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 나라에도 한국교회 만큼 예배의 종류가 다양하게 만들어졌을까? 한다. 대예배뿐만 아니라 1부에서 7부까지 드려지는 주일날 예배를 위시해서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가 기본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교회 나름대로 특징을 살려 각종 예배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매일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려지고 있다.
이보다 더 한 불교는 일천 배 삼천 배를 온 몸에 땀을 흘리고 기진맥진하여 하루 만에 끝나는 것을 볼 때 기독교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본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로 기타 종교와 비교하지도 말고 자랑하지도 말았으면 한다. 신앙의 대상에게 바치는 종교적인 의례를 중심으로 이루는 의식으로 인간의 상징적인 표현방식으로 되어 예배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다.
그러나 진정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으면 한다. 다수의 개혁주의교회는 여전히 의례적인 의식에 탈피하지 못한 가운데 의식이 예배의 거룩성을 보완하는 제도로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주일날의 예배는 거룩한 날에 드려지는 예배로써 명칭에서부터 대예배로 분류하고 있다.
제사형태로 드리는 예배행위와 유사하여 의식과 절차에 따른 예배가 신에게 열납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히브리서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의하자.
여기서 장막은 비유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지으라고 한 장막(성막)이 사람의 몸의 구조와 흡사한 인체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특히 성막을 덮고 있는 지붕 덮개가 네 개로 되어 있는데 사람의 피부가 4단계 층으로 되어 있다. 즉 예수의 몸의 형태를 갖고 있는 성막이 바로 내 안과 밖에서 역동적으로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드려지는 헌금(예물)이나 예배(제사)는 섬기는 자를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오는 말씀이 먹고 마시는 것(성만찬)과 여러 가지 씻는 것(세례, 침례, 성결)과 함께 육체의 예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행해지는 예배의 형태가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정확한 예언으로 히브리서에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통 기독교의 예배는 과거에서 지금에까지 전통적인 의식이 가미된 의례가 아니었다. 의전적인 형식이 아니며 제사의례가 아니라 교육적으로 내용전달방식인 성경공부의 일환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구약적인 제사행위에서 벗어나 건물 중심의 예배개념을 탈피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내용중심의 교육을 강조해왔었다.
예수님께서도 의례중심의 구약적인 제사보다는 신령(성령 안에서)과 진정(진리 안에서)의 예배문화 창출했고(요한 4:23~24) 사도 바울 역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합당한)예배를 주창했다(로마 12:1~2) 예배의 핵심적인 내용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분별하기에 합당한 예배를 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모이면 성경을 가르치고 상고했으며 성도들 간의 애찬(식사)이 예배의 전부였다. 가정과 회당에 모여 밤을 새워 성경공부를 했으며 어떠한 모임이나 예배 시에 현재와 같은 의례에 따라 어떠한 절차와 의식도 시행되지 않았고 실시된 사례가 전무하다. 예배에 시각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예수의 초상화나 제자들, 사도들의 초상화를 그려 내걸었다.
또한 애찬을 성만찬으로 변질되어 떡과 잔을 위압적이며 두려움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화체설이 등장하게 된 동기다. 제사장의 제도에 신성을 부여함에 따라 건물장소와 사용되는 물건을 신성하게 여기며 성전의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도임하여 예배처소를 거룩한 장소로 미화시켜 왔고 하나님이 특별한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각인시켜왔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의 예배에 사용하는 예법을 도입하여 등불과 향을 피우는 관습에 따라 성직자가 등단할 때 등과 향이 함께 등장하게 하였으며 성직자가 집전 시에 로마행정관들이 입었던 복장과 유사한 특별한 의복을 착용하게 했으며 로마관습의 의식을 접목시켜 찬양대를 조직하여 의식적인 냄새를 진하게 풍기게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특징은 성경을 공부하기 보다는 낭독하는 수준이며 강론도 설교보다는 로마교황의 훈시에 가까운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전을 통한 제사와 행위와 유사하여 예배시간을 과거 전통과 문화에 따른 의식으로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며 성직자는 예전의 중재자가 되어 거룩만 외치고 있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용어나 순서를 달리하여 예배순서를 작성하여 예배를 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가톨릭의 전통에 따라 가는 예배도 있다. 심지어 예배당 구조마저도 천주교 성당 양식을 따른다거나 프로그램도 모방하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다. 무 개념 속에 목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수께서 오신 이후의 예배는 복잡한 절차나 거룩성의 부과된 예배는 없었는데 로마와 그리스 종교문화를 비롯하여 기타 종교에 예법에서 적용하거나 접목시켜 예배의 본질과 원형에서 벗어난 예배를 만들어 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쳐왔던 개혁주의 교회마저 복잡한 절차와 보여주는 예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려는 자기계시인 성경을 교재로 삼아 초대교회에서 실시했던 것처럼 모이면 성경을 가르치고 상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딤전 4:13에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오직 성경공부에 전념해야만 한다.
찬송과 기도는 정해진 절차보다는 성도들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권면해왔으며 예배에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공부 전후에 따라 기도와 찬송이 행해져 온 것이 예배의 순서 속에 접목시켜 진행해왔던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복잡한 절차와 보여주는 예전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참고로 열린 예배는 교회 안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 히피족들 대상으로 전도하기 위해 길 거리나 대중적인 장소를 빌려서 교회 밖에서 실행했는데 한국교회는 잘못 이해하여 교회 안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열린 예배인데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예배가 열린 예배의 취지며 목적인 것이다.
성경공부가 왜 중요한지 초대교회에서도 이미 입증되었는데 현재 한국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캐치플레이를 외치고 있지만 성경보다는 예배에서 설교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딤후 3:5)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아무런 목표도 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성경공부를 해야만 되는 중요한 목적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이 예배의 본질과 원형을 찾는 말씀이다. 즉 성경공부가 핵심인 예배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영적 분별이 예배를 드리는 취지가 되어야 하며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게 되는 지식만 쌓는 성경공부가 되지 말고 말씀을 배움으로 인해 마음의 결단을 하며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발견하여 분별력을 갖게 되는 것이 합당한 영적 예배가 된다는 뜻이다. 한국교회가 개혁을 외치기보다는 성경공부로 내실을 기하여 이단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