 보낸 뒤 워커는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의 경험 또는 불안을 그리고 있기에 여성을 그린다. 동시에 희망적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멀리 떨어진 객관적 위치에서 그리려고 한다.”
워커가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시키는 건, 고독한 도시의 무표정한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시대의 작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림 속 이야기에 개입합니다. 워커의 그림에서 많이 등장하는 구도는 뒷모습입니다.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낭만적인 영웅의 뒷모습을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로 전범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일터의 어수선한 모습과 함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는 의연한 여인들의 뒷모습은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배경의 초점에서 벗어나면 그녀들의 세계를 보게됩니다. 그곳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적 영역입니다. 그 순간만은, 온전히 그녀들의 세계입니다.
런던 작업실의 캐롤라인 워커
프리즈 서울에 전시된 ‘Birthing Pool’
필립스 런던에서 8억 3000만원에 팔린
‘Night Scenes’
소더비 런던에서 8억 5000만원에 팔린
‘Indoor Outoor’
요리사의 뒷모습을 그린 ‘Catered’
청소부의 뒷보습을 그림
‘Study for floors room 324’
김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