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파’동기생 문세영 참변
“권력무상 인생회의 절감”
사법연수원 13기출신 검사들은 검찰의 「졸업정원제」 첫세대로 꼽힌다. 이들은 사법시험
합격자가 150명에서 300명으로 대폭 늘어난 첫해인 83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들은
2년간의 사법연수원(제13기) 과정과 군법무관을 마치고 83~86년에 검사로 임관했다.
연수원 13기생들은 그 수가 이전의 졸업생들에 비해 두배가 많았다.
검찰 지원자도 99명이나
되었다. 그 전의 검사 지원자는 매년 40명 안팎이었다.
13기 검사들은 거의 예외없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검찰에서는 8명의 범무장관과 검찰총장을
배출한 고시 8회(1956년) 이후 질적 양적으로 최대의 인재들이 배출되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13기 검사들의 가장 큰 「현안」은 언제나 자리문제였다. 검찰조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검사 수가 갑자기 두배로 늘어나면서 자리다툼이 치열했던 것이다.
도중하차하는 검사도
이전에 비해 훨씬 적었다. 임관 15년이 넘도록 변호사로 개업한 검사가 20여명에 불과했다.
70여명의 검사들이 아직도 굳건히 남아 검찰의 중추로 성장하고 있다.
자연히 동기생들
사이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13기 검사들의 경쟁이 본격화한 것은 95년부터였다.
이 때부터 부장검사급으로의 승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2년여에
걸쳐 거의 대부분 승진했고 이 때문에 후배인 14기생들이 3년동안 제자리를 지키는 반사적
불이익을 겪었다.
13기생들의 한차례 선의의 경쟁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문세영 교통사고로 중태 다소 회복
그러나 13기 검사들의 해피엔딩 후에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쳤다. 문세영 권영석검사 등
동기생 2명이 잇따라 참변을 당한 것이다.
문검사는 전주지검 부장으로 있던 지난해 8월
근무를 마치고 직원 상가에 문상을 다녀오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문부장이 탄 승용차가
차선을 위반해 좌회전하던 차에 들이받힌 것이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문부장은 천장 구석의
손잡이 중 딱딱한 부분에 머리를 받쳐 두개골이 함몰하는 중상을 당했다. 문부장은
거의 사경을 헤매다 상태가 다소 호전돼 현재 서울중앙병원에서 재활치료 중이다.
그러나
아직 사람도 못알아본다고 한다. 검찰 동료들은 모두 문검사의 사고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문검사는 13기 검사들 중 특수수사에 관한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검사로서의 기개(氣槪)가 있었다. 특히 「있는 자들의 비리(非理)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그는 서울지검 특수1부 검사로 있던 91년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예체능계 입시에서
심사위원들에게 돈을 많이 주었다는 소문이 돌던 학생들이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러한 소문은 당시 무수히 돌았고 제보도 그만큼 많았다.
그러나 문검사는 직감적으로
이 제보가 이전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곧 수사에 착수해 이대 무용과
육완순교수 등 3명의 유명교수를 구속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는 또 서울지검 민생특수부
검사로 있으면서 조직폭력배들의 배후세력을 캐냈다. 문검사는 당시 엄삼탁과 정덕진
등 거물들의 혐의를 밝혀냈다.
이 수사는 검찰의 「사정」에 따라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지만
2년 뒤 홍준표검사(현 국회의원)의 슬롯머신사건 수사에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었다.
문검사 자신은 대단히 청렴했다.
그는 대전의 집값이 좀 오르자 그 집을 팔고 변두리로
옮기며 2000만원을 만들어 특수부 시절 수사비용으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