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 만국박람회(1900년)와 황제의 밀사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이듬해 6월 13일 학부협판(지금의 법무부 차관) 민영찬을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 준비를 총괄하는 ‘박물사무부원’에 임명했다. 10개월 전부터 착실히 준비해 대한제국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나라의 위상을 높여 주변국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만국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박람회장에 지어야 하는 대한제국관 건축비 10만 프랑과 박람회 기간 동안 대지를 임대하는 비용 54,000프랑 등 거금이 필요했지만, 대한제국의 재정은 충분치 않았다. 만국박람회에 한 나라라도 더 참가시키기를 원한 프랑스 정부가 대한제국에서 광산 채굴권을 따내고 싶어 하는 미므렐 백작을 소개해주었고, 얼마 후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한 대한제국관 건축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관 공사가 본격화될 무렵, 민영찬은 건축을 도울 목수 2명과 함께 인천항에서 프랑스를 향해 출발했다. 1900년 1월 16일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박람회에 참가한 건 파리 만국박람회가 처음은 아니었다. 1893년 미국이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시카고 만국박람회에도 조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참가한 바 있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참가 결과에 대해서는 《고종실록》 30년(1893) 11월 9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이날 고종은 박람회 대원으로 참석했던 정경원에게 “미국의 물색(物色)은 얼마나 장관이던가?”라며 미국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모두 몇 나라가 모였던가?”라고 물었다. 정경원이 “모인 것은 47개 나라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대원이 와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대원 없이 그저 상인들이 점포를 배정받았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이날 대화에서 재미있는 건, 고종이 만국박람회에 세워졌던 조선관의 크기에 대해 “몇 미터나 되던가(得幾米突乎)?”라며 미터법으로 물은 대목이다. 고종이 미터법을 알고 있을 정도로 외국의 문물에 대해 식견이 있는 ‘개화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1893년 5월 7일자 프랑스 공사관 문서에 의하면, 고종은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프랑댕(Hippolyte Frandin)에게 7년 후에 열리는 프랑스 만국박람회 참가 의사를 밝히면서 “준비를 서두르는 바람에 결과가 좋지 못했던 시카고 박람회 때와는 달리 본인(고종)이 직접 파리 박람회 준비를 지휘하고, 왕가의 일원을 조선 대표로 참가시키겠다”고 했고, 약속대로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찬을 파견한 것이다.
1900년 4월 14일(공식 개막일)부터 11월 2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이 참가한 마지막 국제 행사다. 당시 프랑스는 새로운 세기를 알리는 세계 박람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세계 각국은 자국의 위상을 만방에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광무 황제로 등극한 고종이 이끄는 대한제국 역시 나라와 황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모든 외교적 역량을 쏟아부었다.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0년 12월 6일자 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제국관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딴 형태다. 삽화 왼쪽에 일본에서 단오 때 남자아이의 성장을 축하하는 의미로 다는 고이노보리(鯉幟) 같은 장대가 있고, 태극 문양도 어색하게 그려진 것을 보면, 프랑스 작가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의 건물과 거리 사진을 참고해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관 앞에는 제물포의 골목길을 재현해 조선의 기와집과 상가 등을 만들었고, 박람회 기간 동안 길거리곡예 등 전통 놀이문화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줬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을 그린 삽화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0년 12월 6일
당시 프랑스 언론은 대한제국의 참가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극동 지역에서 가장 닫힌 국가이며, 주변 국가들로부터 매우 부러움을 받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는 분명 한국이다. 한국의 모든 것은 감춰져 있고, 풍습은 특별하며, 이 나라의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어떤 외국인들과도 접촉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박람회에 참여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 정부는 특이한 건축 양식의 전시관을 설치했고, 한국 물품과 생산품들의 견본을 진열했다. 이것들을 보면 이 신비로운 지역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하게 생겨날 것이다.”
만국박람회 카탈로그에서도 “한국은 군대와 금융 체제를 재정비하고, 광산 채굴권을 나눠주고, 전차를 설치하면서, 근대 일본을 얼마간 모방하고 있다. 외국인들을 조언자, 교수, 엔지니어 등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기독교도 널리 퍼져 있다. 유럽 국가들과는 친밀한가? 아직은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은 유럽과 가까워지기 위해 계획을 세운 때로부터 2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2세기에 걸쳐 나가사키에서 유럽인들과 교류했던 일본은 그들 민족의 재능을 잘 보존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신생 한국은 겨우 5년 되었으니, 아직은 몇 년이 더 필요할 것이다”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한제국관에서는 고려시대 불경, 팔만대장경, 《삼국사기》 같은 서적, 옛날 동전, 도자기, 자수공예품, 병풍, 금은세공품, 나전칠기세공품 등 전통문화를 알릴 수 있는 물품을 전시했다. 여기에 표범가죽, 조선시대 투구, 검, 화살통, 군복 등 우리 민족의 용맹성을 드러내는 물품을 출품해 대한제국의 존재를 세계인들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민영찬에 대해 “수줍고 똑똑하며 진보적인 인물이다. 병약해 보이지만 학구열이 높고, 프랑스에 온 것을 단순한 유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기록을 외교문서에 남겼다.
이런 민영찬의 노고 덕분이었을까? 대한제국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대상 1개, 금메달 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5개, 장려상 3개를 수상했다. 그리고 민영찬은 ‘박람회 조직 및 진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명예훈장을 받았다. 또 다음 해인 1901년 5월 31일에는 대한제국에서 프랑스인 6명에게 만국박람회에서 수고했다며 팔괘장을 수여하면서 호혜적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위원장 민영찬의 사진
우리 근대사에서 고종 황제의 밀사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당시 프랑스 주재 공사인 민영찬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해서, 조약이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무효임을 알리고자 했다.
민영찬(閔泳瓚)은 1873년(고종10)에 태어났다. 부친은 대원군의 손아래 처남인 민겸호로 고종의 외삼촌이고, 형은 충정공 민영환이다. 그런데 고종 역시 어머니와 같은 여흥 민씨를 황후로 맞이해, 영환 · 영찬 형제는 고종의 외척인 동시에 명성황후의 조카로, 왕실과의 촌수를 계산하기가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가까운 관계인 ‘명성황후의 조카’로 통칭하고 있다.
17세 때인 1889년(고종2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고, 1895년에는 명성황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귀국했다. 1897년부터 외교관으로 유럽 지역을 순방했는데, 그때 영국 여왕을 접견해서 후한 대접을 받은 사실이 〈독립신문〉 1897년 8월 28일자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1902년 민영찬은 프랑스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부당성을 프랑스와 러시아 정부에 알렸고, 이에 프랑스 주재 일본 공사관에서는 그의 활동을 자국 외무성에 보고하기 시작했다.
고종의 칙서 원본사이즈보기
고종의 칙서
민영찬을 프랑스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는 내용
대한국 대황제 희가 대법민주국(대프랑스민주국) 대백리새천덕(대통령) 각하께 고합니다.
짐은 생각건대, 우리 양국은 조약을 맺은 지가 오래되어 우의가 날로 중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의 교분이 계속 이어지고 통상업무도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짐이 친애하는 신하 종2품 학부협판 이등공신 민영찬을 특별 선발하여 특명전권공사로 삼아 앞으로 귀국에 가서 수도에 주재하면서 교섭의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짐은 이 신하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 일처리가 명확하고 치밀하므로 이 직임을 맡길 만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에 특별히 서신을 써서 해당 사신에게 주어 직접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부디 정성을 다하여 신의를 지키고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수시로 들어가 뵙고 짐의 마음을 대신 전달하도록 허락하시어 더욱 돈독하게 화의하며 함께 융성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각하의 무한한 경복을 축원합니다.
- 광무 6년(1902, 고종39) 2월 17일 한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국새를 찍음. 희(熙)
- 봉칙 외부대신 서리 박제순(朴齊純)
같은 해 12월 민영찬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미국의 루트(Elihu Root) 국무장관을 면담하기 위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조인되었으므로 무효”라는 고종의 서신을 전달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오히려 일본을 도와 민영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들에게 대한제국은 도와줘야 할 나라가 아니라, 일본과의 외교적 흥정에 이용할 나라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이 미국과 외교적으로 공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나라가 1905년 7월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루트 장관은 “황제의 서신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접수된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며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주미 일본 공사에게 민영찬이 가지고 온 편지 사본을 보내주었고, 그 기록이 일본 외무성에 남아 있다.
같은 날 일본의 외교문서에 의하면, 일본은 민영찬을 ‘황제의 밀사(韓帝密使)’로 규정했다. 그리고 미국 주재 일본 공사관은 민영찬이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갈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일본 정부에 보고했다.
민영찬을 ‘대한제국 황제의 밀사’라고 보고한 일본의 외교문서
민영찬은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 언론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와 〈이브닝스타〉에 “민영찬 공,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협박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다” “민영찬 공의 좌절―루트 국무장관,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이의 제기를 들었다” “대한제국의 이의 제기―대한제국의 황제는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등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지만, 민영찬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의 해외 공관들은 하나둘 폐쇄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공관 폐쇄 후 민영찬은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했다. 그러자 상하이 주재 일본 공사는 그의 중국 체류에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판단해 서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게 보고했다.
민영찬은 상하이에서 2년 넘게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를 요주의인물로 분류해 계속 감시했고, 끊임없이 협박과 회유를 일삼아 결국에는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도록 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던 ‘황제의 밀사’는 이렇게 일본이 주는 관직을 받았고, 광복 후 이 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형식적 관직을 받은 일 외에는 친일행적이 없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실제로 그는 1930년 1월 1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전만 해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요새는 별로 책도 읽지 않소. 책을 읽어서 쓸 데가 있어야지. 이같이 집 안에 박혀 살림살이나 하기 때문에 책 본 것이 오히려 후회가 될 때가 있단 말이지요”라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기자는 그가 말을 마치고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장탄식인 것 같다고 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나라를 잃고 일본의 집요한 감시와 회유공작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불운한 외교관의 긴 장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순종의 ‘대리즉위식’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것을 외국에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도착해 기자들 앞에서 프랑스어로 된 〈조선의 호소〉를 발표하자, 일본은 1907년 7월 18일 총리대신 이완용을 시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켰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은 일본의 결정에 반발하며 양위식과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고 내시를 시켜 대신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아래는 내시가 대신한 순종의 즉위식 그림이다.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군사 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ustrata)〉 1면
‘조선의 새 황제 즉위식’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토 히로부미는 식이 끝난 후 일본 외무차관과 총리대신에게, 덕수궁 중화전에서 권정례(대리의식)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의 외교전보를 보냈다.
즉위식을 대리로 거행하고, 8월 3일에서야 순종 시대의 연호인 ‘융희(隆熙)’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순종의 정통성에 문제가 제기될 기미가 보이자, 일본과 친일파 각료들은 ‘일그러진 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즉위식을 8월 27일로 정해서 다시 거행했다.
조선 영조 때부터 대한제국 시절까지 임금의 행사를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에는 즉위식 광경에 대해 “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시를 시켜 대리로 즉위식을 거행하게 하며 일본의 고종 강제 폐위에 반발했던 순종의 ‘항거’는 40일 후 ‘진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끝이 나고 말았다.
알폰스 무어(Alphonse Mucha, 1860년~1939년)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 그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여성과 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로 구성되며, 소위 말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화풍의 알파이자 오메가. 또한 배경과 장식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는 화풍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상업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석판화가 많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의 연극 포스터부터 말기의 작품들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초기 아르누보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자포네스크(자포니즘, Japonism) 우키요에(浮世繪)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아르누보의 거장 무하의 화풍은 후에 일본의 망가화풍(日本漫画), 특히 미소녀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의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도 무하 특유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오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아르누보의 유행기간은 짧았지만, 현재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에선 여전히 이 아르누보가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