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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우리 이야기, 들어보실래요?서울가톨릭청소년연극제 참가한 충암고 연극반 ‘숨’ 문양효숙 기자
승인 2013.09.11 11:37:40
“거기 반대편으로 돌아서 퇴장해야지. 한 번 더 가자!” 한 장면을 벌써 몇 번씩이나 반복 중이다. 동선, 음향, 조명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되풀이되는 연습에도 지친 내색 하나 없이 “네! 다시 갈게요”라며 힘차게 대답하는 이들은 서울 충암고등학교 연극반 ‘숨’. 이들의 창작극 <하이스쿨패밀리>는 9월 7일 개막한 제2회 가톨릭청소년연극제의 개막작이다.
창단 첫 해에 대상 받은 충암고 연극반 ‘숨’은 가톨릭청소년연극제 참가팀으로 선정된 후,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무대를 만들고자 했다. 서로가 내놓은 이야기들을 장면으로 꾸미고, 퍼즐을 끼워 맞추듯 하나로 엮어냈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옆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잘생긴데다 싸움도 잘하는 병만이, 병만의 하수인처럼 사는 우진이, 성적을 중시하는 엄마 때문에 매일 공부 스트레스에 쌓여 있는 지훈이,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가수 지망생 종석이까지, 모두 대한민국 십대의 얼굴이다. 자칫 평범할 수도 있는 십대들의 일상을 그린 연극이지만, 장면 곳곳에 세심한 반전을 담았다. 치마를 입고 여학생 연기를 하던 남학생들이 갑자기 힘찬 군무를 하는가 하면, 병만과 우진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묵직한 장면에는 불쑥 술 취한 어른이 등장해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다. 십대의 재기발랄함이 넘친다. 각색을 한 최재영 선생은 “어떤 주제를 깊이 공략해서 해결하고 감동을 끌어내는 공연은 분명 아니지만, 우리가 즐겁고 무대에서 잘 놀 수 있는 연극,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충암고등학교 연극반은 작년에 만들어졌다. 국어를 가르치는 안선영(카나리나) 선생이 2년 전 우연히 교사연극협회에 가입해 교육연극을 배우고 보충수업으로 개설했던 게 계기가 됐다. 이 따끈따끈한 신생 연극반은 작년에 열린 제1회 가톨릭청소년연극제에서 대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수상은 연극반에 큰 ‘숨’을 불어넣었다. 작년 대표였던 3학년 서영훈 군은 “대상을 타고 탄력을 많이 받았다. 작년보다 훨씬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우진 역을 맡은 2학년 서종현 군은 “연기에 욕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작년에는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상을 받고 아주 조금 뭘 알게 되니 제 연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보여요. 올해엔 욕심이 생겼어요.”
“대학 가야 하지 않겠냐?”는 어른들의 우려 따로 연습할 공간이 없는 충암고 연극반 학생들은 한여름 운동장에서, 학교 건물 앞 벤치에서 작렬하는 태양빛과 매미 소리와 함께 연습을 했다.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8월 말, 교실 하나를 쓸 수 있도록 간신히 허락받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었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문제였다. 일주일에 한 번 동아리 활동 시간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한 여름방학 때부터는 매일 연습을 했다. 학원, 자율학습과 겹치는 서로의 시간을 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상되듯,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성적과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 활동을 반기는 ‘어른’은 많지 않았다. 연극반 학생들은 입을 모아 “공부와 병행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빼기 위한 담임선생님과의 갈등이 불가피했고, “너 대학 가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 빼앗겨도 되겠냐?”는 걱정 어린 시선을 견뎌야 했다. 서종현 군은 이날도 반성문 3장을 쓰고 나서야 연습에 올 수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연극하는 걸 미리 상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종현 군은 야간자율학습 감독관으로 온 어머니의 눈을 피해 연습에 참여했다가 집에 가서 혼이 나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서 군은 “즐겁다”고 답한다. “뭐가 제일 즐거워요?” ‘일진’ 병만 역을 맡은 2학년 홍윤기 군은 “경험해보지 못한 삶, 해보지 않은 것들을 체험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윤기 군은 병만 역을 소화하기 위해 일주일간 비슷한 캐릭터의 친구를 따라다녔다. “원래 이런 캐릭터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저도 이런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그 친구 쫓아다니면서 말이랑 행동 따라하니까 친해졌어요.” 윤기 군은 연극반에 들어오기 전까지 연극을 보러 간 적조차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던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동아리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습하고 잠만 자고 그랬어요. 내 고등학교 동아리 생활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 싶었죠.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 해서 연극반에 들어왔어요.” 반복되는 연습, 몸과 마음이 지치지는 않을까. 윤기 군은 “이걸 넘어섰을 때 뭐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 “작년에 두 달 정도 공연 준비하면서 처음이라 잘 안 되고 서로 싸우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다 같이 가서 결국 무대에 서고 마지막 장면 끝나면서 울었어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죠. 그러니까 반복되는 연습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이것만 참으면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걸 경험했으니까요.”
연극을 하면서 밝고 적극적으로 변한 아이들, “의미를 찾았다” 열정의 씨앗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라 삶 구석구석을 변화시킨다. 좋아하는 게 생긴 아이들은 변했고 누구보다 본인들이 그 변화를 직감했다. 연극반 담당 안선영 선생은 “연극이 아이들의 성격과 성적에도 영향을 줬다”고 전했다. “아이들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긍정적이고 밝아졌고 적극적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성적에도 변화가 생겼죠. 학교에 오는 게 자신에게 의미가 없으면 그냥 왔다 갔다 하기만 하고, 공부도 왜 하는지 모르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의미를 찾으니 학교 오는 게 좋고, 수업시간도 재미있어지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걸 절감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자주 말해주곤 했어요. 그 힘이 컸죠. 재작년보다는 작년에, 작년보다 올해에 더 열심히 해요.” 안 선생은 “수업 시간에 만나면 지루해하고 졸기도 하는데, 연극부 활동할 때는 완전히 180도 다르다”면서 “아이들이 너무나 자발적이고 책임감이 강해서 놀랍고 신기하다”고 말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연극반원들은 서로의 연기를 관찰하며 의견을 주고받거나 필요한 소품을 확인했다. 대화는 진지했고, 시선은 무대에 고정돼 있었다. 자기 순서가 아니어도 게임을 하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중하자”, “조용히 하자”고 말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연극제가 있어서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장이 열렸어요” 작년 대표였던 3학년 서영훈 군은 연습에 함께하면서 소품을 만들고 있었다. 교사들이 공연 때 쓸 여성 가발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자 “제가 사 올게요” 하며 흔쾌히 말한다. “지금 한창 바쁘게 수능 공부할 때 아닌가요?” 영훈 군은 “이 연극제가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장이 되어 주었다”고 말한다. “저희는 학교 축제가 크지 않거든요. 입시 위주다 보니 동아리 활동이 활성화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이 연극제가 있어서 저희를 표현할 수 있는 장이 열렸던 것 같아요. 작년에 대상을 받은 게 학교에서 공간도 없이 선생님들과 싸워가면서 연습해온 저희들에게 위안과 힘이 되기도 했고요.” 앞으로 청소년복지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영훈 군은 “연극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작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자신이 청소년이었지만 표현하면서 비로소 청소년 문제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영훈 군은 “연극을 하면서 소중한 것들을 참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힘을 합쳐야 하니까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힘이 커졌던 것 같아요. 자기를 표현하는 법도 배웠고요. 후배들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입시에 너무 시달리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고, 그걸 해 나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가.” 가톨릭청년회관 다리 관장인 유환민 신부(서울대교구)는 연극제의 의미를 묻는 우문(愚問)에 “아이들의 눈빛과 그들이 올리는 무대에서 무언가를 느낀다면 그것이 전부다. 내 말이 아니라 아이들 곁에서 느끼는 그것들이 이 연극제의 의미를 설명해줄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저의 1년은 연극제에 맞춰 돌아가요” 서울가톨릭청소년연극제가 시작된 7일 오후,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의 지하 극장에서는 첫 공연인 충암고등학교 연극반의 무대 설치가 한창이다. 여기저기 울리는 망치 소리 사이로 공연을 앞둔 종현 군이 대사와 동선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시원섭섭할 것 같아요. 야자 도망가고 연습하고, 담임선생님한테 혼나고 연습하고, 부모님께 혼나고 연습하고 그랬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하지만 제 1년 주기는 이 연극제에 맞춰져 있어요. 저의 새해는 1월 1일이 아니라 연극제가 끝나는 다음날이거든요. 이제 내년 연극제를 준비해야죠.” 공연 1시간 전, 무대 뒤에서는 안선영 선생이 한창 배우들의 분장을 돕고 있다. 한 연극반원이 무대에서 뛰어 들어오며 “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떨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선배가 후배의 어깨를 감싸더니 구석으로 간다. “물론 지금 우리가 연극대회에 출전한 건 맞아. 하지만 시험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험 끝나고 노래방 왔다고 생각해 봐. 즐기라고. 편하게.” 오후 3시, 충암고 연극반 ‘숨’은 신나게 놀 준비를 마쳤다. 막이 오르고, 문성환 군이 오프닝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자, 공연을 시작할 때가 됐네요. 저희 연극 재미있게 즐겨주세요. 그럼 <하이스쿨패밀리>, 박수와 함께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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