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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리문답공부 제 23강 (이 근호목사, 2003년 5월 25일, 우리교회)
구원론에서 첫 번째가 소명입니다. 소명이란 부르심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르지요? 그러니까 나사로가 나왔잖아요. 부르심 자체가 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너는 원래 이쪽 세계의 사람이다. 나오너라’ 합니다. 이 부르심이 구원의 시작이고 전체입니다. 이 안에 다 들어 있겠지요.
두 번째가 중생, 다시 태어남입니다. 예전 사람 그대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중생이란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지요.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교체를 시켜 주는 겁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합니다.
속사람이라는 것은 새로운 씨앗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서 육이 지배하던 우리를 성령이 지배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구원론에 이것이 있습니다. 세 번째 회개, 네 번째가 믿음, 다섯 번째가 칭의, 여섯 번째가 양자, 일곱 번째가 성화, 여덟 번째가 영화,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칭의, 양자, 성화, 영화, 이런 일들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회개가 무엇이냐’를 생각해 봅시다. 그림으로 그리면 쉽습니다. 이쪽이 천국이고 이쪽이 지옥인데 우리는 본질상 태어날 때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겠지요. 지배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 되고 속성이 되고 하나의 성격으로 굳어집니다. 성격이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어요.
성격은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뒤에서 그런 속성은 그대로 남는데 지옥에서 계속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지요. 그래서 아주 쉽게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길은 찾는 사람들이 많고 천국 가는 길은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지옥 가는 길은 넓고 찾는 사람들도 많아서 외롭지 않지만 천국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고 찾는 이도 적으니까 자연스럽게 서글프게 외로운 길로 갈 수 밖에 없지요. 회개라는 것은 지옥 가는 이 지점,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천국 지점으로 바로 뛰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쪽으로 와서 다시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보통 회개에 있어서 제일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 뭐냐 하면 회개와 반성을 잘 구분을 못해요. 회개는 반성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반성이라는 것은 지옥 가는 이 길에 있어서 계속 가다가 안 되니까 멈췄다가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시도하는 이것이 반성이죠. 맨 지옥 가는 그 길 자체에서 자기의 원함을 그대로 가지고 ‘좀 더 제대로 가 볼까’ 하는 것이 반성입니다.
반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 칼 포퍼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과학이라는 것은 반성의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과학의 발전은 시행착오로서 이루어진다’고 하죠. 계속 노선을 수정해 가면서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성공하게 된다는 거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잖아요. 실패한다는 것 자체가 성공할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으니까 실패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거죠. 그 실패를 통해서 성공이라는 자식을 낳게 되니까요.
칼 포퍼에 따르면 자꾸 실패하다 보면 ‘아하, 내가 어디서 잘못 되었구나’라는 것을 본인이 감 잡을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운전연습 할 때 실감이 납니다.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없는데 하다 보면 ‘아하,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것이 감이 오지요. 직접 운전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을 때 ‘아하, 핸들을 이런 식으로 이만큼 꺾어야 사고 안 나겠구나’라는 것을 감 잡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숙련입니다. 반성이라는 것을 늘 하게 되는데 특히 초등학생들 보면 일기를 씁니다. 일기는 일종의 반성문입니다. 5월 25일 날씨, 비. 오늘은 교회 오는데 무슨 일이 어쩌고 저쩌고. ‘아이고, 그 집사님한테 그런 말을 하지 말 것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다음에는 그런 말을 안해야지 …’ 이런 것을 죽 쓰다 보면 시행착오를 통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자아를 형성하는 거죠.
이게 반성이고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반성과 회개를 구분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징벌하는 것이 아니고 확인 작업을 하는 겁니다. 확인 작업, 이런 것이 참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 게?’ 하잖아요. 내가 누구냐?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만 할 뿐인데 반성은 ‘왜 내 뜻대로 일이 꼬이지? 왜 내 뜻대로 안되지’에서 나오는 것이 반성입니다.
‘내가 누구지’라고 묻는 것은 회개해야 발견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아, 내가 왜 이게 안 되지? 아, 내가 잘못을 했구나. 다시는 안 그래야지.’ 이것은 반성이죠. 그런데 반성을 하지 말고 회개를 해야 돼요.
‘내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그렇게 안 했을 것인데…’ 라고 하다가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내가 잘못했건 안했건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만들어서 된 것인데 내가 그걸 따지는 식으로 하면 안 되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잘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너무 욕심이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것으로 되었지 왜 조금 더 잘해보겠다는, 그래서 나를 옭아매는 그런 무서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반성하는 그 자체를 반성해야 돼요. 반성해도 안 될 것을 또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뭔가 자기 정당성, 뭔가 자기도 된다는 희망, 이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죠. ‘밥을 태웠다. 아,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밥을 안태웠을텐데….’ 그러면 며칠 잘 하겠죠.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밥 태울 때도 있을 거예요.
사람이 정신이 점점 없어지다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런 것으로 인해서 자꾸 마귀의 시험에 듭니다. 마귀는 자꾸 우리에게 반성을 하라고 합니다. 반성하라! 마귀의 음성입니다. 회개하라! 이것은 주의 음성입니다. 달라요. ‘네가 누구냐?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너한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상황이 터지더라도 네 신분에는 아무 변동이 없어. 왜 너는 그것을 못 믿어.’
이것은 회개고 ‘반성해봐! 좀 더 잘해봐. 좀 더 기도를 오래 해봐. 헌금을 좀 더 해봐. 성경을 좀 더 오래 봐. 그러면 너에게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반성, 이것은 악마의 소리고 마귀의 소리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누구보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세례요한도 그랬습니다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을 보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금식하면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를 통해서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 저 죄를 저에게 물으시고 …’ 라고 날마다 회개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여러분은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자식을 위한 기도문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 기도문을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기도 내용이라고 보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기도도 아니고 꼭 지옥가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요. 그것과 비슷한 것이 또 있어요. 부부 십계명이라는 것, 그것을 보면 도대체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모십계명, 권사 십계명 온갖 것이 다 나옵니다.
계명 없어서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십계명 가지고도 모자라서 20계명, 30계명 마구 보태고 있습니다. ‘… 이런 자식 되지 말게 하옵소서.’ 제발 그런 기도 믿지 마세요. ‘부모가 기도하는 자식은 안 망한다?’ 기도해서 자식 망한 집구석이 한 두 집이 아닙니다. ○○○이라는 유명한 무당, 점쟁이가 있습니다.
그 무당의 아버지가 장로가 어머니가 권사인데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쳐주는 무당입니다. 인물 잘났고 학력 받쳐주고 박정희 전 대통령 죽을 것도 예언해서 맞췄답니다. 그 무당의 엄마 권사가 기도를 하는데 그 권사님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문 쳐 닫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사흘 밤낮을 밥도 안 먹고 나오지도 않는대요.
그래서 그 무당이 엄마가 기절할까 걱정되어서 자기에게 신이 내렸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답니다. 그 엄마 권사의 평소 기도가 뭐냐 하면 ‘너는 아빠가 장로고 내가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 권사의 자식이기에 이런 자식이 되어야 해’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딸은 모든 것을 엄마가 다듬어 주고 만들어주는 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만약 그 딸이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엄마가 밥도 안 먹고 기도실에 들어가서 2박 3일 동안 기도해버립니다. 제가 울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동안 삶을 연장했는데 목사님의 강의를 들어 보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들리네요.’ 좀 불만이 섞어서 하는 질문이죠.
‘그러면 기도응답 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시비조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히스기야가 날 때부터 더 오래 살려고 기도했습니까? 안 그렇거든요. 히스기야야 5살 때부터 ‘제가 15년을 더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랬습니까? 제가 답변하기를 ‘그런 내용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기도하면서 파악할 수 있어야 그것이 기도입니다’ 라고 했어요. 그것이 기도응답입니다.
‘내가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도움으로 이런 기도를 합니다’라는 그 은혜성, 그 은혜성을 깊이 접수하는 것, 그게 기도응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기도응답을 하나님이 줘도 본인이 안 받아요. 자기가 원하는 응답이 나올때까지 계속 버티고 있는 거예요. 응답 1, 응답 2, 응답 3, 다 제껴 버리고 응답 4,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라고 나옵니다.
만약에 ‘내 딸은 절대 무당 같은 것이 되면 안 되고 반드시 나같이 교회의 권사가 되어야 해’라는 이런 자기응답을 가지고 기도실에 들어가니까 응답을 줘도 막무가내로 자기 맘대로 처리하는 거예요. ‘안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알아서 제치고 처리를 다 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딸을 위해서 내가 무슨 짓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기지 회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자기 권사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 ‘우리 엄마는 지독한 자기집착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그 엄마는 하는 소리가 ‘얘야, 이게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잖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인데 네가 왜 그 맘을 모르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 맘 안 알아주는 그것까지도 응답 아닙니까?
최고로 반성을 멋지게 한 사람은 가룟유다 입니다. 가룟유다는 스승을 팔았다고 해서 자살까지 한 사람입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을 팔았다고 목숨까지 끊습니까? 스승 팔면 판 것이지 돈 돌려주면 그만인데 돈 돌려준 것 가지고는 마음이 안 풀려서 기어이 자살을 해야 양심에 합당한 것으로 알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보통 양심가가 아닌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지고 마귀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시켰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반성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은 절로 됩니다,. ‘아, 잘난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앞으로 다시는 안 그래야지.’ 이것은 본성입니다. 이것이 육입니다.
그런데 영이 임한 사람은 ‘나 가꾸기, 그것이 내가 영적인 사람 된 것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공항에 보면 가만있어도 길 자체가 움직여서 가는 것이 있어요. 가만있으면 죽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벨트위에 있는 거예요. 그 위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벨트의 중요한 은혜성을 모르고 만날 반성한답시고 자기 가슴만 치곤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내가 지금 여호와의 은혜에 실려가고 있구나’라는 이것이 확인될 때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아, 내가 이쪽(지옥)이 아니고 이쪽(천국)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거죠. ‘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라는 것이 확인될 때 그때를 가지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하는 거예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어떤 법이 없습니다. 그게 특징입니다. 성령의 열매, 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어떤 규칙이나 법도에 따라서 하지를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기뻐서 너무나 맘이 가벼워서 합니다. 헌금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성경을 보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는 그 즐거움과 기쁨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기 때문에 그것이 오래 가지도 않을뿐더러,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법적으로 길게 끈다고 해서 열매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순간순간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해주심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신년예배같은 것을 제가 싫어하는 이유는 그 자리가 뭔가 반성하고 결심하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술을 아직 못 끊었는데 목사님의 말씀대로 술을 끊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반성을 하지 말고 회개를 하세요.
술 안 끊어도 될 신분입니다. 그것을 확인하시고 ‘아, 술 안 끊어도 되는구나’라고 자발적으로 우러날 때 그 때 끊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제가 담배를 끊겠습니다.’ 담배 끊는다고 규칙을 세우지 말고, ‘구원 받았는데 내가 이걸 꼭 피워야 되나? 더럽기도 하고 돈도 들어가는데 돈 3000원 아끼자’ 해서 안 피우면 그게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죠.
‘다시는 제가 마누라를 안패겠습니다’ 라고 해서 또 규칙화시키면 ‘내가 안 때리려고 했는데 맞을 짓을 하네’ 라고 하면서 또 쥐어박게 됩니다. 자꾸 규칙화시키면 마귀의 시험에 드니까 그럴 필요 없이 자발적으로 ‘부족한 것 다 도와주서 사는 주제에 내가 오히려 맞아야 할 놈이 누구를 때릴 자격이 되나?’ 그렇게 나올 때 그게 성령의 열매고 온유와 화평이라는 겁니다.