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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9일 금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사도 5,34-42
복 음 :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은퇴 후 시골에 내려와 사는 어느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도 그처럼 은퇴한 후 내려와 사는 분이었는데,
그래서 이 둘은 아주 친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옆집 이웃이 형제님에게 말합니다.
“이번에 이 동네에 이사 온 사람도 우리처럼 은퇴 후에 이곳에 내려온 것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한 번 우연히 만났는데 우리와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이 형제님은 물었습니다.
“은퇴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데?”
그러자 이웃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에 형제님께서는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과거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은연중에 과거를 통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려고 했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과거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를 알면 이상한 선입관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면 따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계사라고 하면 깐깐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또 정치인은 겉과 속이 다른 것처럼,
사업가면 자기 이익만을 챙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 정확하지 않은 예측일 뿐입니다.
일 자체가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제일 중요합니다.
과거의 삶을 통해 현재를 산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다른 현재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곳은 아주 외딴 넓은 공터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싶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던 이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적어도 노동자의 이백 일치 품삯이 있어야만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필립보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고,
과거의 경험에만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굳이 과거의 경험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그들 모두 배불리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차고 넘치는 은총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 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말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풀밭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하신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주신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그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 물 위를 걸을 예언자(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는 기억과 추억으로 남습니다. 미래는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저도 과거의 기억과 추억으로 웃음 짓곤 합니다.
실수도, 성공도 지나 간 과거로 남으면 추억의 앨범에 남는 사진과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성지순례를 갔을 때, 동창 신부님들과 휴가를 갔을 때도 생각납니다.
나환자 마을에 봉사 갔을 때, 농촌으로 봉사 갔을 때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라는 기억과 추억에 의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갑니다.
미래는 지금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디딤돌이 됩니다.
이민 온 분들이 고생하면서 새벽잠을 설치던 것도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여름 땀을 흘리면서 밭을 가는 것은
가을의 풍성한 결실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에 온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날이 남은 날보다 더 많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신앙의 발판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과거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때는,’이라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율법과 계명의 ‘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과거에 누렸던 부귀와 영화에 젖어 있으면서
현실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는 ‘유령’이 되어서 현실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민 온 지 40년, 50년이 된 분들은 변화된 한국의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분들의 기억은 과거에 묶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지금의 기쁨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걱정, 근심의 90%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의 지나친 근심과 걱정이 지금의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우울증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현실의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를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쟁기를 잡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들에 피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느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는 어떠하겠느냐?”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루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로 하여금 신을 보지 못하도록 장막을 친다.
과거와 미래 일랑 모두 불살라 버려라.”
13세기의 영적 스승인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시간은 빛이 우리에게 당도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신에게 이르는 데 있어서 시간보다 더 큰 장애물은 없다.”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지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버려라.’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과거도, 미래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물려받은 과거의 재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오지 않았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 때문에 물려받았던 과거의 재물을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교회의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걱정 때문에
그동안 보여 주셨던 주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빵을 많게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걱정합니다.
고작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물고기와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없었다는 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걱정을 떨쳐버린다면
지금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고, 희망의 발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릴 수 있었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 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5-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는
6장 전체에 나오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라는
계시의 서론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라는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분,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의 정답은 “주님에 대한 믿음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필립보 사도에게 물으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사도들 모두에게 질문하셨는데, 필립보 사도만 이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라는 말은,
사도들의 믿음을 끌어올려 주려고 하신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려고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다는 필립보 사도의 대답은
“저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두 사도의 말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0-13)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는지는,
즉 기적의 과정이나 방법은 모릅니다.
어떻든 한 사람의 한 끼 식사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 다 배불리 먹었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어떤 아이의 모범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해서 모두 다 자기의 빵과 물고기를 내놓았고,
그래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 일이라면, 감동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그러면 이 이야기는 ‘빵의 기적’도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도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에 변화시킨 것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그것은 모범을 보인 아이가 일으킨 기적이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은,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기적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을 읽을 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셨음을 확인해 주는 말입니다.
당시에 그 빵을 먹은 군중은 모두 그 기적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긴 했지만 ‘기적의 의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직 신앙이 미성숙한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했던 예언자입니다.(신명 18,15-18)
그런데 신명기를 잘 읽어보면 ‘그 예언자’는 메시아가 아닌데,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고,
그 예언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에 구원과 해방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루카 24,21).>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은,
예수님께 ‘정치 지도자’가 되라고 요구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주고, 경제 문제도 해결해 주는 지도자.)
그 당시 사람들은 바로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해서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신 것은,
사람들의 ‘세속적인 요구’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하긴 한데,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나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서 숨이 막힐 정도라면(마태 13,22),
그래서 ‘영혼의 구원’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몸’만 생각하다가 먼지로 사라지는 것, 그것은 속세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해서 그것을 얻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먹고 남긴 빵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 나타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포석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의 기적에서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었다는 행적에 깔려 있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가 선교의 성과가 풍요로울 것임을 암시하는 마법의 숫자라면,
이 마법을 가능하게 해 줄 필수 조건은 12라는 숫자에 그 의미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2는 하느님의 역사적 선택이 나타난 숫자입니다.
일찍이 밤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늘리는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실제로 후손 증가의 계기로 삼으신 일이 야곱의 열두 아들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열두 아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450여 년 동안 열두 지파로 늘어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는 각 지파 별로 토지를 분배받아
더 큰 집단으로 자라날 수 있는 토대를 쌓았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임금들과 대신들, 사제들과 학자들 등
이스라엘 민족의 엘리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겼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끝내 또다시 바빌론으로 종 살이를 하더니,
한번 쇠약해진 국력이 회복될 틈도 없이 그리스계 헬레니즘 세력,
로마 세력에 연이어 지배를 당하는 동안 이 열두 지파의 혈통은
레위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남기고서는 거의 다 끊어지고 섞여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정신도 쇠약해지고 혈통도 보잘 것 없어진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새로이 열둘이라는 역사적 선택을 제자들로 감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제자들 자신은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들도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로 불리었다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공생활 3년 내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스승께서 수차례나 발현하셔서 과거의 가르침을 상기시켜 주시기도 했고,
성령까지 보내주셔서 믿음도 담대해 질 수 있었고, 기억도 생생 해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심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담대한 믿음으로 생생해진 기억을 되살려
공개적으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니자 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했고,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저명한 율법학자마저 이를 거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최고의회의 대세가 이렇게 기울어지자 대사제도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사도들을 박해하지는 못했지만 풀어주기 전에 매질한 다음 놓아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얼마든지 죽이고 싶도록 박해하려던 흔적이지요.
그런데 그 억울한 매질을 당한 사도들의 마음가짐이 주목할 만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기준으로는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일인데,
사도들이 기뻐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과거의 제자들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었는가?
그것은 과거 스승으로만 모시던 예수님을
이제는 자신들의 주님으로 모실 정도로 새로운 인간입니다.
과거에 스승에게 빚진 마음을 이런 매질 당함의 모욕으로 털어내고 싶을 정도로
도덕적 부채 의식이 생겨난 새 인간으로 거듭났음을 뜻합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한 몸처럼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빵의 기적에서 남은 빵 조각으로 채워진 열두 광주리의 숨겨진 의미였습니다.
물고기든 빵이든 기적은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일으켜주실 수 있습니다.
그 수효가 153마리든 5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기적의 필요조건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주실 만한 파트너가 열둘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열둘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기적의 충분조건인 은총은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선교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필요조건인 사도들의 믿음과 일치가 변수라면
충분조건인 하느님의 은총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의 사기지은입니다.
변수의 비중은 겨우 1%요, 상수의 비중은 무려 99%나 되지만,
이 둘을 합해야 100%가 되기 때문에 99%의 상수를 믿는 믿음과
1%의 변수를 채우려는 노력이 다 필요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예수님 말씀이 있어서 들려드립니다.
하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마태 18,19-20) 이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요한 14,12) 이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열두 광주리를 채우시기 바랍니다.
미신은 왜 생기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이 기적은 ‘산’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도 광야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지 않으십까?”라고
대답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여전히 자기 능력에 의존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숫자 ‘12’는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민족이 나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이 되려면 먼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수 있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빵이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선악과로 배를 채웠습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척박한 땅에 살면 사람이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빵은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살립니다.
그렇게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고 에덴동산이십니다.
에덴동산이 아닌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헛것을 보며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척박한 땅에 사는 이유를 찾아내려 합니다.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입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 욕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입니다.
욕구에서 벗어나지면 그냥 자연은 자연일 뿐입니다.
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할까요?
왜 우리는 사진을 찍어놓고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았느니,
성모님을 보았느니, 천사를 보았느니 하며 놀라워할까요?
점이 많이 찍혀있는 그림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상상으로 동물이나 자연의 일부분,
혹은 무기와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첫 번째 그룹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경우를 상상하도록 했고,
두 번째 그룹엔 완전히 긴장을 풀고 휴양지에 놀러 와서 편히 쉬는 상상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상상 훈련을 통해 무작위로 찍힌 점들을 보는 두 그룹의 결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저건 뭐 그냥 점들만 찍어놓은 거네요”라고 대답했고,
첫 번째 그룹은 무의미한 점들 가운데서 동물, 나무, 단어 등
온갖 것이 그림에 담겨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조: ‘마음의 법칙;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널리 퍼지는 이유’, 폴커 키츠, 포레스트북스]
이렇게 내가 불안한 상황에 있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고 착각해서 자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모두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둘 다 사람을 나쁘게 만듭니다. 나뿐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안한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을 만나야 합니다.
옛날 공주 지방에 한란이란 이름의 총각이 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그래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지만
손대는 것마다 잘 키워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를 팔러 시장에 나갔다가 누군가 팔고 있는 잉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 잉어를 나무를 판 돈으로 사서 강에 방생해줍니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같이 순수하고 성실한 아이는 처음이구나.
그런 마음이라면 흉한 땅에 가서도 살기를 녹여버릴 수 있을 게다.
동쪽 오송벌로 가거라.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땅이지만 넌 큰 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게야.”
잠에서 깨어난 한란은 너무나 생생한 꿈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오송벌은 엄청난 황무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황무지를 개간하려고 하면 지네신의 저주받는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황무지 북쪽에 지네창이라 불리는 흉가에 커다란 지네가 살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산 여인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고
3년이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출도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직 윤달이 오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해코지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윤달이 왔고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팔려 온
한 처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을 본 한란은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갔을 때 한란은 지네창으로 향했습니다.
집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의 뼈가 너저분하게 있었습니다.
지네의 냄새가 났습니다. 여인은 기절한 상태로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한란은 처녀를 구해왔지만, 지네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둘은 혼인하여 열심히 일하여 황무지를 엄청난 곡식 지대로 변화시켰습니다.
만석꾼이 된 한란을 보며 마을 사람들도 지네창을 불태우고 황무지를 일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땅을 파보니 그곳의 퀴퀴한 냄새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네창을 팠더니 물이 많이 나와서 황무지에 물을 댈 수 있었고
그래서 모두 배부르게 먹고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주 한 씨 시조 한란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출처: ‘금 손 총각과 처녀 제물; 청주 한 씨 시조 한란’, 유튜브 채널, 노가리 사랑방]
왜 한란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지네신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손만 대면 황무지에서도 곡식이 잘 자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싫었거나 혹은 그 황무지에서 그런 축복이 올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은
그 핑계를 지네신에게 두었습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지네신을 만들어놓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는
물줄기가 있는 그곳을 파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신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들이 에덴동산을 버리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이유를 대기 위한 자기합리화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나를 휴양지처럼
편안하게 대해주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 걱정이 사라지고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이런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내가 에덴동산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셨고 제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보는 이를 선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한란과 같이 모두를 먹일 수 있는 에덴동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사람이 헛것을 보며 나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